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방금과는 달라진 분위기와 내게 집중된 이목에 조금 머쓱해졌다. 심지어 지금은 한이결이 아닌 내 본모습이라 더 어색했다.
“왜들 그러세요?”
목덜미를 쓸며 묻자 겨우 정신을 차린 민아린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이결 씨. 이런 상황에서 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민아린의 말에 박건호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음, 항상 전투 중이어서 지금처럼 여유롭게 구경할 상황이 안 됐었지.”
“구경할 게 뭐가 있다고 구경을 하세요.”
헛소리를 하는 박건호에게 심드렁히 대꾸하며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입고 있던 하얀 티셔츠의 소매 부분이 제법 짧아져서 손목이 훤히 드러났다. 어차피 개입 능력만 잠깐 쓰고 한이결로 돌아갈 거니까 큰 상관은 없었지만, 옷이 여기저기 껴서 불편하긴 했다.
‘늘어나는 옷 아이템 같은 건 없나?’
이러다가 나도 우서혁처럼 인벤토리 안에 권세현 전용 옷이라도 챙겨 다녀야 할 판이다. 짧은 소매를 불만스럽게 내려다보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박건호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의아한 마음으로 시선을 맞추자 그가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리며 손을 뻗었다.
턱, 왼쪽 가슴 위로 무언가 닿아 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숙이자 내 가슴 위에 아주 자연스럽게 올라와 있는 박건호의 손이 보였다.
“……!”
“오, 한이결 몸이랑 비교하면 제법.”
등줄기로 소름이 확 끼쳤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박건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미친…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아차.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손이 멋대로 움직였어.”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기막혀하는 나와 멱살이 잡힌 채로 웃고 있는 박건호 주변으로 강한 기운이 확 터져 나왔다.
콰직! 하태헌이 소파 팔걸이 한쪽을 처참하게 부숴 버렸다.
“잠깐만요, 하태헌 씨! 가구 부수지 마세요!”
“한이결, 비켜 봐. 내가 죽일게…….”
“죽이긴 뭘 죽여? 김우진 너도 가만히 있어!”
“죽이는 게 아니라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추행으로.”
피이익! 피이익! 픽!
“이건 불공평해요. 형, 저도 만지게 해 주세요.”
“추행 사건을 일으킨 길드원에게 내릴 수 있는 징계는 뭐가 있지, 우서혁 비서?”
“해고는 어떻습니까?”
방 분위기가 순식간에 개판이 됐다. 민아린에게 얌전히 안겨 있던 여우까지 온 힘을 다해 울부짖을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건호는 웃는 얼굴로 사과를 해 왔다.
“Sorry. 한이결 너도 내 가슴 만질래?”
“필요 없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박건호의 멱살을 놔주었다. 방금 건 정말로 실수였다는 것처럼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뒤로 물러서는 박건호를 김우진이 매섭게 노려봤다.
“장난 그만 치고 본론으로 돌아가죠. 지금부터 개입 능력을 써 볼 건데, 신도단원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확인해 볼 수 없습니까?”
“CCTV가 설치되어 있으니 저번처럼 TV에 연결하면 가능합니다. 지금 바로 하실 거라면 노트북을 가져오겠습니다.”
우서혁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수행원을 시켜서 노트북을 빠르게 받아 왔다. CCTV와 연결된 서버에 접속한 노트북을 TV에 연결하자 신도단원이 묶여 있는 훈련실 내부가 화면에 나타났다.
신도단원은 의자에 묶인 채로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심문에 연달아 자살 시도를 했던 터라 꽤 지친 상태인 듯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곧바로 눈을 감고 능력을 쓰기 위해 기운을 끌어 올렸다.
권세현으로 변한 순간부터 심장을 차지한 것은 모조리 권세현의 기운이었다. 한이결의 기운은 힘이 강한 권세현의 기운에 맥을 추리지 못하고 구석으로 밀려났다.
개입 능력을 사용하자 레퀴엠 길드 건물에 있는 모든 능력자의 기운과 아이템의 기운이 가지각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지하 훈련실에 갇혀 있는 신도단원의 기운을 찾았다.
짐작했던 대로 신도단원의 머리 위로 낯선 기운의 실이 이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타인의 능력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 아이템으로 이어진 기운의 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칼리의 피인가.’
이번에도 역시나 기운의 실에 붉은색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저게 심문을 방해하던 주요 원인인 것 같았다.
기운의 실을 끊어 내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아니, 더 제대로 표현하자면 ‘끊어 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기운의 실이 툭 끊어졌다. 엘로힘이 말한 대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칼리의 피가 섞인 기운의 실을 끊어 버릴 정도로 내 힘이 강해진 탓이었다.
힘의 크기를 실감하자 기쁜 마음보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슴 속이 무거워지는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눈을 뜨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끝났습니다.”
“금방 끝났군.”
“네. 타인의 능력이 아닌 아이템 효과였습니다. 연결은 끊어 냈고요.”
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TV 화면을 재차 확인했다. 아이템이 끊어진 것을 당사자는 느끼지 못했는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 다시 심문하러 가 볼게요. 고마워요, 형.”
“부탁한다.”
내 얘기를 들은 권정한과 천사연, 우서혁은 중단됐던 심문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을 대비해서 민아린도 세 명의 뒤를 따랐다.
“나도 우선은 로헌에 갔다가 오후에 다시 오겠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하태헌이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심문하는 동안 여기 있을 필요는 없으니 로헌으로 가서 일을 조금이라도 처리하고 오려는 모양이다.
“바빠서 못 오게 되면 연락해 주세요. 심문 결과 알려 드리겠습니다.”
현관문으로 향하는 하태헌의 뒤를 쫓아가며 말하자 구두를 신은 하태헌이 나를 돌아봤다.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서 내 얼굴을 바라보는 하태헌의 모습에 조금 의아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그 얼굴로 배웅하는 건 처음이라서.”
“아.”
맞다. 지금은 한이결이 아니라 권세현이었지?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머쓱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좀… 어색하시죠? 저도 이 방에서 변한 건 처음이라 자꾸 깜빡 잊네요.”
“어색하긴 하지만 나쁘진 않다.”
손을 뻗은 하태헌이 조심스럽게 뺨을 쓸어 왔다. 내가 손길을 피하지 않는 것을 본 하태헌은 이어서 오른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이결보다 내가 키가 커서 그런지 하태헌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나를 찬찬히 살핀 그가 이내 상체를 숙였다.
“읏…….”
소리 없이 부딪혀 오는 입술에 간질간질한 감촉이 퍼져 나갔다. 키스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하태헌이 허리도 함께 놔주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하태헌의 시선에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오후에는 올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하태헌이 자리를 떠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가파르게 뛰는 심장을 조금 진정시킨 후에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우가 하태헌이 떠난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날아왔다.
피익!
칭얼거리는 여우를 안아 주며 방을 둘러봤다. 팀원 대부분이 일하러 떠나가 이제는 김우진과 박건호만이 남은 방 안은 아까와 달리 무척이나 한적했다.
“한이결.”
“응?”
심문이 끝날 때까지 뭘 할지 고민하는 내게 김우진이 우물쭈물하는 기색으로 다가왔다.
“그 몸으로도 단 거 좋아하는 거지?”
“어?”
“간식 먹을래?”
나를 보는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가 어쩐지 기대감을 품고 반짝반짝 빛났다. 뭐지, 이 반응은?
“입맛은 그대로긴 한데…….”
“네가 좋아하는 쿠키 있어.”
“준비해 주면 먹긴 하겠지만…….”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물론 낯설다고 거리를 두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하다.
“한이결.”
그런 나와 김우진을 턱을 괸 채로 구경하던 박건호도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이결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부담은 없는 거고?”
“음, 아마도요.”
닥터가 만들어 낸 공간에서 처음 권세현으로 변하고 개입 능력을 썼을 때는 이 정도로 편하지 않았다. 능력을 쓰는 것도 힘들었고, 권세현의 모습으로 오래 버티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한이결일 때와 차이가 없었다. 이것도 내 힘이 강해져서 그런 건가? 개입 능력을 많이 사용하면 모를까, 지금 이대로는 한이결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기운을 쓰는 게 아니라면 별다른 타격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엘로힘이 경고하기도 했으니 개입 능력은 정말 필요할 때만 써야 한다. 하지만 권세현의 모습 자체는 기운을 쓰지 않아도 유지할 수 있었다.
“신기하군.”
입가를 매만지며 나를 바라보던 박건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이제 한이결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나?”
“예?”
“개입 능력과 함께 사용하지만 않으면 그 모습으로도 바람 능력을 쓸 수 있다고 했으니까. 굳이 돌아갈 필요 없어 보이는데.”
“…….”
한이결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였다. 권세현의 모습이 아무리 편하다 해도 내가 돌아갈 몸은 당연히 한이결이라고 여겼으니까.
당혹스러운 마음을 좀처럼 숨길 수가 없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을 꺼냈다.
“그, 이대로는 옷이 조금… 작아서요.”
“옷?”
“네. 제가 한이결보다 체격이 커서 그런지 옷이 작습니다.”
어쩐지 변명처럼 들렸다. 짧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을 괜히 매만지자 박건호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다려 봐.”
그대로 방을 나간 박건호는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금방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처음 보는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자.”
“뭡니까?”
당당하게 내미는 종이 가방을 무심코 받아 들자 박건호가 씩 웃었다.
“내 옷.”
“팀장님 옷이요?”
“일이 바쁘면 길드에서 자거나 게이트 갔다가 바로 복귀하고는 하니까. 그런 때를 대비해서 부서에 놔둔 옷이다. 깨끗한 상태니까 이상한 의심하지 말고.”
“…….”
“내 옷이 크긴 하겠지만, 지금처럼 작은 것보다는 큰 게 편하겠지.”
이어지는 설명에 차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나는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종이 가방에 들어 있는 옷을 꺼내 봤다. 기묘한 기분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서 계속해서 가슴 속을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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