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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65화 (364/394)
  • 365화

    92. 서투른 감정

    우서혁에게 손이 잡힌 채로 굳었다. 머리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손잡는 걸…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우서혁의 커다란 손에 자연스럽게 잡혀 있는 내 손을 보자 방금 우서혁이 한 말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당황스러운 감정을 도통 숨길 수가 없었다. 바싹 굳은 채로 당황하는 나를 본 우서혁이 천천히 손을 놔주었다.

    “죄송합니다.”

    뜨거운 체온이 사라진 손에 허전한 느낌이 몰려왔다. 사과를 해 오는 우서혁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술을 깨물자 그의 손이 이번에는 얼굴로 다가왔다.

    “깨물지 마십시오.”

    “…….”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럴 때가 아닌데 순간 감정을 못 참았습니다.”

    깨물지 말라는 듯이 입술을 가볍게 꾹 누른 손가락이 금방 떨어졌다. 손을 따라 고개를 들자 나를 응시하는 우서혁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담담한 표정을 한 얼굴에서 나는… 그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바로 알아챌 만큼 적나라한 감정이 검은 눈동자에 가득 담겨 있었다.

    순식간에 가슴 속이 무거워졌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우서혁의 감정과 내가 그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한이결 씨.”

    나를 잠자코 보던 우서혁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바라고서 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다가가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불편하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해 주면 됩니다.”

    내 어깨를 쥘 듯이 다가온 우서혁의 손은 아까와 달리 닿지 않고 그대로 멀어졌다.

    “불편하다면 앞으로는 만지지 않겠습니다. 한이결 씨 곁을 떠나지도 않을 겁니다. 그냥… 그럴 뿐입니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꿰뚫어 오는 위로였다. 내가 거절해도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말이 심장에 강하게 박혀 왔다.

    “저는…….”

    힘겹게 뱉어 낸 대답은 중간을 채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나는 끝내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누워서 정면에 보이는 창문 밖을 구경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여우의 등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침실을 나섰다. 새벽 3시가 다 되어 가는 늦은 밤, 어두컴컴한 거실은 스탠드 조명 불빛만이 옅게 빛나고 있었다.

    툭, 투둑.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끊이질 않고 들려왔다. 주방에서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자려고 했던 나는 생각을 바꿔서 물잔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의자 하나를 베란다 창문 앞에 놓고 거기에 앉아서 밤비가 내리는 바깥을 바라봤다.

    왜 갑자기 이런 시간에 눈을 뜬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못하는 이유 또한 알 수가 없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단순히 나쁘거나 좋거나 그런 게 아니라,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그런 상태였다. 좀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서 비가 쏟아지는 베란다 창밖을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현아.”

    진한 백합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엘로힘이 서 있었다.

    “엘.”

    “잠이 오지 않는 것 같아서.”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눈이 떠졌습니다.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다시 자려고요.”

    “잠이 안 올 때는 억지로 잘 필요 없지.”

    옅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내게 걸어온 엘로힘이 손을 뻗었다. 내가 들고 있는 잔을 가져간 엘로힘은 예전에 했던 것처럼 물을 순식간에 붉은 와인으로 바꿔 버렸다.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니?”

    그렇지 않아도 술이 마시고 싶었던 터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번에 술 파티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당분간은 안 마시려고 했는데.

    엘로힘의 눈치를 보다가 와인이 담긴 잔을 조심스럽게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엘로힘의 몸에서 나는 백합 향기와 진한 와인 향기가 한데 어우러졌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보이는구나.”

    조용히 곁에 서 있던 엘로힘이 내가 잔을 반절 정도 비울 때쯤에 입을 열었다. 도수가 강한 와인에 가슴 속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비가 오는 새벽이라서 그런가, 쓸데없이 감성적이게 되네요.”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엘로힘이 이어 말했다.

    “우서혁이라는 아이의 감정을 정말 조금도 몰랐던 모양이다.”

    “…….”

    엘로힘이 나조차도 몰랐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 왔다. 목이 타는 듯한 감각에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조금… 아니.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많이 놀랐습니다.”

    “너한테 이런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아 보이던데. 그 아이가 알면 좀 미안해하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벌써 사과받았습니다.”

    엘로힘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이 생각도 읽었을 엘로힘은 역시나 아무런 반박 없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길게 내려온 백색의 머리카락이 노란 전등 불빛에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 아이가 널 마음에 품은 게 잘못은 아니지 않니.”

    “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우서혁의 잘못이 아니었다. 천사연이나 하태헌, 김우진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네 잘못은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엘로힘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잔에 담긴 와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문을 열었다.

    “팀원들이 제게 애정을 주는 건 너무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더 특별하죠.”

    “…….”

    “엘은 아시잖아요. 봤으니까.”

    천사연을 도와서 칼리를 몰아내고 세계를 구하겠다고 결정한 이유에는 내가 살기 위한 목적만 있는 건 아니었다. 칼리가 시간을 되돌렸을 때 내가 죽지 않는다 해도 천사연을 도와 프라우스 신도단과 대적했을 거다.

    지금 이 순간들이 소중하니까. 지키기로 결심한 인연들이니까.

    우리가 쌓아 온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무너져 내린 천사연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만큼 내 곁에 있는 모두가 참 좋았다.

    “그래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요.”

    가슴 깊이 묻어 놨던 진심을 토해 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다들 제가 어떤 선택을 해도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부담 갖지 말라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곁에 머물겠다고 하는 말은 결국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나를 향한 배려였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내 마음을 우선시해 주는 거겠지.

    하지만 그 배려를 거절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무리하지 말고 내 곁을 떠나도 좋다고 대답하면…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조용히 내 얘기를 듣던 엘로힘이 내 턱을 손으로 부드럽게 잡아 왔다. 위로 들어 올려지는 힘에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자 황금색과 검은색이 섞여 빛나는 엘로힘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내 의견을 말해 주자면, 세현아.”

    “네.”

    “걱정을 지나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네가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는 안다만…….”

    눈가를 찌푸린 엘로힘이 나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곁에 남겠다고 하는 게 오로지 너만을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전…….”

    “아이들도 네 곁에 남아 있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그가 내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고 싶으면 네 두려움에 매몰되지 말고 상대에게 집중해야 한다. 상대가 그저 어쭙잖은 배려로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욕심이 담긴 진심인지.”

    욕심? 내 곁에 남아 있겠다는 게 욕심이 된다고?

    “세현아, 너도 그 아이들을 모두 소중히 여기고 애정하지 않니.”

    “당연합니다.”

    “너조차도 그런데, 네가 가진 감정 이상으로 널 마음에 품은 아이들은 어떨까.”

    “…….”

    “아마 네가 떠나라고 쫓아내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다. 네 곁에 남아 있기 위해 모진 애를 쓰겠지.”

    잔을 쥐고 있는 손끝이 절로 움찔 떨렸다. 폭풍이 이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가 가장 선명하게 느낀 건 다름 아닌 기대감이었다.

    그런가? 정말로… 그런 건가? 모두가 내 곁에 남아 있어 주면 좋겠다는 이 마음이… 나만의 욕심이 아닌 건가?

    “감정을 알아 가고 배워 가는 건 누구나 어렵고 힘들단다. 네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야. 더군다나 세현아, 너의 지나온 삶을 생각하면 한 명도 벅찰 텐데 감당해야 하는 숫자가 여럿이니… 무서울 만하지.”

    엘로힘이 이번에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의 커다란 손 아래에서 머리카락이 부스스 흩어졌다.

    “상대의 감정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눈을 바라보거라. 그다음에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럼 알 수 있을 거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손에 담긴 잔을 가져갔다.

    “상대의 감정에 확신이 생기면 그땐 이제 너도 더 편하게 행동할 수 있겠지. 그거부터 차근차근해 보렴.”

    상대의 눈을 보고, 심장 소리를 듣는 것.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내 감정에 치우쳐서 상대가 어떤 감정을 드러내는지 집중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네.”

    귀한 가르침이었다. 미숙하기 그지없는 내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기도 했다.

    “해 보겠습니다.”

    아까보다 훨씬 괜찮아진 기분으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엘.”

    억지로 짓는 게 아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 엘로힘도 나를 따라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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