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여우는 다음날 늦은 새벽에 무사히 돌아왔다.
피이익! 피익!
“고생했어.”
돌아오자마자 내 품에 안겨서 신나게 재잘거리는 여우의 등을 쓰다듬어 줬다.
하기 싫은 티 팍팍 내던 여우는 막상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하자 턱을 치켜들며 뿌듯한 기색을 보였다. 귀엽기는.
나를 대신해서 최미진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은 천사연도 여우가 도착한 시간에 맞춰서 방을 찾아왔다. 그 뒤에는 우서혁도 함께 있었다.
“다른 문제 없이 잘 빼내 왔다고 하는군. 빼낸 신도단은 지금 최미진의 차를 타고 이쪽으로 이송 중이다.”
“다행이네요.”
여럿이 늦은 시간까지 힘썼는데 실패했으면 많이 아쉬웠을 거다. 이 늦은 새벽에 신도단을 데리고 여길 오고 있을 최미진도, 퇴근도 못 하고 기다린 천사연과 우서혁도 여우처럼 고생이 많았다.
“도착하는 대로 가둬 놨다가 아침에 권정한이 오면 심문을 시작할 예정이고. 심문이 끝나면 결과를 알려 줄 테니까 방에서 나오지 말도록.”
“굳이 길드 건물 안에서도 그래야 합니까? 심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사마엘이 직접 데리고 있던 신도단원을 마주하고 심문해야 할 권정한이 염려스러워서 물어봤지만 천사연의 반응은 단호했다.
“안 돼. 네가 없어도 권정한이 알아서 잘할 테니까 방에서 나오지 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에 서 있는 우서혁을 힐끔 바라봤지만, 그도 천사연과 같은 의견인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런가.
천사연과 우서혁을 포함한 팀원들이 이토록 챙기는 이유는 나도 안다.
사마엘이 강한 정신 지배 능력을 갖고 있으니 레퀴엠 길드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위험인물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평범한 길드원을 이용해서 내게 접근할 수 있었으니까.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중요한 상황에서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만 아무것도 못 하고 방에만 갇혀 있으려니 자꾸만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속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천사연이 입을 막 뗀 그 순간이었다. 우서혁이 먼저 내게 말했다.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한이결 씨는 그간 지나치게 바쁘게 움직이셨으니 조금은 쉬시는 편이 낫습니다.”
담담하게 전해 오는 위로에 쓴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초조한 티가 났나 보다.
“그런가요.”
우서혁 말이 맞다. 지금까지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내가 끼어들었지만, 이제는 그러기 쉽지 않았다. 나를 노리고 있는 프라우스 신도단의 존재도 문제였고, ‘권세현’의 모습이 알려진 것도 문제였으니까.
“…….”
그때였다. 눈가를 좁힌 채로 나와 우서혁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던 천사연이 내 팔을 붙잡으며 몸을 바싹 붙여 왔다.
“나 머리 아파.”
“예?”
갑자기 또 뭐야. 반사적으로 되묻자 천사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칭얼거렸다.
“이 시간까지 일하면서 연락 오는 거 기다리고. 쉬지도 못하고.”
“…근데요?”
“권정한 출근하면 다시 일하러 가야 할 텐데 4시간도 안 남았잖아.”
슬슬 불안감이 몰려왔다. 천사연이 이렇게 불쌍한 척을 할 때마다 좋았던 적이 없었는데. 떨떠름한 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천사연은 연신 치근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퇴근해 봤자 3시간도 못 쉬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자고 갈래.”
이 자식이 또 헛소리하네.
“대표실에서 주무시든가요.”
“재워 줘.”
“대표실에도 욕실이랑 소파 다 있잖아요.”
“새벽 늦게까지 일한 사람보고 지금 소파에서 불편하게 자라고 하는 건가? 이렇게 냉정할 수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어.”
천사연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본격적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천사연의 고집에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이런…….’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천사연을 바라보고 있는 우서혁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전에도 천사연의 감정을 우서혁에게 들키는 건 아닌지 우려하긴 했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더 눈치가 보였다.
우서혁의 검은 눈동자가 마치 나를 원망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급히 천사연을 밀어 냈지만 이 망할 SS급은 역시나 꿈쩍도 안 했다.
“아무튼 제 방은 절대 안 되니까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이거 놓으세요.”
“왜? 저번에는 나랑 하태헌 재워 줬잖아.”
“……!”
지금 그걸 왜 말해! 경악한 날 보며 실실 웃은 천사연이 덧붙였다.
“한 침대에서.”
“그건……!”
놀라서 입을 열긴 했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우서혁을 힐끔 살펴봤다. 난 잘못한 거 하나 없으니까 눈치 볼 필요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혹여 우서혁이 상처라도 받을까 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우서혁과 나는 엊그제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의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넘어간 상태였다.
안 그래도 프라우스 신도단 일을 처리하느라 우서혁과는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데면데면 지내고 있던 차에 천사연 이 자식이 아주 기름을 쏟아서 불을 붙인 셈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우서혁이 없으면 모를까, 지금 이대로는 천사연을 침실에 들일 수 없었다. 한숨을 겨우 삼켜 내고서 진지하게 천사연을 쫓아내려던 그때였다.
우서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자고 가겠습니다.”
“예?”
“마스터의 최측근으로서 저만 퇴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우서혁 씨까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이없어하는 나를 두고 천사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뻔뻔한 태도 좀 봐. 정말 못 말리겠군.”
누가 할 소리를.
심지어 두 사람 다 하루 정도는 안 자도 별 타격 없으면서. 두통이 도져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재워 줄 생각 없으니까 두 분 다 나가시죠.”
***
이른 아침, 권정한과 천사연, 우서혁을 제외한 팀원들이 모두 내 방으로 모였다.
최미진의 도움으로 새벽에 무사히 레퀴엠 길드로 이송된 프라우스 신도단원의 심문이 끝나는 대로 얻어 낸 정보를 바탕으로 회의하기 위해서였다.
권정한은 천사연과 우서혁을 대동한 상태로 신도단원을 심문하고, 그에게서 현재 신도단이 활동하고 있는 장소와 목적을 알아낼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순탄히 흘러가지 못하고 초반부터 막혀 버렸다.
“죄송해요, 형.”
권정한이 눈을 내리깔며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네가 왜 사과를 해.”
신도단원을 끌고 온 거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천사연이 짐작한 대로 정신 지배에 당한 게 아니라 본인 의지로 신도단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맞았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권정한이 아무리 감정을 주물러도 그는 프라우스 신도단과 관련된 정보가 입 밖으로 나오려 할 때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혀를 강하게 깨물거나 숨을 억지로 쉬지 않는다거나, 방법은 다양했다. 권정한이 심문을 하는 두 시간 사이에 신도단원의 자살 시도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눈치 빠르게 자살을 막아 낸 권정한이 아니었다면 힘들게 데려온 신도단원이 허무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네 잘못이 아니야. 사과하지 마.”
혀를 깨무는 정도는 사마엘과 칼리에 대한 높은 충성심이라고 생각하고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숨을 쉬지 않는 건 충성심 하나만으로 불가능했다. 코나 입을 틀어막지 않는 상태로 질식사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신체가 가진 본능까지도 제어할 정도로 강한 정신계 능력이 신도단원에게 걸려 있는 것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사연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뜻을 담아 답했다.
“사마엘의 정신 지배 능력은 저런 식으로 쓸 수 없다.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한이결.”
사마엘이 가진 정신 지배 능력에 당한 이들을 나 또한 여러 번 마주했다.
마치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사마엘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움직이던 사람들. 하지만 이번에 데려온 신도단원은 그런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사마엘이 아닌 또 다른 정신계 능력자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이번에도 칼리의 피가 들어간 아이템 효과?’
후자라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전자라면… 일이 복잡해진다. 우린 이제부터 프라우스 신도단과 전면으로 부딪쳐야 하는데 사마엘 외에 숨겨진 정신계 능력자가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어떡하죠, 기껏 데려온 인질이 소용없어졌네요.”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민아린의 말에 대답했다.
피익, 암울한 분위기에 그녀에게 안겨 있던 여우도 기운 빠진 울음소리를 흘렸다.
“…아뇨.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나를 바라보는 팀원들을 살피다가 시선을 내렸다. 들어 올린 손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꾹 쥐는 내 행동에 무언가를 알아챈 하태헌이 눈가를 좁혔다.
“한이결, 설마…….”
“네. 개입 능력으로 직접 확인해 보면 됩니다.”
다른 능력자가 정신계 능력을 쓴 건지, 아니면 아이템인 건지. 개입 능력을 사용하면 기운의 실을 끊어 내는 동시에 능력의 정체도 알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안 돼, 한이결. 그… 엘로힘이라는 사람이 쓰지 말라고 했잖아.”
급히 나를 막아서는 김우진의 뒤로 보이는 다른 팀원들도 그리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예 쓰지 말라고 하진 않았잖아. 내가 가진 개입 능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
김우진에게서 눈길을 돌려 팀원들을 설득했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팔짱을 끼고서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참을 고민하던 천사연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가?”
“네. 광화문에서 썼을 때 근방에 있는 모든 아이템의 기운을 끊어 냈으니까요. 같은 건물에 있는 사람은 충분히 될 겁니다.”
“어쩔 수 없군.”
쓴 미소를 지은 천사연이 내 의견에 동의했다.
“부탁해, 한이결.”
부탁이라니. 나 역시도 바라던 상황이었다.
눈을 감고 깊은 곳에 숨죽이고 있는 권세현의 기운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한이결의 기운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싹하고 차가운 기운이 빠른 속도로 차올라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흐, 으…….”
온몸 구석구석 퍼져 나가는 권세현의 기운을 막을 수가 없다. 손끝이 절로 떨리며 상체가 훅 수그러졌다. 꾹 감았던 눈을 뜨자 뼈가 도드라지고 흉터로 뒤덮인 본래 내 손이 보였다.
“하아…….”
예전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권세현이 된 내가 비틀거리자 옆에 서 있던 김우진이 재빨리 부축해 왔다.
시야를 살짝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자 묘한 눈을 하고서 나를 응시하는 팀원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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