375화
“우진 씨……!”
김우진의 바로 옆에서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본 민아린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재빨리 민아린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내가 민아린을 끌어당기자마자 김우진이 서 있던 자리 바닥에서 벽이 불쑥 솟아올랐다. 조금만 늦었어도 벽 하나를 두고 민아린이 혼자 낙오될 뻔했다.
그 누구보다 기운에 가장 예민한 여우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데다 속도도 엄청나게 빠르다. 입술을 깨물며 불안감에 주위를 둘러본 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권정한…….’
김우진에 이어서 권정한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언제 사라진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한이결.”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진정하고 잘 들어. 여긴 아무래도 ‘미로’를 변형시킨 것 같다.”
“미로 형태요?”
“게이트 형태 중 하나야. 길이 계속 바뀌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이 사라지는 난이도 높은 형태지. 물론 여기처럼 어둡고 빠르게 사라지진 않지만, 만약 칼리의 피가 미로 형태를 변형시켰다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군.”
“그럼… 이런 식으로 사라진 팀원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겁니까?”
“그건 게이트마다 달라.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고 미로 내부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박건호의 설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발끝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오한에 고개를 숙였다. 아까 김우진이 그랬듯 내 양다리가 검은 연기에 먹혀 가고 있었다.
“이결 씨!”
피익! 피이익!
아무래도 다음 타자는 나인 모양이다. 혹시라도 민아린이 휩쓸릴지 모르니 뒤로 물러섰다. 어깨에 올라와 있는 여우도 밀어 냈다.
실시간으로 어둠에 먹히고 있는 내 몸은 권세현의 기운 때문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던 팀원들의 비하면 속도가 느렸다. 그래도 박건호 덕분에 이게 ‘미로’ 형태를 변형시켰다는 것을 알게 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마 내가 사라지고 나면 천사연과 박건호, 민아린도 마찬가지로 이 연기에 먹힐 것이다. 박건호가 얘기한 것처럼 ‘미로’ 형태를 변형시키면서 생겨난 상황이라면, 이렇게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닐 거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연기가 가슴까지 올라왔다. 그 상태로 남은 세 명에게 말했다.
“제가 꼭 찾아갈 테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정신이 희미해지며 눈을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한이결, 곧… 꿈에서…….”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버티지 못하고 감은 그 순간에 천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끝까지 듣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조금 뜨거웠다. 코끝을 스치는 짙은 커피 향에 눈을 떴다.
새하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새하얀 커피 잔과 그에 비교되는 까만 커피가 흑백 대비를 이루었다. 그걸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방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기억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커피가 담긴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지금 이 현실이 굉장히 편했다. 마음 졸일 일도 없고, 불편한 상황도 없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와 테이블 반절을 비추는 햇빛은 조금 뜨거웠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아, 이대로…….’
계속 살고 싶다. 아무 소음 없이 고요하게 퍼진 평화가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한참을 커피 잔만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
하지만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햇빛은 여전히 테이블 반절을 비췄다.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똑똑.
아무런 의지도, 기력도 없는 채로 커피 잔만 노려보던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테이블을 노크하듯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손을 따라서 고개를 들자 순백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뒤로 보이는 배경도 그의 머리카락과 테이블, 커피 잔처럼 온통 하얗게 빛났다. 유일하게 색을 갖고 있는 건 잔에 담긴 까만 커피와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옅은 노란색 햇빛뿐이었다.
그 기이한 광경 속에서 나는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이제 보니 남자의 눈동자도 색이 담겨 있었다. 왼쪽 눈동자는 커피와 똑같은 검은색이고, 오른쪽 눈동자는 햇빛처럼 노란색이었다. 그게 참 예쁘고 신기해서 정신없이 구경하는데, 잠자코 앉아 있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귀여워서 내버려 두고 싶지만… 여유가 별로 없구나.”
“…….”
“세현아.”
세현아, 세현아, 세현아…….
남자의 나지막한 부름이 해일처럼 내게 들이닥쳤다. 귓가에 몇 번이고 울리는 이름에 강렬한 두통이 머릿속에 번져 나갔다.
“아, 크윽…!”
누군가 머릿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뇌를 찢어 버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통증이었다. 머리를 짚은 채로 상체를 숙였다. 버티기 힘들 정도로 어지럽고 매슥거렸다.
평화로웠던 분위기가 단숨에 산산이 깨졌다. 정신을 차리니 이토록 비정상적으로 하얀색만이 가득한 세계가 너무나도 혐오스러워졌다.
“……엘.”
“그래.”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엘로힘이 내 부름에 다정하게 대답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아지고 있는 두통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여긴… 어딥니까?”
“꿈속. 정확히는 타인이 강제로 만들어 낸 꿈속이지.”
꿈에서 엘로힘을 만난 건 이제껏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엘로힘을 보기 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고 그저 평화롭다고 만족했던 나 자신이 믿기지가 않았다.
“실제 저는 아직 미로 속에 갇혀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그건 내가 대답해 줄 수가 없구나.”
대가가 커서 알려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설마 또 엘이나 엘라하가 대가를 치르고…….”
“아니. 내가 여길 올 수 있었던 이유도, 이제부터 우리가 나눌 대화도 모두 다른 이가 미리 대가를 치러 놔서 가능한 일이란다.”
“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간 나를 바라보던 엘로힘이 이어서 설명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천사연과 따로 해 둔 거래다.”
한국 레드 마켓에서 리웨이의 공간 길을 이용하기 직전, 엘로힘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말하던 천사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엘로힘이 가려 주기까지 한 그 대화 내용이 설마…….
내 생각을 읽은 엘로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천사연은 자신의 과거 기록과 앞으로의 기록을 모두 넘기는 대가로 우리에게서 여러 정보와 도움을 받아 갔지.”
“…….”
“시간이 오래 반복된 만큼 천사연이 치를 수 있는 대가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번에 남은 걸 모두 써도 괜찮으니 팀원들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면 도와 달라고 따로 부탁을 해 오더구나. 그 덕분에 내가 여기 올 수 있던 거란다.”
목숨이 위험해진다면 도와 달라고…….
위험한 게이트를 찾아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천사연이 팀원들 몰래 들어 둔 대비책이 결국 우리들의 목숨을 살리게 됐다.
-한이결, 곧… 꿈에서…….
천사연이 내가 사라지기 직전에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마 꿈에 엘로힘이 찾아갈 거라고 알려 주려던 거겠지.
자신의 기록을 넘기고 얻어 낸 대가를 우리에게 쓰게 된 천사연의 처지를 생각하자 가슴 속에서 뻐근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현재로서는 세현아, 네가 내게서 정보를 받아 가는 게 모두를 살릴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다. 다만… 어떻게 해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지, 팀원들은 어디에 있는지 관련 정보를 얻어 가려면 내게 적절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얻어 가야 한다.”
“…엘은 그저 ‘대답’만 해 줄 수 있다는 거군요.”
“잘 이해했구나. 거기까지가 천사연이 지불한 대가의 한계다. 질문의 개수는 총 세 개이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엘로힘이 손을 들어 올리자 내 앞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이 공중에 떠올랐다. 잔에 담긴 커피가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이 흔들렸다.
“자, 그럼 시작하자. 첫 번째 질문을 하거라.”
기회는 총 세 번. 그 세 번 안에 팀원들을 살릴 방법과 게이트를 빠져나갈 방법을 모두 알아내야 한다. 차갑게 식은 손을 맞잡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첫 번째 질문이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답을 얻어 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흩어진 팀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질문을 들은 엘로힘이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흩어진 팀원들’이 나름 떠본 거였는데, 제대로 적중한 모양이다.
“가장 적절한 방법이 네 곁으로 찾아갈 것이다.”
첫 번째 기회가 끝났다. 공중에 떠오른 커피 잔은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지켰다.
“두 번째 질문을 하거라.”
손끝이 절로 움찔 떨렸다. 이제부터는 조심히 접근해야 했다.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도박을 걸어야 한다. 평범하고 간단한 질문으로는 엘로힘에게서 쓸 만한 해답을 얻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잘 생각해.’
팀원들은 현재 흩어져 있다. 아마 기절하기 직전에 내가 겪은 것처럼 어둠에 먹혀서 어딘가로 이동한 거겠지. 그렇다면… 팀원들은 현재 어떤 상태일까?
밀려오는 초조함을 힘겹게 억누르며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팀원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엘로힘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정답이었다.
“너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거라.”
이번에도 허공의 커피 잔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개입 능력 말고는 없었다. 엘로힘이 간섭하기 전까지 경험했던 비정상적인 꿈의 세계. 다른 팀원들도 각자의 꿈속에 갇혀 있을 거라고 상상하니 정말로 끔찍했다.
“이제 하나 남았구나.”
“…….”
“준비됐니, 세현아.”
“……네.”
“세 번째 질문은 무엇이지?”
어떻게든 침착을 잃지 않기 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엘로힘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곧 마주하게 될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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