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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72화 (372/394)
  • 372화

    우리는 네바다주로 갈 다양한 방법을 생각했다. 가장 무난한 방법으로는 평범하게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과 이전에 미국을 갔을 때처럼 대형 이동 아이템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건 너무 위험했고, 아이템을 이용하는 건 정부의 눈치를 보는 건지 기업 측에서 거절을 해 왔다.

    결국 천사연은 준비 과정이 번거롭고 귀찮더라도 전세기를 빌리는 방법까지 고려했는데, 의외의 곳에서 좋은 의견이 들어왔다.

    “이 거지 같은 놈들을 또 만나야 한다니.”

    그건 바로 최초의 공간 제어 능력자이자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던 리웨이 제작자의 도움이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난감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은 루젤과 루크 남매가 리웨이 제작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손주처럼 아끼는 제자들의 부탁을 리웨이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리웨이가 날 보자마자 뱉어 낸 첫마디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친근하게 화답했다.

    “왜 또 그러세요, 어르신.”

    “왜 또 그러긴!”

    아쉽게도 마음이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는지 리웨이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서워 죽겠네.

    우리가 현재 와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한국 레드 마켓 내부였다. 리웨이가 수십 년에 걸쳐서 만들어 놓은 ‘공간 길’은 각 나라의 레드 마켓과 이어져 있었다.

    “내가 도와주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우리 귀여운 아이들의 부탁과 프라우스인지 뭔지 하는 놈들한테 당한 걸 갚아 주기 위해서야!”

    “예에.”

    어련하시겠어요. 웃는 낯으로 무성의하게 대꾸하자 리웨이가 갑갑하다는 기색으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현재 미국 레드 마켓에는 클로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웨이의 능력인 ‘공간 길’을 통해서 미국 레드 마켓에 도착하면 아테나 길드의 도움을 받아서 네바다주로 이동할 계획이다.

    “세현아.”

    우리를 한국 레드 마켓 안쪽까지 누구에도 들키지 않도록 이동시켜 준 엘로힘이 다가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구나.”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한 엘로힘이 눈가를 찌푸렸다.

    “미국으로 가면…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고 조심하거라.”

    엘로힘의 심각한 분위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나 또한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미국에 있는 건 확실한가 봅니다.”

    “그래.”

    엘로힘과 엘라하는 칼리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칼리의 힘이 닿아 있는 곳에 간섭하면 할수록 치러야 하는 대가도 커진다. 엘로힘이 미국이 아닌 한국 레드 마켓까지만 도와준 이유도 그래서였다.

    “네바다주는 어떻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네바다주 게이트가 위험한 건 선명하게 느껴진다.”

    역시 그런가. 이제부터 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에 부담스러워 마음이 무거워졌다.

    “엘로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엘로힘을 불렀다. 상대는 뜻밖에도 천사연이었다. 그가 엘로힘의 이름을 먼저 부르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잠깐 대화 좀 했으면 하는데.”

    “…흠. 좋다. 흥미로운 생각을 하고 있구나.”

    잠시 천사연을 바라보던 엘로힘이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둘은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아서 일반인보다 신체 능력이 좋은 나와 팀원들에게는 충분히 들릴 위치였는데,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태헌 씨.”

    나는 혹시나 해서 SS급인 하태헌의 팔을 잡아당기고 속삭였다.

    “천사연과 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들립니까?”

    “안 들리는군.”

    “엘이 뭔가 능력을 쓴 모양이네요.”

    천사연이 엘로힘한테 먼저 대화하자고 한 것도 신기한데, 대화 내용까지 저렇게 숨기다니. 궁금한 건 둘째치고 굉장히 신경 쓰였다. 이따가 천사연한테 무슨 대화한 거냐고 물어보면 알려 주려나?

    “이 정도 거리면 저쪽은 들릴 것 같은데.”

    “뭐 어때요. 들리든지 말든지.”

    피익.

    뻔뻔하게 대답하자 투명화를 한 채로 어깨에 앉아있던 여우가 울음소리를 작게 냈다.

    오히려 들리는 게 나았다. 내가 대화 내용을 알고 싶어 한다는 걸 천사연이 눈치채야 나중에라도 설명해 줄 테니까.

    그래도 오래 나눌 내용은 아니었는지 천사연은 금방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것을 확인한 리웨이가 입을 열었다.

    “이제 통로를 열어도 되겠냐?”

    “네. 부탁합니다.”

    작게 헛기침을 한 리웨이가 들고 있는 지팡이로 바닥 한 부근을 두 번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그 위로 둥그런 구멍이 생겨났다.

    엘로힘이 여는 통로나 게이트와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였다. 허공에 뚫린 구멍 내부는 블랙홀처럼 새까맣고, 별처럼 빛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라 멋있었다. 다만…….

    “이거… 크기가 이게 최대인 겁니까?”

    “그게 최대다. 어쩔래, 이놈아!”

    구멍 크기가 조금 애매했다.

    민아린이나 리웨이는 편하게 들어가겠지만, 나부터는 허리를 반드시 굽혀야겠고… 나보다 덩치 큰 팀원들은 거의 몸을 구겨 넣어야 할 것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리웨이가 투덜거리며 먼저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르며 엘로힘에게 인사했다.

    엘로힘이 인사를 듣고 부드럽게 웃어 줬지만, 눈동자에 담겨 있는 씁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공간 속으로 들어오자 새까만 어둠 속에 한줄기 길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주변은 온통 밤하늘과 비슷해서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뒤를 잘 따라오거라. 여기서 길을 잃었다간 일만 복잡해지니까.”

    하얗게 센 눈썹을 치켜세운 리웨이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이에 비해 정정한 그는 빠른 걸음걸이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자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길이 나타났다. 아마 나라마다 존재하는 레드 마켓과 이어진 길이겠지. 그중에서 세 번째 길로 들어선 리웨이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나온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손목시계가 멈추고 전자 기기 또한 작동을 멈춘 공간 속에서 우리는 리웨이의 뒤를 쫓아 하염없이 이동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10분 정도가 지난 것 같기도 하고, 10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했다. 슬슬 정신이 이상해지는 걸 느낄 때쯤에 다행히 출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공간에 낸 길을 처음 이용하면 그럴 수밖에 없어.”

    미국 레드 마켓으로 이어진 출구로 빠져나온 리웨이가 우리에게서 지친 기색을 읽어 냈는지 혀를 찼다.

    “더군다나 한국과 미국은 유난히 멀어서 길을 이용하는 초심자에게는 더 힘들었을 거다. 이런 긴급 상황이 아니었다면 평소에는 절대 이용하게 두지 않아.”

    “그래도… 이 방법밖에는 없었으니까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팀원들이 모두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나는 진심을 담아서 리웨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허리 숙여 인사하는 나를 복잡한 눈으로 보던 리웨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듣자 하니 프라우스 신도단 놈들이 있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다며?”

    “예.”

    “흉악한 놈들이니 몸조심하거라. 뭐, 나보단 너희가 더 잘 알겠지만.”

    리웨이의 눈동자에서 동정을 읽어 내고 쓰게 웃었다.

    “그럼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리웨이는 다시 볼 생각 없다며 투덜거리는 대신에 그저 조용히 나를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우리가 방금 나왔던 출구로 다시 들어갔다.

    검은 구멍은 리웨이가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사라졌다. 동시에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에요, 한이결 능력자.”

    “클로에 부마스터.”

    “어서 오세요, 한이결 씨!”

    부드럽게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클로에의 옆에는 에드워드도 함께 있었다.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에드워드를 언제나처럼 안아 주며 클로에에게 말했다.

    “도우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죠. 고작 이런 도움밖에 줄 수 없어서 오히려 미안하네요.”

    “충분합니다.”

    미국에서 안전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아테나의 힘이 필요했다.

    클로에가 먼저 레드 마켓으로 마중을 와 준 데다 네바다주까지 이동하는 것도 도와주겠다며 나서 줬으니, 우리로서는 참 고마웠다.

    “네바다주에 있는 AF137 게이트에는 제가 믿을 만한 길드원을 정찰 보내 봤는데, 현재로서는 눈에 띄는 문제는 없다고 하더군요. 게이트의 주인인 길드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고요.”

    “게이트에 프라우스 신도단이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길드 관계자가 정신 지배에 당했을 가능성도 있고요.”

    “이번 광화문 사건도 게이트 관리자들이 정신 지배에 걸렸다고 했었죠? 일이 또 복잡해지네요.”

    잠시 말을 멈춘 클로에가 우리를 한번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이결 능력자. 정말로 지원이 없어도 괜찮겠어요? 이렇게 소수 인원으로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심지어 프라우스 신도단의 손이 닿은 게이트잖아요.”

    “안에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대로가 제일 낫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숙여 클로에와 마찬가지로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에드워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중요한 상황에서는 제가 가진 다른 능력을 써야 해서요. 팀원들 외 사람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금방 이해한 클로에도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다들 뜻이 확고하다면 저도 고집부릴 생각 없어요. 다만 그래도 걱정은 되니까… 게이트 밖에서 의료팀과 지원팀을 대기시켜 놓고 기다릴게요.”

    “하지만 그건…….”

    “전혀 부담이 아니니까 받아 줘요.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복수하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고, 그만큼 돕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까.”

    “…….”

    “그러니까 부디 다들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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