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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73화 (373/394)

373화

94. 미로

내게 향한 클로에의 녹색 눈동자에서 진심 어린 걱정을 느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움직여야 하는 우리에게 클로에의 도움은 정말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꼭 돌아오겠습니다.”

“저… 한이결 씨.”

그때였다. 나와 클로에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드워드가 작은 힘으로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양 뺨을 붉게 물들인 에드워드가 끼고 있는 반지의 보석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새하얀 붕대가 후두둑 쏟아졌다.

“제가 직접 만든 치료 아이템이에요.”

붕대를 무사히 품에 받아 낸 에드워드가 그걸 내게로 넘겨줬다. 확실히 붕대에서 아이템의 기운이 풍겼다.

“기존에 있는 치료 아이템을 참고해서 새로 만들었어요. 급하게 치료받아야 하거나 주변에 힐러가 없을 때 쓸 만하실 거예요.”

“등급이 엄청 높아 보입니다.”

“S급이에요. 이 아이템으로 상처 부위를 지혈하면 빠른 속도로 아물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우리를 생각해서 일부러 만들어 왔다고 했으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S급 치료 아이템이라니, 설마 이런 걸 받게 될 줄이야. 불안했던 마음이 에드워드 덕분에 한결 편안해졌다.

“천사연 마스터, 이거…….”

“앗, 이 아이템은 한이결 씨가 가지고 계셨으면 해요!”

우선 손목시계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천사연에게 맡겨 두려는데, 그걸 알아챈 에드워드가 급히 내 팔을 붙잡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예?”

“한이결 씨도 인벤토리 갖고 계시잖아요. 꼭 한이결 씨가 소지해 주세요!”

예전에 하태헌이 준, 목에 붙어 있는 인벤토리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에드워드가 재차 요구했다.

그가 선물해 준 거니까 원하는 대로 해 줄 수야 있긴 한데… 이유가 궁금했다.

“에디가 말한 대로 한이결이 소지하는 게 나을 것 같군.”

나는 이해 못 한 에드워드의 뜻을 천사연은 쉽사리 깨달았는지 그의 말에 동의했다. 천사연뿐만 아니라 민아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저도 같은 의견이에요. 게이트 속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이결 씨는 지금 프라우스 신도단이 노리고 있는 1순위 인물이기도 하고, 만에 하나 제가 곁에 없을 때 다치기라도 하면 너무 위험해요.”

민아린에 이어서 하태헌과 박건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힐러의 말이 맞다. 한이결, 네가 챙겨 둬.”

“다치는 빈도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한이결이긴 하지. 선물 준 사람도 저렇게 원하는데, 그냥 챙기지 그래?”

생각해 보면 지금껏 각자 흩어져서 싸웠던 상황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귀밑을 손으로 짚어 인벤토리 아이템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들고 있던 붕대가 연기로 변하며 모습을 감추었다. 무사히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에드워드에게 다시 감사 인사를 했다.

“치료 아이템 정말 고마워요, 에드워드 씨.”

인사를 받은 에드워드가 그제야 안도한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웬만하면 쓸 일이 없기를 바랄게요.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통해서 미국 레드 마켓을 빠져나온 우리는 아테나 길드에서 준비해 준 차를 타고 네바다주에 있는 게이트로 향했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꽤 길었다. 미국 땅이 워낙 넓기도 했고, 이동하는 인원수가 적지 않아 여러 대의 차가 함께 움직여야 해서 쉽지 않았다.

중간마다 기름을 채우거나 식사하는 시간을 빼고는 쉴 틈 없이 달린 끝에 겨우 네바다주에 있는 AF137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막 해가 떠오르고 있는 이른 아침의 AF137 게이트 앞 풍경은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음조차 없이 무척이나 고요했다. 어쩐지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라 그런가, 게이트 입구 근처에는 베이스캠프가 마련되어 있었다. 게이트를 소유하고 있는 길드가 세운 베이스캠프겠지.

AF137 게이트의 소유자는 레톤이라는 곳으로 그리 평가가 좋은 편은 아닌 길드였다. 대신 아테나와 사이가 나름 괜찮아서 별다른 문제 없이 게이트를 빌릴 수 있었다.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곽에, 길드 측에서 관리가 소홀한 게이트라.’

신도단이 몰래 침입하기 참 좋아 보였다. 실제로 사마엘이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다는 증언이 나왔으니까 게이트 내부에 무슨 짓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컸다.

게이트가 마지막으로 클리어된 시기는 오늘로부터 40일 전. 그 정도면 게이트 내부를 건드리기 충분한 시간이었겠지.

이곳까지 운전해 준 아테나 길드원이 게이트 관리자와 짧은 이야기를 한 뒤에 우리는 본격적으로 게이트 입구 앞에 설 수 있었다.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을 맞으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천사연의 뒤를 따랐다.

습기 가득한 공기가 피부로 닿아 왔다. 짧은 어둠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드러난 광경은 갑갑할 정도로 들어찬 나무들이었다.

“우와, 정글 같아요.”

무사히 게이트 입구를 통과한 팀원들도 주위를 둘러봤다. 민아린의 말처럼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게 뻗은 나무와 울창하게 자라난 식물을 보고 있자니 숨이 절로 턱턱 막혔다.

피이익! 피익!

여우가 게이트 안에는 낯선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투명화를 풀며 길게 울었다.

“일단… 공략대로 움직여 보죠.”

미국에 오기 전, AF137 게이트에 관련된 자료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찾아서 확인해 둔 상태였다. 서식하는 몬스터의 종류나 출구의 위치 같은 정보는 이미 숙지해 뒀다.

다만 문제는 열대 우림과 흡사한 게이트 내부였다. 클리어하기 까다로운 생태계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게 바로 열대 우림이었다.

고온 다습한 기후와 답답한 공기로 활동이 불편하고 식물이 너무 많아서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이런 게이트는 보통 식물형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어서 긴장을 잠시라도 늦출 수가 없었다.

“김우진, 민아린 씨와 권정한을 부탁해.”

“응, 걱정하지 마.”

분신을 만들어 낸 김우진이 민아린과 권정한의 옆을 지켰다.

혹시 모르니 릴리스의 검을 꺼내 든 천사연이 앞을 가로막은 수풀을 검날로 치워 내며 선두에서 길을 뚫었다. 저런 평범한 풀에도 독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이런 환경이면 나는 물론이고 마스터 능력도 쓰기 좀 애매해졌군.”

박건호가 바닥을 지나가는 뱀을 짓밟으며 한마디 했다. 발동 즉시 주변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천사연의 혈화와 쇠구슬을 폭발물로 변환시키는 박건호의 능력을 여기서 썼다간…….

“불난리가 나겠네요.”

심드렁히 대꾸하자 천사연이 짙은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돌아봤다. 박건호와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에 깃든 장난을 읽어 낸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 마세요.”

“내가 뭘?”

“내가 뭘?”

둘이 동시에 같은 대답을 했다. 뭘 하지 말라는 건지 뻔히 알면서 진짜 재수 없다. 둘이 똑같아서 두 배로 재수 없었다.

“쯧…….”

하태헌도 나와 같은 감상을 느끼고 있는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쿵, 쿠웅!

그때였다. 오른편에서 나무를 부수며 거대한 뱀 무리가 우리를 습격해 왔다. 방금 박건호가 밟아 죽인 뱀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이거 참, 싸울 수 없는 나를 대신해서 하태헌 부마스터가 나서 줘야겠군.”

6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뱀 무리의 습격에도 천사연은 눈 하나 깜짝 않은 채로 하태헌의 등을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하태헌이 단번에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 눈빛은 뭐지? 내 능력을 쓰면 이곳은 한이결의 말대로 불바다가 될 텐데… 그래서 이결이한테 미움이라도 받으면 하태헌 부마스터가 책임져 줄 건가?”

“큭… 크…….”

슬픈 척 눈꼬리를 축 내리며 중얼거리는 천사연 옆에서 박건호가 입을 손으로 가린 채로 웃음을 흘렸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쉰 하태헌은 입 아프게 씨름하는 대신에 검을 빼 들었다. 그의 등 뒤로 어느샌가 새까만 먼지가 모여들어 수십 개의 창 형태를 띄웠다.

몬스터는 기운을 보아 B급 정도라 하태헌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으니 끼어들지 않고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휙휙 잘려 나가는 몬스터를 지켜보는데, 박건호가 어딘가 신이 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게이트에 온 건 제법 오랜만 아닌가?”

“대체 아까부터 왜 이렇게 즐거워 보이는 겁니까?”

“다 같이 놀러 나온 것 같아서.”

“…….”

당연하다는 듯이 나온 대답에 나는 어느새 몬스터 시체가 산처럼 쌓인 정면을 돌아봤다.

놀러 나온 것 같다고? 어떤 미친 사람이 이런 곳으로 놀러 와.

“헛소리 좀 하지 마세요.”

피익…….

어깨에 앉아서 대화를 듣던 여우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서 박건호를 응시했다. 전혀 공감해 주지 않는 나와 여우의 반응에 박건호가 아쉽다는 것처럼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진심인데.”

생각해 보면 박건호는 예전에 게이트 이상 현상으로 한창 고생할 때도 클리어를 겁내기는커녕 오히려 즐겼었지. 그때는 정말 제정신 아닌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른스럽다가도 질투하는 거나 위험한 상황을 좋아하는 거 보면 애 같기도 하고…….’

천사연과는 어느 정도 마음을 트고 지내는 요즘, 가장 어렵고 종잡을 수 없는 상대는 단연 박건호였다.

“한이결.”

“네?”

내가 박건호와 시시한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몬스터를 모두 처리한 하태헌이 나를 불렀다. 뭔가 싶어서 곧장 다가가자 그가 몬스터 시체 조각을 발로 밀어 내며 앞을 가리켰다.

“클리어 공략 지도에는 나오지 않은 길이다.”

“……!”

하태헌의 설명을 듣고서 정면에 미묘하게 나 있는 길을 알아챘다.

열대 우림 형태의 게이트는 정해진 길이 아닌 이상 지나가기 어려울 만큼 식물이 빽빽하게 자라나 있다. 이 앞도 식물이 자라난 것은 맞지만, 길이 아닌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빈틈이 여기저기 보였다.

이건 분명히 ‘길’이었다. 그것도 숨겨진 길.

“설마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들어 낸 길입니까?”

“가 보면 알겠지.”

하태헌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 우리가 걸어온 길보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숨겨진 길을 바라봤다.

박건호 덕분에 겨우 잊고 있었던 불길한 예감이 다시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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