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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70화 (370/394)
  • 370화

    “퇴근한 줄 알았는데.”

    내가 앉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우서혁은 퇴근했지. 나는 남아서 기다린 거고.”

    “기다렸다고? 설마 내 방 찾아오려고 퇴근 안 하고 기다린 거야?”

    “그럼 안 되나?”

    안 될 건 아니지만. 한숨을 쉬며 천사연의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너 어제도 안 잤잖아.”

    가뜩이나 지금 밀려 들어오는 일도 많을 텐데, SS급이라도 멀쩡할 리가 없다. 확실히 이틀 연속 잠을 못 잔 천사연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짙게 묻어 있었다.

    본인도 피곤한 걸 잘 알면서 내 방을 일부러 시간 내서 찾아온 거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건가? 느릿하게 깜빡이는 천사연의 눈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은 아무래도 재워 줘야겠네.

    “그래서 기다린 이유가 뭔데?”

    최대한 대화를 빠르게 끝내고 재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묻자 천사연이 잠시간 나를 응시하더니 갑자기 두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왔다.

    “…뭐야.”

    품 안으로 꾸역꾸역 안겨 오는 천사연을 보고 당황했다. 그 심상치 않은 행동에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불쑥 솟구쳤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어?”

    한이결일 때보단 체격이 커졌다 해도 천사연을 넉넉하게 안아 줄 만큼은 아니었다. 체중을 버티지 못한 나는 소파 팔걸이에 등을 기대며 반쯤 누웠다.

    “말을 해야 알지.”

    천사연이 안겨 오는 것도 이제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바싹 붙어 오는 천사연의 어깨를 붙잡으며 묻자 그가 안긴 채로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천사연의 기다란 눈매가 살짝 접혔다.

    “말을 할 건 내가 아닌데.”

    “……?”

    “뭐가 문제인지 말을 해야 알지, 권세현.”

    천사연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손끝이 움찔 떨렸다. 어쩐지 귀 끝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괜히 눈가를 찌푸렸다.

    “이름을 왜 그거로 불러.”

    “권세현으로 불리길 원해서 그 모습으로 있는 거 아닌가?”

    내 몸 위에 제 몸을 아예 눕힌 천사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남자 옷이나 빌려 입고.”

    “박건호 팀장님 옷이야.”

    “그러니까 다른 남자.”

    또 헛소리하네.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자 천사연도 그저 장난친 거였는지 픽 실소를 흘렸다.

    “말해, 권세현. 뭐가 문제지?”

    “문제…까진 아니고.”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강한 확신이 깃든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내 눈가를 천사연이 손끝으로 툭 건드려 왔다.

    “박건호 팀장이 너한테 욕이라도 하던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쉽군. 그럼 바로 내쫓았을 텐데.”

    옷이 담긴 종이 가방을 받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작은 옷을 입고 불편해하니까 자기 옷을 가져다줄 정도로 배려해 준 것이다.

    그쯤부터 저조해진 기분은 하루가 지나가 새벽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그걸 굳이 더 티 내고 싶진 않아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너도 이 상태를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신선하긴 하지.”

    “한이결 모습은 조금… 그렇지 않나? 지금 와서 이런 얘기 하기에는 좀 늦긴 했지만.”

    천사연은 진짜 한이결과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겉모습이 ‘권세현’이면 더 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런 게 거슬렸으면 애초에 키스도 안 했을 거다.”

    “음…….”

    그것도 그렇네. 또다시 반박할 거리가 사라져서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슬쩍 돌렸다.

    대화를 계속 회피하는 내 얼굴을 잠시간 응시하던 천사연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 옆을 짚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나를 제 아래에 가둔 천사연이 말했다.

    “나랑 키스하려고 이 모습으로 있는 건 아닐 테고…….”

    “…….”

    “내 고민은 다 들었으면서. 반대 상황에서는 말 안 해 주는 건가?”

    나지막이 중얼거린 천사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주한 검은 눈동자에 서운한 감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천사연의 말이 맞다. 천사연이 힘들어할 때는 억지로 털어놓게 했으면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피하는 건 공평하지 않았다.

    “미안. 일부러 숨기려는 건 아니야.”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어.”

    “흠. 심문하러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그럴… 그럴 거야. 그냥, 아니… 잘 모르겠다.”

    “심문하러 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이라고 얘기할 만한 건 없었어.”

    평소와 다르지 않다는 대답에도 천사연은 설명해 달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정말이야. 김우진이 준비해 준 간식 좀 먹고 박건호 팀장님한테 옷 받은 게 끝이야.”

    “박건호가 먼저 빌려준다고 하던가?”

    “응. 한이결 옷은 좀 작아서… 빌려준다고 해서 받았어.”

    “원래라면 옷을 받는 대신에 한이결로 돌아갔을 텐데. 옷을 받는 것보다 그편이 더 쉬울 거고.”

    “그건 그렇지. 근데 이젠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까…….”

    “개입 능력만 쓰지 않으면 권세현의 기운이 소모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앞으로는 한이결이 아니라 권세현으로 계속 지내려고?”

    천사연의 물음에 누군가 목을 틀어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하게 뒤엉켰다.

    당연하지 않나. 나는 한이결이 아니라 권세현이니까.

    예전에 한이결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고, 한이결의 모습을 고집했던 건 권세현으로 변했을 때 그만큼 대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내 본 모습으로 지낼 수 있다.

    그러니까… 옷을 빌려준 박건호나 어색하긴 해도 나쁜 건 아니라는 하태헌의 배려에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가슴속이 계속해서 불편했다.

    그런 나 자신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어째서 불편한 것인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지 묻는 천사연에게 설명을 해 주기가 어려웠다.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잠자코 지켜보던 천사연이 말했다.

    “우리는 네가 어떤 모습을 해도 상관없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권세현.”

    “…알고 있어.”

    알고 있다. 무서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곁에 있겠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아니까. 고작 이런 상황에서 헤매는 내가 더욱 한심했다.

    “나도 그 감정들이 너무 소중해…….”

    살면서 이런 신뢰와 애정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었다.

    모두와 함께 지내면서 고마운 일도 많았고 배운 것도 많았다. 팀원들은 내게 있어서 가족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착각을 좀 한 거 같아.”

    쓴 미소가 절로 나왔다.

    팀원들이 한이결의 모습을 잊고 권세현만을 기억해 준다 해도 우리가 여태껏 지내 온 시간이 의미가 없게 되거나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불안했다.

    ‘불안…….’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난 불안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분명 한이결을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그어 놨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변한 거지? 어느 순간부터 한이결의 모습도 나라고 여겼다.

    엘로힘이 내가 한이결의 몸으로 들어오면서 한이결을 살렸다고 얘기한 것도… 그저 내 죄책감을 줄여 주기 위해 한 말일 뿐, 한이결의 의견과는 달랐다. 심지어 한이결은 몇 번이고 자살로 끝맺었으니 나 때문에 억지로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한이결이 이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기가 막혀 할지 상상하면 헛웃음이 나왔다.

    “권세현.”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서 천사연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준 그가 말했다.

    “우리 그동안 너무 바쁘지 않았나?”

    “뭐?”

    “네가 한이결이 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왔잖아.”

    “…….”

    “무언가에 쫓기듯이 달리기만 하면 결국 지쳐서 쓰러지기 마련이지.”

    언젠가 들어 본 말이었다. 그게 언제였던가.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달리기만 해 봤자 결국 끝은 지쳐서 쓰러지는 것뿐입니다.

    익숙한 음성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천사연의 과거 기록이 새겨진 책에서 박건호가 어린 천사연에게 해 준 조언이었다.

    “프라우스 신도단 문제와 우리 감정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거기에 정체성 고민까지 얹는 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그건…….”

    “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둬야 하는 문제도 있는 법이다. 네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의 문제라면 더욱이.”

    어쩔 수 없는 영역의 문제.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았는데, 천사연은 이미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그 누구도 불합리한 일을 겪지 않는다면… 물론 좋겠지. 하지만 그건 어렵다는 걸 우리 둘은 잘 알고 있잖아.”

    “…….”

    “당장 해결하지 못할 문제에 지나치게 몰입하다가는 그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을 거야.”

    낮고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나를 염려하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지내.”

    천사연의 말을 끝까지 듣고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내 의지에 따라서 심장을 차지하고 있던 권세현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희미해져 갔다.

    “으…….”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한 통증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가슴 속에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며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읏, 아…….”

    고개를 숙인 채로 고통에 어깨를 떠는 나를 천사연이 품에 안았다.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몸의 변화를 끝까지 견뎌 냈다.

    “하아…….”

    통증이 끝난 것을 알아채고 눈을 떴다. 천사연의 팔을 붙잡고 있는 손이 예전처럼 새하얗고 깨끗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연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어쩐지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넋을 놓고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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