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딱 봐도 함정이라는 게 티가 나네요.”
내 뒤에서 길을 본 권정한이 간략한 평가를 내렸다. 그 옆에 서 있는 민아린 또한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일부러…?”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몬스터가 아니었으면 길도 발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자기들도 공들여 만든 걸 어떻게든 보여 주고 싶겠지.”
팔짱을 끼고서 무심히 중얼거린 천사연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따지니까 사마엘이 무슨 유치원생 같잖아. 유치한 걸 따지면 수준이 비슷하긴 하다만.
“일단 가 봅시다. 우리 목적도 신도단을 찾는 거니까요.”
눈을 비비고 봐도 함정인 길을 가야 하다니, 심란하기 그지없었지만 우리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바로 출발하지.”
앞장서는 하태헌을 쫓아 숨겨진 길로 들어갔다. 길이 워낙 좁아서 한 명씩 줄지어서 가야 했다.
길 안쪽으로 들어서자 하늘을 가리는 수풀이 갈수록 많아져서 빛이 잘 들지 않아 주변이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습기도 가득 차 있어서 불쾌할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죽은 것처럼 보이는 회색빛 거대한 나무 아래, 얼기설기 꼬여 있는 뿌리로 가로막힌 입구가 나타났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군.”
사람 한 명 정도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입구 안에는 돌로 된 계단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여기서는 계단 끝이 보이지 않아서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신도단이 만들어 낸 곳인 것 같습니다.”
입구를 가로막은 나무뿌리 위로 사사삭 지나가는 지네를 본 민아린이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지나온 길도 위험해 보였는데 여긴 더 위험해 보이네요.”
나도 진심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태헌이 검으로 나무뿌리를 잘라 내서 입구를 정리했다.
“여긴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게 낫겠어.”
천사연이 선두로 나오며 릴리스의 검으로 손바닥을 깔끔하게 그어 냈다. 붉은 피가 거침없이 흘러나와 검날을 적셨다.
베인 천사연은 멀쩡한데 괜히 내 얼굴이 찌푸려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내 손바닥이 다 쓰라렸다.
“횃불 아이템이라도 구해 놓든가 해야지.”
“굳이 쓸데없이.”
“다치는 것보다 챙겨 둔 아이템 쓰는 게 훨씬 낫지, 그게 왜 쓸데없습니까?”
“잔소리는.”
이게 왜 잔소리야. 진짜 어이가 없다.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힌 나를 두고 천사연이 상체를 굽혀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검날에 묻은 피에서 타오르는 불로 근처를 한번 살펴본 천사연이 괜찮다는 뜻을 담아 손짓했다.
“하태헌 씨, 후방을 맡아 주세요. 민아린 씨와 권정한은 중간으로 오는 게 좋아 보입니다.”
안전을 고려하면 나는 천사연을 따라서 선두에 서는 편이 나았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장소이기에 제일 앞에 선 천사연이 그만큼 위험할 테니까. 무슨 일이 터지면 내 바람 능력으로 대비해야 했다.
천사연을 따라 지하 계단을 밟자 후텁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고 서늘하게 변했다.
그 감각이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축축한 지하의 공기와 온통 어두운 계단, 타오르는 검을 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천사연까지.
어딘가 본 것처럼 익숙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기울이자 천사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한이결.”
“어?”
“너랑 내가 처음으로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가 떠오르지 않나?”
천사연의 말에 그제야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깨달았다. 그렇구나. SS급 게이트이자 릴리스를 만나러 가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도 천사연이 검에 피를 묻힌 채로 앞장서서 걸어갔었지. 성질은 지금보다 훨씬 더러웠지만. 그래도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이 나쁘진 않아서 가볍게 대답했다.
“네가 처음이었을 때, 아니면 내가 처음이었을 때?”
“둘 다.”
말이라도 못하면. 픽 웃으며 팀원들이 잘 따라 들어왔는지 확인한 후에 천사연의 등을 밀었다.
천사연의 능력에 의지해서 어두운 계단을 끊임없이 내려갔다. 나는 예전에 천사연, 우서혁과 함께 갔었던 던전 형태의 게이트와 지금 이곳을 비교하며 생각했다.
‘정말 여기를 신도단이, 그것도 사마엘이 만들었다고?’
지금까지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들어 낸 공간들은 겹치는 부분 없이 모두 독특하고 까다로웠다. 하지만 닥터나 아벨 둘 다 실제로 있는 공간을 비틀어서 넓어 보이게 만들었을 뿐, 그 안에서 우리가 겪어 온 것들은 모두 허상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사마엘에 대한 정보 없이 왔다면 그냥 게이트 내부의 한 부분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이렇게 표현해도 맞나 모르겠지만, 솔직히 평범하다는 감상까지 들었다.
‘대체 뭐지?’
사마엘이 이곳을 만든 목적이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찝찝함에 미간을 찌푸린 그때였다. 한없이 이어지던 계단이 드디어 끝나고 갈림길이 나타났다.
“흠…….”
타오르는 검날을 횃불처럼 횡으로 휘두르며 정면을 둘러본 천사연이 눈가를 좁혔다.
“이건…….”
눈앞에 나타난 갈림길은 총 다섯 갈래였다. 계단이 이어진 곳을 제외하고 사방으로 길게 뻗어 나간 갈림길은 이곳과 마찬가지로 너무 어두워서 끝을 볼 수가 없었다.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온 민아린은 갈림길을 알아채곤 난감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죠? 하나하나 다 가 봐야 할까요?”
“그럼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팀을 나눴다가는 좀 위험하겠는데.”
“팀을 나눈다면 민아린 힐러와 권정한 경호는 마스터 팀에 들어가야 합니다. 빛이 없으면 앞이 보이지 않을 테니.”
“몇 명은 여기서 기다리고 한두 명만 갔다 오는 건 어떨까요?”
“그건…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애매할 것 같아요. 여긴 시계도 전자 기기도 통하지 않으니까…….”
“다 같이 갈림길을 하나하나 보는 건 오래 걸릴 것 같고.”
갑작스럽게 마주한 다섯 갈래의 갈림길을 두고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여러 말이 오갔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적당한 방법이 없었다.
가장 안전한 건 흩어지지 않고 움직이는 거겠지만, 이 경우에는 팀원들의 체력이 문제였다. 특히 정신계인 권정한과 힐러인 민아린은 평범한 일반인의 신체라서 이미 충분히 지쳤을 거다.
고온 다습한 열대 우림을 몇 시간 걸은 데다가 어둡고 축축한 지하에서 계단을 오랫동안 내려왔으니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런 장소에 오래 있다가는 정신도 피폐해질 거고.
‘그래도 이렇게 계속 고민만 하는 건 더 안 좋아.’
어차피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가장 무난한 답을 내놓았다.
“일단은 첫 번째 갈림길만 다 같이 들어가 보죠. 그 끝에 뭐가 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다른 갈림길을 처리하는 게 어떻습니까?”
“흠, 나는 동의. 한이결 능력자 말처럼 우선 움직이는 게 나아 보이는군.”
박건호에 이어서 다른 팀원들도 모두 내 의견에 동의를 해 왔다. 우리는 오래 끌지 않고 가장 왼쪽에 있는 갈림길로 걸음을 옮겼다.
갈림길 또한 계단처럼 폭이 굉장히 좁았기에 한 명씩 줄을 맞춰서 이동해야 했다. 천사연부터 시작해서 나와 박건호, 민아린, 권정한, 김우진, 우서혁, 하태헌 순서로 줄을 서 걸어갔다.
“…….”
그저 걷기만 하는데도 좁아서 그런지 갑갑함이 몰려왔다. 앞만 보고 하염없이 걸으려니 누가 목을 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뒤쪽에서 처음보다 훨씬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주는 압박감과 피로에 민아린이 점차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가 민아린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이 좁은 곳에서는 부축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
가쁜 숨소리에 맞춰서 초조함이 슬슬 몰려왔다. 그런 와중에도 앞은 여전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그저 길만 이어질 뿐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어 낸 여우마저 끙끙거리며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돌아가야 하나? 얼마나 걸은 거지? 압박감에 입술을 깨무는데, 뒤에서 우서혁이 나를 불렀다.
“한이결 씨.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고개를 돌리자 비스듬히 서서 뒤를 보고 있는 우서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러지, 생각이 든 동시에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챘다.
“하태헌 부마스터가… 사라졌습니다.”
“……!”
이질감의 정체는 바로 텅 비어 있는 우서혁의 뒤였다. 분명 하태헌이 있어야 할 그곳은 아무것도 없이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어떻게 이렇게 조용히 사라질 수가 있는 거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지금 바로 돌아가요! 혹시 하태헌 씨가 남긴 흔적이 있을 수도…….”
“…막혔습니다.”
“예?”
“벽이 생겼습니다.”
우서혁이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정말로 벽이 생겨 있었다. 양옆에 있는 벽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하태헌도 사라지고 돌아갈 길까지 막혔군.”
“이게… 가능한 겁니까? 아무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잖아요.”
“프라우스 신도단이 이제껏 만들어 낸 공간은 모두 상식 밖이었지.”
천사연이 혼란스러워하는 내 어깨를 힘줘서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 한이결. 네가 흔들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해.”
현실을 짚어 주는 날카로운 조언에 마른침을 삼키며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천사연의 말이 맞다. 침착하게 상황 판단을 내려야 했다.
“새로 생긴 벽을… 부숴 보죠. 갑자기 벽이 생겨서 하태헌 씨랑 갈라졌을 확률도 있으니까…….”
“이, 이결 씨.”
머리에서 퍼져 가는 통증에 차갑게 식은 손으로 미간을 꾹 누르며 계획을 세우는데, 민아린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비서님이… 안 보여요.”
헉, 숨을 들이켜며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정말로 방금까지 있었던 우서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하태헌과 똑같이 우서혁이 있던 자리에 벽이 생겼다.
“우서혁 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신 분 없으신 겁니까?”
“아, 아주 잠깐 다른 데를 봤는데 사라지셔서…….”
“대체 어떻게…….”
모두가 함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사라질 수가 있다고? 심지어 하태헌과 우서혁은 SS급과 S급인데?
“하, 한이결.”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김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김우진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어디선가 흘러온 검은 연기가 김우진의 다리 아래쪽에 휘감겨 있는 게 보였다.
“잠깐……!”
불길한 예감에 미처 손을 뻗기 직전, 김우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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