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천사연이 몸을 바싹 붙여 오자 익숙한 향이 한가득 풍겨 왔다. 입 안을 간지럽히는 감각에 어쩔 수 없이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적당히 하라는 뜻을 담아 그의 가슴팍을 조금 힘줘서 밀자 웬일로 순순히 키스를 끝냈다. 아쉽다는 것처럼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뽀뽀를 해 온 천사연이 장난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다 보니 한이결 상태로만 키스했는데, 다음에는 권세현일 때도 해야겠군.”
“누구 마음대로… 하지 마.”
그새 또 놀리는 천사연의 모습에 질색하며 노려보자 그가 실실 웃으며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마구잡이로 하기 시작했다.
“왜? 한이결한테 스킨십하는 내 마음을 걱정해 줬으면서.”
“안 그래도 후회 중이야. 그만해라.”
끝도 없이 쪽쪽거리는 천사연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상체를 뒤로 뺐다. 고맙다가도 이럴 때마다 진짜 유치해서 못 봐 주겠다.
“한이결.”
“왜.”
“사실 묻고 싶었던 질문이 하나 더 있어.”
질문이 아직 남아 있다고? 의아해서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박건호가 옷을 빌려주면서 뭐라고 말을 한 게 있던가?”
“하긴… 했지.”
“뭐라고 했는데?”
갑자기 왜 궁금해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딱히 숨길만 한 건 아니었으니 순순히 대답했다.
“한이결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은 거냐고 하던데.”
“그렇다는 걸 안 다음에는?”
“신기해했지. 굳이 돌아갈 필요 없다고도 했어.”
“흐음.”
묘한 기색으로 잠시 눈동자를 굴린 천사연이 곧이어 마음에 안 든다며 혀를 찼다.
“그거였군.”
“어?”
“갑자기 이런 고민을 하게 된 원인 제공자가 아무래도 박건호인가 본데.”
“…….”
그런가? 확실히 박건호와 대화하고 나서부터 줄곧 가슴속이 불편했다. 옷까지 흔쾌히 빌려주는 행동도 좀 거북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박건호의 그런 태도를 원망스러워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다.
“박건호 팀장님은 날 배려해 준 거니까 뭐라고 하기에는…….”
“배려해 준 게 아니야.”
박건호에게 빌린 옷을 불만스럽게 내려다본 천사연이 이어 말했다.
“한이결. 넌 박건호를 아주 성격 좋고 어른스러운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그건 착각이야.”
“뭐?”
“박건호는 일부러 널 떠본 거다. 권세현으로 살던 과거에 미련이 있는지, 없는지.”
떠본 거라고? 그게? 이해하지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천사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못 믿겠으면 이따가 낮에 박건호가 방으로 찾아오면 한이결인 상태로 만나 봐. 그리고 말해. 권세현보다 지금이 더 편하다고.”
“…….”
“아마 만족스러워서 어쩔 줄 모를 거다.”
추가적인 설명을 들어 봐도 여전히 믿기가 어려웠다. 복잡한 심정으로 눈앞에 있는 천사연만 멀뚱히 쳐다보자 그가 모르면 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주제를 돌렸다.
“옷이 많이 크군.”
그 얘기에 나도 시선을 내려서 상의를 살펴봤다. 권세현은 한이결보다 전체적으로 몸집이 큰 터라 옷이 아까보다 훨씬 남아돌긴 했다.
“원래 몸일 때도 널널했으니까.”
근데 생각보다 심하긴 하네. 너무 커서 이러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게 생겼다.
권세현의 몸에 맞춘 옷이었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옷 주인이 박건호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손등을 덮는 소매를 흔들며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차가운 손길이 옷 속으로 불쑥 들어와 허리를 만졌다.
“……!”
“흠. 입었다는 것보단 걸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어.”
거침없이 허리를 쓸어 오는 천사연의 손에 펄쩍 뛰어오른 나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 변태 새끼가. 당장 손 안 떼?”
“바람 능력을 쓸 때마다 수십 번을 만진 허리인데 갑자기 왜 그러지?”
슬금슬금 가슴 쪽으로 올라오는 손에 몸서리를 치며 황급히 천사연의 멱살을 붙잡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손 떼라…….”
진지하게 경고하자 변태 놈이 그제야 손을 뗐다.
정말 천사연이나 하태헌이나 SS급들은 어째서 다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천사연을 밀어 내고 소파를 빠져나오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 자고 갈래.”
“꺼져.”
“재워 주려고 한 거 다 알아.”
“…….”
아, 진짜 재수 없다. 진심으로 짜증 나서 짙은 미소를 지은 천사연의 얼굴을 한 번 더 노려보고 욕실로 들어갔다.
***
박건호에게 빌린 옷은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빨아서 말린 후에 종이 가방에 잘 넣었다. 그 뒤 어제 못 끝낸 회의를 하기 위해 찾아온 박건호에게 돌려줬다.
방에 들어오면서 한이결로 돌아온 나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보던 박건호는 옷이 담긴 종이 가방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가져도 되는데. 이제 더 필요 없나?”
“네.”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여 말했다.
“권세현의 모습이 바깥에 더 새어 나가면 안 되기도 하고… 한이결로 지낸 지 꽤 돼서 그런가, 이쪽이 편합니다.”
잠자코 내 말을 듣던 그는 한이결이 더 편하다는 말에 검은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내 어깨에 제 팔을 턱 걸쳤다.
“하긴. 우리 한이결 능력자, 이 모습으로 지내 온 시간이 있는데 그렇게 냉큼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면 아쉽잖아.”
기분 좋은 기색으로 웃는 박건호를 보자 기가 막혔다. 천사연의 얘기가 사실이었을 줄이야.
“옷까지 빌려줘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거랑 이거랑 딱히 상관없는 것 같은데.”
“상관있죠.”
어깨를 내리누르는 박건호의 무거운 팔을 뿌리치며 눈가를 좁혔다.
“그리고 무슨 모습을 하고 있든 저는 저입니다. 팀장님은 이런 거 신경 안 쓰실 줄 알았어요.”
“음…….”
박건호가 또다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동의하는 거로 보이면서도 아닌 듯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지던 박건호가 이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뭐, 그렇지.”
“…….”
그렇다니? 어느 게 그렇다는 건데? 신경 안 쓴다는 거야, 쓴다는 거야?
이 찝찝한 대답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할 말을 잃은 나를 두고 박건호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거실에 있는 나를 피해서 괜히 용건도 없는 주방으로 가 버리는 박건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박건호가 어른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던 천사연의 조언이 떠올랐다.
‘우서혁만으로도 복잡해 죽겠는데 박건호까지…….’
그래도 우서혁은 최소한 대답을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박건호는 왜 저러는 건지.
박건호처럼 이런 식으로 피하기만 하면 나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답을 모르는 건 우서혁도 마찬가지지만…….
지금이라도 박건호를 붙잡고 뭐가 문제냐고 물어봐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이마를 짚으며 포기했다. 내가 붙잡고 물어본다고 순순히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쉽게 답할 문제였으면 애초에 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답답한 가슴 속을 느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글쎄. 그리 복잡하게 고민할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나를 미궁 속으로 밀어 넣었던 박건호의 행동에 대한 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아니, 의외가 아닌가?
“생각을 읽으셨습니까?”
“읽긴 했지만 딱히 읽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을 거란다.”
회의가 끝나고 박건호를 포함한 팀원 몇 명이 업무로 자리를 비운 늦은 오후였다. 웬일로 내 방을 찾아온 엘로힘은 내가 오전부터 해 온 고민의 답을 간단히 내놓았다.
“그냥 질투란다.”
“질… 네?”
“질투.”
상상도 못 한 단어에 멍청하게 되묻자 엘로힘이 친절하게 단어를 재차 짚어 줬다.
“질투라고요? 박건호 팀장님인데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질투’와 다른 느낌의 질투긴 하지. 세현아, 네 경우는 평범과는 거리가 머니까.”
그건 맞긴 한데.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마이 웨이인 박건호가 뭔가에 질투를 한다는 게 영 와닿지가 않았다.
“박건호, 그 아이는 너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이결의 모습만을 봐 왔으니까. 은연중에 더 정이 가는 건 아무래도 한이결의 모습인 모양이다. 본인도 제대로 자각은 못 한 것 같긴 하다만.”
“그런 이유라면 솔직하게 말해도 되지 않습니까?”
맞은편에 앉아서 나와 엘로힘의 대화를 들으며 서류를 들여다보던 천사연이 심드렁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본인도 유치한 걸 아니까 그런 거겠지.”
“천사연을 포함해서 다른 아이들은 네가 무슨 모습이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 걸 아니까. 자신은 그러질 못하니 질투도 하고 숨기기도 하는 거란다.”
잠시 눈동자를 굴린 엘로힘이 이어서 설명했다.
“권세현으로 살아온 과거의 삶 또한 질투하고 있기도 하고.”
“…….”
내 과거도 질투하고 있다고?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설마…….’
이런 감각은 최근에 우서혁을 상대로도 느껴 본 적 있었다. 우서혁이 손잡는 것을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고백했을 때였다.
‘아니야. 그럴 리가…….’
친한 친구나 가족 사이에서도 질투라는 감정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들었다.
박건호는 아주 오래전부터 레퀴엠에서 지낸 사람이고, 나만큼이나 팀원들을 아끼고 있으니 질투하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겠지.
고백을 연달아 받아서 나도 모르게 황급히 넘겨짚고 말았다. 특히 박건호처럼 행동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은 함부로 감정을 단정 지으면 안 된다. 찝찝한 마음을 뒤로 밀어 넣으며 김우진을 돌아봤다.
“넌 어때, 김우진. 권세현의 모습도 괜찮아?”
관심 없는 표정으로 내 곁에 앉아 있던 김우진이 내 질문을 듣고서 아주 당연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다 좋아.”
“다행이네.”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끝날 문제인데 박건호는 그럴 수가 없다는 말이지. 문제는 질투고. 어쩐지 해답을 훔쳐봐도 문제를 풀기가 어려웠다. 속으로 한숨을 삼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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