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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69화 (369/394)
  • 369화

    93. 거울에 비친 모습

    심문하러 갔던 권정한과 천사연, 우서혁, 민아린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1시간가량이 지난 후였다.

    이번에는 심문에 큰 문제가 없었는지 권정한의 얼굴은 아침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거실로 들어온 천사연이 나를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그 옆에 민아린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엇, 이결 씨.”

    “왜 아직도 변한 상태인 거지?”

    예상했던 질문이라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상태로도 몸에 부담이 없어서 시험 삼아 유지해 봤습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 기운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했는데.”

    “개입 능력만 쓰지 않으면 기운도 움직이지 않아서요. 이 모습을 유지하는 데에는 기운이 줄지 않습니다.”

    “흐음…….”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줬는데도 천사연은 그리 공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내 속을 모두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서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뭐, 네가 그 모습이 좋다면 말리고 싶진 않다만.”

    “…….”

    이어지는 천사연의 말이 가시가 되어서 심장을 쿡 찔러 왔다.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로 흉터가 새겨진 손을 내려다봤다.

    박건호가 챙겨 준 옷은 그가 짐작했던 대로 조금 컸지만 한이결의 옷보다는 확실히 편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한이결의 옷을 입고 있었을 때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불편했다.

    이유가 뭘까. 한이결과 권세현을 두고 따진다면 당연히 권세현이 더 편해야 하지 않나. 나는… 권세현이니까.

    권세현으로서의 삶이 끝나고 한이결의 몸에 들어왔다 해도 나는 권세현이었다. 내가 한이결의 삶을 받아들인 건 어디까지나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 이쪽 세계로 건너온 순간에 한이결의 몸과 권세현의 몸을 고를 수 있었다면 난 고민하지 않고 내 본래 몸을 택했을 거다. 그러니까 아무 문제 없이 권세현의 몸이 된 이 순간을 기뻐하는 게 맞았다.

    ‘그게 맞을 텐데…….’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이 찝찝한 기분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박건호의 옷을 받아 갈아입고 난 뒤부터 1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고민해 봤지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다.’

    프라우스 신도단 일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어 죽겠는데. 혀를 차며 일단 중요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심문은 어떻게 됐습니까?”

    “알아내긴 했어요. 좀 꺼림칙한 부분이 많지만.”

    시원하지 않은 답에 미간을 찌푸리자 민아린이 권정한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프라우스 신도단의 움직임을 파악할 단서를 얻었어요. 그런데… 내용이 조금…….”

    심문하는 자리에 같이 있었던 천사연과 우서혁도 같은 의견인지 공감하는 기색을 보였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파 둔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군요.”

    민아린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 냈다. 함정이라. 신도단원을 끌고 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그 부분 또한 염두에 두긴 했다.

    “하지만 함정이라 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받은 미술관 초대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함정을 파 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제 발로 걸어서 함정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프라우스 신도단의 꼬리를 잡아서 밖으로 끌어낼 유일한 방법이다.

    “그놈들이 우리가 심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 내는 것까지 예상하고 있을까요?”

    권정한의 말에 나는 사마엘을 떠올렸다. 이질적인 새하얀 가면 뒤에 숨겨진 천제헌의 잔인하고 교묘한 성격까지 함께.

    “…내 능력을 파악하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해.”

    프라우스 신도단이 내 본 모습과 개입 능력을 모르고 있다면 이게 함정일 확률은 낮다. 그러나 이번 광화문 사건으로 두 가지 다 들켰으니… 함정이 아닐 거라는 희망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옳았다.

    나는 팀원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광화문 전투에서 한 번 졌습니다. 지금 우위에 있는 건 프라우스 신도단입니다.”

    사마엘은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신도단원을 미끼로 던져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뻔한 미끼라도 붙잡아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럼 우리도 그만큼 대비를 더 단단하게 해 놔야겠네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권정한이 입을 열었다.

    “심문 결과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면… 그 사람이 알려 준 장소는 미국 서부예요.”

    “미국 서부?”

    “정확히는 네바다주에 있는 게이트예요.”

    권정한의 말에 맞춰서 우서혁이 태블릿 PC를 건네줬다. 이미 심문하면서 자료를 찾아 놨는지 화면에는 네바다주 관련 내용이 띄워져 있었다.

    “미국 네바다주에 있는 95번 도로 중간에 위치한 AF137구역 게이트입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A급입니다.”

    자료에 첨부된 사진을 자세히 살펴봤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차가 지나다닐 만한 도로 하나가 깔렸고, 그 옆으로 게이트 입구를 뜻하는 위험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사막 지대라서 도로와 게이트 외에는 별다른 게 없습니다.”

    “그렇군요. 이 게이트에 프라우스 신도단이?”

    “음, 정확히는 사마엘이라는 자가 그곳에 며칠을 머물렀다고 해요.”

    권정한이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알아보니 사마엘은 본인이 뭘 하고 다니는지 신도단원에게도 말해 주지 않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사마엘이 거기에 갔다는 건 알아도, 거기서 뭘 했는지는 모르더라고요.”

    나는 천사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와 눈이 마주친 천사연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엘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무엇보다 칼리를 직접 대면하는 사람은 항상 사마엘 혼자뿐이었으니.”

    “사마엘만… 칼리를 만났다는 겁니까? 아자젤이나 아벨은요?”

    “칼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상은 만나지 못한 거로 안다. 그만큼 사마엘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만큼 더 조심해서 움직일 거고.”

    저게 사실이라면 사마엘이 왜 정식 신도단원에게도 자신의 행적을 섣불리 공개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됐다. 나는 제일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프라우스 신도단의 거처는?”

    “그것도 좀 이상해요.”

    심문하면서 들은 대답을 상기하는지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권정한이 말을 이었다.

    “원래는 중국 베이징이 거처였대요. 실제로 새로운 신도단원들이 들어오면 그곳에 머물기도 했고, 사마엘과 아자젤도 자주 들렀다고 하니까. 그런데 그곳도 이 주일 전에 정리했다고 해요.”

    “정리를… 했다고?”

    “네. 흔적 하나 남지 않도록 건물을 불태워서 싹 밀어 버렸다네요. 그 직후에 광화문 사건이 터진 거고요. 새 거처를 찾기 전에 신도단원이 모두 길드 관리 본부에 잡혀갔으니까… 결국 현재는 거처라 불릴 만한 곳이 없는 거죠.”

    우연이라기엔 타이밍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사마엘의 의도가 너무 적나라해서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네바다주에 있다는 게이트로 오라는 거네.”

    그거 하나 말고 모든 증거를 없애 버렸다. 의도가 명확했다.

    이래서 심문하고 온 네 명이 꺼림칙한 반응을 보였던 거군. 나였어도 그런 반응을 보였을 거다.

    ‘함정이라 해도…….’

    가야 했다. 팀원들에게 말했듯이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함정인 걸 뻔히 알면서도 가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참 씁쓸했다.

    “미국으로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루트부터 찾아봐야겠네요.”

    한탄처럼 내뱉은 말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위험 속으로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다 못해, 최대한 빨리 갈 루트까지 찾아봐야 한다니.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입 안이 썼다.

    ***

    방에서 이뤄진 회의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미국 이동 루트와 언제 생길지 모를 프라우스 신도단과의 충돌에 대한 대비책, 끌고 온 신도단원의 처분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오후에 하태헌이 돌아오고 회의가 끝날 때까지 나는 한이결로 돌아가지 않고 줄곧 권세현의 모습을 유지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가고 나서야 시끌벅적하던 방은 겨우 한적해졌다. 피곤한지 하품을 길게 하는 여우를 품에 안으며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어가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여우를 편히 잘 수 있도록 침대에 눕혀 주고 욕실로 들어섰다. 세면대에 양손을 짚고 서자 지친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

    시선을 들어 올려 거울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한이결의 얼굴이 나타났을 거울에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 피로한 기색의 남자가 비쳤다.

    그게 무척 낯설었다. 아니, 익숙한 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거울을 매만졌다.

    거울에 비친 권세현이 나를 정확히 응시해 왔다.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난…….’

    권세현이다. 하지만 권세현은 죽었다. 나는 권세현의 그 미련한 삶을 더 이어 갈 마음이 없었다.

    그럼 난 이제 한이결이 된 건가? 엘로힘은 몸 안에 한이결이 아직 남아 있다고 했다. 칼리가 천사연의 시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닳고 닳아 사라질 뻔한 한이결의 영혼은 내가 들어오면서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엘로힘은 나와 한이결이 서로를 살렸다고 말했지만, 글쎄. 한이결도 과연 살아남는 것을 바랐을까?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넘겨주면서까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 속이 너무나도 복잡해졌다.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거울 속의 권세현 얼굴을 끝내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뭐가 정답인지, 옳은 생각인지 알지 못하니 어떤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을 때였다. 쿵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급히 감정을 추스르며 욕실을 나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사연?”

    “역시 안 자고 있었군.”

    팀원들이 떠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그중 한 명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천사연일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이야?”

    놀란 내 모습을 찬찬히 훑은 천사연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들여보내 주면 설명해 주지.”

    그 뻔뻔한 대답에 혹시 몰라서 천사연의 뒤를 확인했다. 그는 웬일로 누굴 끌고 오지 않고 혼자였다.

    “들어와.”

    놀라긴 했지만 천사연이 괜히 찾아올 리 없었으니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켜 줬다. 나를 지나쳐 거실로 들어가는 천사연은 마치 본인 집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불 켜 줘?”

    자려던 참이라 스탠드 조명 외에 거실 불은 다 꺼 둔 상태였다. 천사연은 소파 옆 협탁에 놓인 스탠드 조명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 좋은데 굳이.”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거절했는데 굳이 불을 켤 필요는 없었기에 나도 천사연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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