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64화 (363/394)
  • 364화

    나중에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 주려나. 기회 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앨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천사연 마스터에게 설명을 간략하게 들어 보니 현재 상황이 그리 좋진 않아 보이더군요.”

    “네. 아무래도…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길드가 책임을 지게 돼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정부나 관리 본부가 길드 책임으로 몰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 동안 프라우스 신도단 세력에 먹힐 대로 먹힌 정부와 관리 본부가 우리를 좋게 봐 줄 리가 없었다.

    ‘정말로… 이제는 한계가 왔구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그 끝이 세계와 우리가 될지 프라우스 신도단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프라우스 신도단과 비교했을 때, 우리가 훨씬 더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한국 정부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이번 사건으로 프라우스 신도단을 실제로 처음 만나 봤는데… 이 정도로 규모가 클 거라고는 예상 못 했어요.”

    “앨리스 부마스터뿐만 아니라 광화문 사건을 보게 된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생각할 겁니다. 이동 아이템을 이용해서 몬스터를 바깥에 풀어놓는다는 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가능한가, 아닌가에 대한 여부는 둘째치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실행하지 못할 끔찍한 계획이다. 지금도 TV를 틀면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났는지 채널마다 쉴 새 없이 보도하고 있다.

    잠시 머뭇거린 앨리스가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이결 능력자는 괜찮아요? 음,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요? 다른 능력이 알려진 문제에 대해서…라고 말하면 되나요?”

    “전 괜찮습니다.”

    앨리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광화문 사건의 인명 피해만큼이나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는 게 바로 나였다.

    워낙 큰 전투가 일어난 데다 비행 몬스터를 포함한 다양한 몬스터가 활개 치는 바람에 변한 내 모습을 가까이에서 찍지는 못했어도 증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짙은 연기로 가려져 있거나 화질 나쁜 CCTV 영상이긴 해도 ‘한이결’이 ‘권세현’으로 변하는 장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잡혔다. 그나마 개입은 눈에 드러나는 능력이 아니긴 한데… 어차피 프라우스 신도단이 알게 됐으니 여전히 문제였다.

    “한이결 능력자는 두 가지 능력을 가진 건가요? 능력 때문에 얼굴도 변하는 거고요? 아, 불편하시면 대답 안 해 주셔도 돼요.”

    “불편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여기저기 다 들켰는데요.”

    내 눈치를 보면서도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 빛내는 앨리스의 행동에 옅은 웃음이 나왔다.

    “말씀하신 내용 다 맞습니다. 바람이 아닌 다른 능력을 사용하려면 변해야 합니다.”

    “와… 우와… 그렇군요. 대단하네요.”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니까 놀라신 거 이해합니다.”

    “노, 놀라긴 했지만요. 그보다는…….”

    뺨을 붉게 물들인 앨리스가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로 나를 열렬하게 바라봤다.

    뭔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마주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앨리스가 내 쪽으로 상체를 확 수그렸다. 덜컹, 가운데에 놓여 있던 테이블이 앨리스의 거친 몸짓에 소음을 내며 흔들렸다.

    “한이결 능력자!”

    “예?”

    “아직 무소속인 거 맞죠?”

    “예? 아, 네.”

    앨리스의 기세에 밀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테오, 빨리! 내가 아까 준비하라고 했던 서류 꺼내!”

    서류? 웬 서류? 당황한 나를 두고 테오가 들고 있던 서류 가방에서 파일철을 하나 꺼내 건네줬다. 앞에 ‘한이결 능력자’라고 야무지게 이름까지 붙어 있는 파일철을 펼친 앨리스가 그걸 내 쪽으로 내밀었다.

    “자, 한이결 능력자.”

    “……?”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에 차마 뿌리치지 못한 나는 일단 받아 들고 서류 내용을 살폈다.

    리오 길드의 장점과 계약 사항? 소속 길드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과 복지 시설? 이게 다 뭐야? 서류를 넘길수록 어이없는 내용에 입을 벌리자 앨리스가 천진하게 물어 왔다.

    “어때요?”

    어떻긴 뭐가 어때.

    “완전 좋죠?”

    “안 좋은데요.”

    “네에? 어디가 안 좋아요? 원하는 거 있으시면 말만 해요! 다 맞춰 드릴 수 있어요.”

    “원하는 거 없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덮었다.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우서혁에게 하던 스카우트를 나한테 그대로 하는 거였다.

    내가 대놓고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앨리스가 눈썹 끝을 아래로 축 늘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설마 레퀴엠에 들어가시려는 건가요? 그건 좋은 결정이 아니에요. 리오 길드로 오시면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보장할게요.”

    “아뇨, 전 그 어느 길드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최대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앨리스가 왜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이해는 된다.

    개입 능력을 모르더라도 SS급보다 강한 힘이라는 건 사마엘과 나눈 대화에서 충분히 알아챘을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이결의 바람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탐날 만할 거다. 무엇보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능력을 갖고 있는 경우는 내가 유일하니까 한 길드를 책임지는 입장에선 노려볼 만하겠지.

    “혹시 호주로 옮겨 오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어요. 한이결 능력자와 주변 분들이 프라우스 신도단과 대립하고 있다는 건 이번 일로 잘 알게 됐으니까요.”

    “그 일이 아니더라도 제 결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미련 가득한 앨리스가 다시 제안해 왔지만 나는 이번에도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계속되는 거절에 눈가를 좁힌 채로 고민하던 앨리스가 별안간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럼 저랑 만나 보는 건 어떠세요, 한이결 능력자?”

    “네?”

    “아, 이건 길드랑은 전혀 상관없는 제 개인적인 희망 사항이에요. 저는 한이결 능력자가 엄청, 엄청, 정말로 엄청 마음에 들었거든요!”

    “……네?”

    “진지하게 물어볼게요. 저랑 좋은 감정으로 만나서…….”

    “적당히 하십시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말에 내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우서혁이 끼어들었다. 앨리스에게 붙잡힌 내 손을 다소 거칠게 빼낸 그가 불쾌감을 담아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내 손은 이제 앨리스가 아닌 우서혁의 커다란 손안에 들어가 버렸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우서혁 비서가 곤란할 게 뭐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이성한테 대시 정도는 해도 괜찮잖아요.”

    “한이결 씨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되자마자 태도가 변하신 거 아닙니까? 그리 매너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둘 다 한이결 능력자인데 상관없지 않나요? 그리고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서로 한번 알아 가 보자는 건데, 우서혁 비서님은 참 보수적이시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또 싸우려고 시동을 거는 두 사람을 말리며 이마를 짚었다. 앨리스한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이상형이 검은 머리 남자라고 했던가?

    ‘멀쩡한 우서혁 놔두고 어째서 나한테…….’

    앨리스가 왜 나한테 꽂혔는진 모르겠지만, 길드 스카우트와 마찬가지로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연애할 처지도 아니고 그럴 여유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런. 아쉽네요.”

    내 옆에 앉아 있는 우서혁을 힐끔 쳐다본 앨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라이벌이 만만치 않게 많아서 이럴 것 같긴 했어요.”

    방금까지 저돌적으로 만나 보자고 하던 사람치고 담백하고 깔끔한 태도였다. 파일철을 다시 테오에게 돌려준 앨리스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이결 능력자. 서류를 봤으니 당신도 알겠지만,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최고의 연봉과 복지를 보장해 주고 있어요. 외국에서 호주로 넘어오는 길드원은 특히 신경 쓰죠.”

    “예, 봤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제안을 해도 끝내 거절하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나를 향한 앨리스의 검은 눈동자가 온화한 감정을 담았다.

    “그런 분들은 언제나 곁에 가족이 있었어요.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어떤 제안을 해도 고민 없이 거절하더군요.”

    “…….”

    “지금의 한이결 능력자처럼요.”

    앨리스가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벗어 놨던 정장 재킷을 입은 그녀는 나갈 채비를 했다.

    “아쉽다는 건 진심이에요. 거절할 걸 알면서도 굳이 꺼낸 건…….”

    우서혁을 잠시간 바라본 앨리스가 말했다.

    “마음이 있는데 계속 숨기고 있으면 슬프잖아요. 거절당하더라도 말 못해서 생기는 후회는 없을 테니까.”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말 못해서 생기는 후회라. 내 옆에서 앨리스의 얘기를 같이 들은 우서혁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뜻 동의하자 앨리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명함에 적힌 번호는 제 개인 번호니까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연락해요. 물론 안 하겠지만.”

    장난스럽게 덧붙인 앨리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잘 지내요, 한이결 능력자.”

    인사를 끝으로 앨리스와 테오가 응접실을 떠나갔다.

    마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기분이었다. 길드 스카우트도 받고 만나 보자는 말도 듣고.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파격적인 제안을 두 번이나 받아서 그런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앨리스는 첫 만남 때도 느꼈지만, 대화가 굉장히 자유분방한 타입인 것 같았다. 주제가 확확 바뀌어서 따라가는 데 조금 벅찼지만 그녀가 가진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에게도 힘을 실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얼떨떨한 나를 잠자코 지켜보던 우서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무심코 받아 든 명함을 테이블에 올려 두며 멋쩍게 웃었다.

    “네. 난감했는데 중간에 끊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런 경험은 별로 없어서…….”

    “잘 거절하셨습니다. 앨리스 부마스터가 집요하게 굴지 않고 순순히 물러나서 다행입니다.”

    하긴, 우서혁은 앨리스의 스카우트 제안을 꽤 오랫동안 받아 온 것 같으니 의아하게 여길 만했다.

    ‘그보다…….’

    나는 시선을 내려 아직까지 내 오른손을 잡고 있는 우서혁의 손을 바라봤다.

    앨리스한테 잡혔을 때보다 훨씬 편하긴 하지만… 이제 상황도 정리됐는데, 계속 잡고 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저, 우서혁 씨. 이제 손은 놔주셔도 됩니다.”

    그 얘기에 우서혁의 시선도 맞잡은 손으로 옮겨 갔다.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로 한참을 바라보던 우서혁이 잔뜩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한이결 씨 손을 잡고 있으면 불편하십니까?”

    “예?”

    “저는…….”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거리던 우서혁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한이결 씨가 저와 손을 잡는 걸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6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