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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60화 (365/394)

360화

스탠딩 조명만이 은은하게 밝혀진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하태헌에게 어깨를 보여 줬다.

다행히 어깨와 뺨에 난 상처 둘 다 스친 수준이라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태헌은 피로 범벅된 상처 부위를 물에 적신 깨끗한 천으로 닦은 후에 간단한 치료를 해 줬다. 소독약을 뿌리고 드레싱을 붙이는 손길은 무척이나 능숙했다.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하태헌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은 경직된 분위기에 나도 쉽사리 대화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역시 화난 게 맞구나. 내 연락을 받지 않은 건 바빠서가 아니라… 받기 싫어서 거절한 거였다. 그걸 깨닫고 나자 저번처럼 바늘로 찔린 듯이 아릿하고 따가운 통증이 배 속에 퍼졌다. 한순간이었지만 소독약이 뿌려진 어깨보다 배가 더 아플 정도였다.

내 연락을 피하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찾아온 것도 모자라 도움까지 받게 되다니.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달칵.

하태헌이 치료를 끝내고 구급상자를 소리 나게 닫았다.

긴장한 채로 앉아 있던 나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움찔 떨었다. 하태헌이 그 모습을 보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한 건 알고 있나 보군.”

여전히 평소보다 딱딱한 어투였지만, 그래도 하태헌이 먼저 입을 열어 줬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안도감이 밀려왔다.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역시 ‘어비스’라 적힌 책부터 알려 줘야겠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음… 어비스라는 책의 정체는요.”

“아니, 그거 말고.”

“예?”

그거… 말고? 그럼 뭘 설명하라는 거지? 당황해서 하태헌을 바라보자 그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다쳤는지, 왜 이 시간에 여길 온 건지 설명하라는 거다.”

“아.”

그거부터 설명하라는 거였구나. 머쓱함이 밀려와 괜히 목덜미를 만졌다.

근데 이 부분도 설명이 애매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최대한 솔직하게 털어놓자고 마음먹으며 입을 열었다.

“전화를 해 보고 메시지도 보냈는데 하태헌 씨가 보질 않으셔서요. 그, 하태헌 씨를 탓하는 게 아니라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많이… 실망하신 줄 알았어요.”

“…….”

“그래도… 얼굴 보고 대화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 시간에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한번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요.”

“그럼 오는 길에 다쳤다는 건가?”

“네. 누군가가 건물 옥상에서 원거리 무기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활보다는 빠르고 총소리는 나지 않아서 석궁 같은 무기로 추측 중입니다.”

“석궁이라… 뭐든 이 밤중에 무기를 사용했다면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는 거군.”

하태헌은 팔짱을 끼고선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노려봤다.

“한이결. 지금 네 문제로 한참 시끄러운 거 알고 있을 텐데. 레퀴엠 측에서 당분간 외출은 삼가라고 말하지 않던가?”

아차. 문제를 정확히 짚어 내며 나를 혼내는 하태헌의 시선을 피하며 어깨를 슬쩍 가렸다. 치료하느라 상의를 벗고 있던 터라 다친 부위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눈치 보였다.

“듣, 긴 했는데요. 잠깐 잊었습니다. 변명이 아니라 진짜예요. 하태헌 씨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하태헌을 만나러 집으로 찾아가 보자고 마음먹은 순간, 홀린 듯이 안전이고 뭐고 바로 능력을 써서 날아온 거니까.

대답을 들은 하태헌의 눈빛이 조금은 풀어졌다.

“다시는 이러지 마라. 상황이 좋아져도 앞으로는 안 돼. 네 능력은 이미 많이 알려졌으니까. 노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도 이상하지 않다.”

“네. 제가 경솔했습니다.”

하태헌의 말이 백번 옳았다. 순순히 동의하자 하태헌이 식탁 의자에 걸려 있던 정장 재킷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테이블에 올려진 검은 물체는 다름 아닌 액정이 처참하게 깨진 핸드폰이었다.

“이거 설마 하태헌 씨 핸드폰입니까?”

“그래. 광화문에서 싸울 때 망가진 거다.”

핸드폰은 액정뿐만 아니라 뒷부분도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켜지지 않는 핸드폰을 살펴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핸드폰이 망가져서 연락이 안 된 거군요.”

그러고 보니 전화 걸었을 때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왔었지. 고장 나서 켤 수 없었던 거구나.

“핸드폰이 망가진 이유 하나 때문에 일주일 동안 연락을 못 한 건 아니다.”

고민하는 기색으로 잠시 말을 멈춘 하태헌이 나와 눈을 맞춰 왔다.

“한이결. 넌 내가 너한테 많이 실망한 것 같다고 했지.”

“…….”

“그걸 부정하진 않겠다. 이번 일로 너한테 실망한 건 사실이니까.”

각오했는데도 실망한 게 사실이라는 확답을 듣자 가슴 속이 따끔하게 아파졌다.

“하지만 그건 과거를 설명해 주지 않아서가 아니야.”

“예?”

“네가 나를 믿지 않아서 실망한 거다.”

믿지 않는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행동조차 못마땅한지 하태헌은 눈가를 불만스럽게 좁혔다.

“넌 그동안 몇 번이고 숨기고 있는 이야기를 내게 하려고 했지. 하지만 기회가 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아닌 척 다음으로 미루더군.”

날카로운 지적에 숨이 일순간 멈췄다. 하태헌에게 ‘어비스’에 관한 설명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명을 듣고 내가 너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신이 없었겠지.”

“그건…….”

“나는 계속 기다렸다. 네가 언젠가는 날 믿고 설명을 해 줄 거라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분명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넌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됐군.”

처음 거실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욱 무거워진 공기가 몸을 짓눌러 왔다. 지치고 피로한 얼굴을 한 하태헌이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

“내가… 너한테 이 정도로 신뢰를 주지 못했던 건가? 아니면 내가 네 곁을 떠날 거라고 걱정할 만큼 내 감정이 가벼워 보였나?”

상처받은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옆에 앉아 있는 하태헌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하태헌 씨.”

하태헌이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태헌은 아무 문제 없었다. ‘어비스’ 책에 대한 진실을 알려 줬을 때 하태헌이 보여 줄 반응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던 내가 문제였다.

“저는 그저 무서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오해를 풀 수 있을까. 하태헌이 자책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바에는 차라리 그가 나에게 실망하고 경멸하는 게 나았다.

“하태헌 씨에게 다시는 전처럼 편하게 말을 걸 수 없게 될까 봐… 제 곁에 남아 줄 수 없다고 말할까 봐…….”

목소리가 자꾸만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목 끝까지 차오른 뜨거운 감정을 겨우 삼켜 냈다.

“하태헌 씨가 제게 보여 준 감정이 저도 너무 소중해서…….”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속마음을 꾸역꾸역 토해 내면서 깨달았다. 왜 하태헌에게 설명할 수 없었는지를.

나를 바라보는 저 검은 눈동자에서 따듯한 온기가 사라질 것 같았다. 때때로 뺨을 쓸어 오는 손길이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 버리고, 내게 지어 주던 부드러운 미소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에 빠졌다.

“제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점점 힘에 부쳤다. 이제는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차마 하태헌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내리깐 눈가가 열기로 달아올랐다.

“잘못했습니다. 하태헌 씨가 물어보는 거 다 대답하겠습니다.”

“…….”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목이 강하게 붙잡히며 상체가 확 끌려갔다.

“으읏……!”

고개를 숙인 하태헌과 순식간에 입술이 맞물렸다. 연달아 쪽쪽, 두 번 입을 맞춘 하태헌이 세 번째에는 거침없이 혀를 밀어 넣어 왔다.

“흐, 윽…….”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눈을 꾹 감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하태헌의 옷깃을 붙잡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내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 들이며 상체를 바싹 밀착시켜 왔다. 억지로 떠밀리듯 몸이 뒤로 넘어가자 등에 소파 가죽이 닿아 왔다.

“하아, 콜록, 으…….”

갑작스럽게 시작된 키스에 숨이 금방 턱 끝까지 차올랐다. 입술을 뗀 하태헌은 소파에 누운 채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내가 네 곁을 떠나는 상황은 절대 없을 거다.”

하태헌의 손이 내 뺨을 매만졌다. 그가 가진 따듯한 체온이 얼굴로 천천히 번져 나갔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해도 상관없다. 나보고 꺼지라고 하는 것만 아니면 뭐든 다 이해해 줄 수 있어.”

“하태헌 씨.”

옷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가져간 하태헌이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 조심스러운 몸짓에는 애정과 함께 집착이 느껴졌다.

“그저 이렇게… 내가 주는 애정을 피하지 말고 받아 주기만 해도 된다. 그거면 충분하니까.”

그거면 충분하다니. 내 처지를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말에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이 지어졌다.

한이결의 몸에 들어와 하태헌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게 있어서 하태헌이라는 사람은 좋으면서도 어려운 상대였다.

그는 내가 가장 힘들 때 힘이 되어 준 영웅 같은 존재였고, 누군가에게 받는 애정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려 준 부모였으며,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제가 어떻게 하태헌 씨한테 꺼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태헌에게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나도 하태헌이 소중했다.

대답을 들은 하태헌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살짝 휘어진 눈에 다정함이 깃들었다.

“정답이다.”

하태헌이 다시 내게 입술을 붙여 왔다. 나 또한 눈을 감으며 키스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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