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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66화 (366/394)

366화

“최미진 센터장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앨리스가 호주로 떠나간 다음 날, 천사연이 내 방을 찾아와 계획 진행 경과를 알려 줬다.

“다행이네요.”

“자신도 양심이 있으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던데.”

양심이라. 사실 최미진이 우리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길드 관리 본부 소속이었고,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그럼에도 우리 제안을 받아들여 줬으니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 했다.

“물론 양심에 찔린다 해도 쉽사리 내릴 결정이 아니었으니 고민을 좀 하는 것 같았지만, 요즘 끼고 다니는 파트너가 도와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을 했다는군.”

“파트너요?”

“너도 잘 아는 사람이지.”

천사연의 말에 우서혁이 답을 이었다.

“이수진이라는 B급 염동 능력자입니다.”

“아.”

이름을 들은 나는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고양이 같은 인상의 여자가 떠올랐다.

‘이수진이라면 우리 계획을 도울 만해.’

이수진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본인마저도 여러 수난을 겪은 원인이 프라우스 신도단이었으니까.

천사연이 서류를 내게 넘겼다. 그곳에는 이번에 붙잡힌 프라우스 신도단원들의 신상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17번 남자를 데려올 예정이다.”

“A급이네요.”

권정한이 S급이니까 능력이 통하긴 하겠지만… 사마엘 곁에서 자발적으로 신도단 활동을 한 놈이었다.

권정한의 등급이 한 단계 높다 해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하게 움직여 줄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B급을 데려오면 좋겠지만 제일 낮은 등급이 A급이었다.

“다만 빼 오는 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하는군.”

“어쩔 수 없죠. 관리 본부에 갇힌 신도단을 빼 오는 거라 보는 눈이 많을 테니까.”

“그래도 시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도록 시도 정도는 해 봐야겠지.”

“생각해 둔 거라도 있습니까?”

“그 하얀 먼지.”

하얀… 먼지?

천사연이 이상한 소리를 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내 무릎 위에 배를 까고 누워 있는 여우를 가리켰다.

“무슨, 설마 여우요?”

피익?

내 말을 들은 여우가 누워 있는 상태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 녀석도 슬슬 밥벌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뭐라는 겁니까? 이 어린애한테 갑자기 웬 밥벌이를 바라요?”

“어린애라니. 내가 듣기로 한이결 너보다 나이가 많다던데.”

“…몬스터잖아요. 사람 나이로 생각하면 안 되죠.”

피익!

여우를 품에 안으며 천사연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상황도 모르고 내게 안긴 여우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풍성한 꼬리를 마구 살랑거렸다.

“극성맞은 학부모 같은 말 그만하고 여우한테 얘기해. 관리 본부에 가서 신도단원 빼 오는 거 도우라고. 투명화에 사물 통과까지 가능하니 큰 도움이 되겠지.”

“그건…….”

그렇지만. 나는 품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여우를 살짝 떼어 내며 양 앞발을 붙잡았다. 내 허벅지에 뒷발을 딛고 선 여우가 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 조그마한 애를 거기로 보내야 한다니. 아무래도 불안한데.

“…저도 가면 안 되겠죠?”

“될 것 같나?”

천사연이 턱을 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음, 역시 어림도 없네.

하태헌을 만나러 나간 그날 밤, 정체불명 단체에게 공격을 받은 나는 우서혁과 함께 앨리스를 만나러 길드 건물 내 응접실을 들렀던 걸 제외하면 방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팀원들이 수시로 내 방을 들락거리는 데다 항상 내게 달라붙어 있는 여우마저도 내 외출을 격렬히 반대했다. 잘못을 저질러서 눈치 보는 처지인 나로서는 팀원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더 나갔다가는 족쇄를 다시 채울 거라고 하기도 했고.’

에드워드가 직접 만들었다는 족쇄 형태의 셔터 아이템. 예전에 이미 착용해 본 경험이 있는 난 족쇄를 들고 싸늘하게 웃는 팀원들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끼고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갑갑한 상황에 한숨을 내쉰 나는 여우에게 말했다.

“여우.”

픽?

“우리 좀 도와줄래?”

***

계획을 들은 여우는 곧장 투명화를 쓰고 밖으로 날아갔다. 그대로 관리 본부로 날아가서 몰래 최미진과 만날 것이다.

그다음 일은 최미진이 알려 줄 것이다. 프라우스 신도단원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자세한 내용은 최미진이 알고 있을 테니까.

어떨 때는 나보다도 더 똑똑하게 행동하는 여우이니 계획대로 잘하고 돌아올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우가 나를 쫓아 신전에서 나온 이후로 따로 행동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더 그랬다.

“그렇게 신경 쓰여?”

서류를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내 모습에 김우진이 옆에 앉으며 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목덜미를 만지며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조금.”

“잘하고 올 거야.”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우에게 딱히 관심 없는 김우진이 서투른 위로를 해 왔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어색하게나마 웃어 줬다.

“이건 뭐야?”

“오늘 아침에 로헌에서 보내 준 서류인데… 프라우스 신도단 간부라고 알려진 이들에 대한 추가 정보래. 김우진, 네 친구가 정리해서 보내 준 거야.”

일부러 하이드가 보내 준 거라고 말해 줘도 김우진은 그저 심드렁했다. 김우진이 이럴 때마다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관련된 일에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 반응이라서.

그래도 서류 내용에는 눈길이 가는지 김우진의 시선도 테이블에 펼쳐져 있는 서류 위로 향했다. 조용히 서류를 훑어보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확 굳었다.

“……?”

왜 그러나 싶어서 김우진과 같은 내용을 살핀 나는 아자젤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고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괜찮아 보여서 굳이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광화문 사건에서 아자젤 때문에 김우진이 죄책감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이번 기회에 김우진이 쓸데없는 죄책감으로 고생하지 않도록 얘기를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김우진.”

옆에 앉아 있는 김우진의 손 위에 내 손을 조심스럽게 올리자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바로 알아챈 김우진이 눈가를 처참하게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내가… 내가 더 제대로 행동했으면…….”

“아니. 그 일이 없었더라도 신도단은 나를 노렸을 거야. 그놈들이 직접 말했잖아. 이전 시간대에는 보이지 않았던 내가 제일 의심스러웠다고.”

이건 단순히 김우진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아자젤이 김우진을 납치해서 고문하는 과정이 없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다.

사마엘은 사람 감정을 이용하는 데에 도가 튼 녀석이었다. 천사연이 나를 아낀다는 것도 눈치챘었으니 그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제 앞으로 불러냈겠지. 생각할수록 사마엘이나 아자젤이나 짜증 나긴 매한가지였다.

“일부러 너 죄책감 가지라고 그렇게 말한 거야. 휘둘리지 마. 넌 피해자야.”

단호하게 짚어 주자 김우진이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눈썹 끄트머리를 아래로 축 내렸다. 눈가는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미안…….”

내 말에도 깊게 뿌리 내린 죄책감을 없앨 수는 없는지 김우진은 자책 어린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김우진의 손을 좀 더 강하게 붙잡았다.

“김우진. 너… 그렇게 끌려갔을 때, 그리고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다쳤을 때… 나 정말 힘들었다.”

“…….”

“너랑 나 둘 중에 한 명이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면 그건 내가 가지는 게 맞겠지. 하지만 이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죄책감을 가질 사람은 우리 둘이 아니야.”

가해자가 멀쩡히 있는데 왜 피해자들끼리 죄책감을 공유해야 하는가. 예전의 나는 그걸 구분하지 못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난 네가 그렇게 고통받은 거 절대 안 잊어.”

김우진을 비웃던 아자젤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김우진을 고문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돌아 버릴 정도로 화가 나는데, 죄책감까지 심어 준 그 행동이 굉장히 거슬렸다.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면서 힘들어하지 마.”

어딘가 넋이 나간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우진이 마지막 말에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살피며 안겨 오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올라간 감정 때문인지 품 안에 들어간 김우진의 몸은 평소보다 뜨거웠다. 좁은 공간에 들어가려는 고양이처럼 꾸역꾸역 안겨 오는 김우진을 거절하지 않고 나 또한 두 팔을 벌려 마주 안아 줬다.

괜찮냐는 뜻을 담아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자 김우진이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얇은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던 터라 어깨가 금방 축축해졌다. 진짜 울잖아…….

내 말을 듣고 안심해서 우는 건지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려서 우는 건지 모르겠다. 씁쓸한 마음으로 어깨를 내어 주자 한참을 낑낑거리던 김우진이 곧이어 고개를 들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어 여러 빛으로 반짝거렸다. 그 상태로 김우진이 아주 천천히 입을 맞춰 왔다.

따듯한 입술이 메마른 내 입술 위를 덮었다. 입술을 가르고 혀가 들어오는 적나라한 감촉에 손끝이 움찔 떨렸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바싹 붙은 김우진의 가슴에서 두근, 두근 하는 심장 박동이 내게로 번져 왔다.

키스하기 직전에 마주한 김우진의 눈과 피부로 전해져 오는 심장 뛰는 소리가 머릿속에 차례대로 새겨졌다.

-상대의 감정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눈을 바라보거라. 그다음에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럼 알 수 있을 거다.

새벽에 들었던 엘로힘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이런 의미였다. 직접 겪어 보니 왜 엘로힘이 눈과 심장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이해가 갔다.

적극적으로 몸을 붙여 오는 김우진의 체온을 느끼며 나 또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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