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한이결.”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던 김우진이 내 팔을 붙잡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너한테 그 책을 준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그리 놀랄 것 없는 질문이었다. 연선우는 책을 내게 직접 넘겨준 당사자인 만큼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쓰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그럴 거야.”
나도 아주 잠깐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다. 연선우의 본가에서 10년이 넘도록 보관되어 있었던 책이 결국은 내 손에 들어왔다.
이게 정말 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그것까지 합쳐서 운명? 내가 한이결이 되어서 이쪽 세계로 넘어오게 될 거라는… 그런 운명인 건가?
이 문제는 아직 뚜렷하게 나온 답이 없었다. 하지만 연선우가 무언가를 숨기고 내게 일부러 책을 넘겨준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다.
연선우가 내게 보여 준 그 모든 행동이 거짓일 리가 없었다.
“많이… 친해 보이던데.”
망설이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김우진이 이어 물었다.
“무슨 사이였어? 가게 직원?”
“아니, 그 아이는 그냥…….”
대답은 끝을 맺지 못하고 흐려졌다.
연선우와 무슨 사이냐는 말은 이번에 처음 들은 게 아니었다. 연선우를 알게 된 이후부터 고동주를 포함해서 참 많은 사람에게 들었었다.
그때마다 난 뭐라고 대답했더라. 가끔 놀러 오는 손님, 성가신 놈. 그렇게 시작했던 소개는 얼마 안 가 친한 동생, 신경 쓰는 아이로 변했고… 마지막에는…….
“가게 직원이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알던 아이였어.”
담담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최대한 감정 없이 깔끔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
나와 김우진을 잠시간 바라보던 천사연이 주제를 돌리듯 입을 열었다. ‘어비스’ 책에 관한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이야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로힘을 돌아봤다.
“그 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엘.”
“말하렴.”
꿈에서 깨어난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심장 밖으로 넘쳐 나오던 권세현의 기운. 그리고 칼리의 피로 이어진 기운의 실을 아무런 타격 없이 끊어 냈던 개입 능력.
“제 힘이 더 강해진 게 맞습니까?”
“…….”
“사마엘이 준 액체를 마셔서… 그런 겁니까?”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 속에서 나를 응시하던 엘로힘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칼리의 피가 네 몸에 변화를 일으켰다. 역시 느끼고 있었구나.”
“모르기에는 너무 확실한 변화였으니까요.”
“이런 경우는 우리도 이제껏 본 적 없다. 그러니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지 알 수 없지. 힘이 강해진 것 자체도 결코 좋은 결과는 아니고.”
엘로힘은 이전에도 내가 가진 개입 능력을 반기지 않았다. 많은 곳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니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내게 도움을 청해 온 건 사실이었지만, 내 능력을 치켜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걱정을 해 왔다.
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 그걸 우리는 뼈저리게 알았다.
원래도 조심해서 써야 할 권세현의 힘이 칼리의 피를 마시고 더욱 커졌으니 제어하기가 힘들어졌다. 아니, 제어가… 가능하긴 한 건가? 자신이 없었다.
“무리해서 쓰려고 했다간 기운을 막지 못하고 강제로 폭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는 권세현의 기운을 섣불리 꺼내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나는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마엘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했다. 핑거 스냅이라는 간단한 행동만으로 정신 지배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마엘을 개입 능력 없이 과연 막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더더욱 프라우스 신도단 측에서 대응하지 못하도록 발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낫겠어.”
박건호가 입가를 매만지며 의견을 냈다. 같은 생각이기에 나는 동의하며 덧붙여 설명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처럼 시간을 줬다가는 또 예상하기 어려운 아이템을 만들어 낼지도 모릅니다.”
내가 권세현으로 변하는 모습과 개입 능력까지 모두 본 사마엘과 아자젤을 붙잡지 못하고 놓친 탓에 부담감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이번에도 미적거리면서 움직였다가는 광화문 사건 때보다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정부와 관리 본부의 압박이나 시끄럽게 난리 치는 언론도 물론 부담이지만, 지금은 일단 넘어가야 합니다. 다 무시하고 신도단의 흔적부터 알아내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상황이 복잡할 때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부터 하자. 내가 한이결이 된 후에 배우게 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었다.
팀원들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얘기하자 천사연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그런 의미에서 최미진 센터장에게 연락이나 한번 해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최미진 센터장이요?”
“힘들게 붙잡은 놈들을 내버려 두면 아쉽지 않나?”
천사연이 손짓하자 우서혁이 내게 태블릿 PC를 넘겼다. 화면에 뜬 것은 사진과 함께 올라온 인터넷 기사였다.
광화문 광장 전투 당시에 붙잡힌 프라우스 신도단원들이 길드 관리 본부로 이송되었다는 내용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천사연을 바라봤다.
“설마 최미진 센터장에게 연락한다는 의미가…….”
“당연히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지.”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댄 천사연이 말을 이었다.
“장담하건대, 지금 붙잡혀 있는 신도단원은 자발적으로 신도단에 들어간 놈들만 있을 거다. 그만큼 알고 있는 정보도 많겠지. 최미진 센터장 위치 정도면 한 놈 정도는 충분히 빼 올 수 있을 거고.”
까마득한 시간 동안 프라우스 신도단과 싸워 온 천사연이었다. 얼굴이 가면에 가려져 있다고 한들, 정신 지배에 당한 상태인지 아닌지는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 겁니까? 최미진 센터장의 입장에서는 범죄자가 되라는 강요나 다름없을 텐데요. 그쪽에서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가만 놔두면 붙잡힌 신도단은 모두 도망칠 거다.”
“무슨 뜻입니까?”
“사마엘은 제 수족들이 관리 본부에 갇혀 있는 꼴을 구경만 하지 않을 테니까.”
“……!”
그래, 애초에 정부와 관리 본부가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 오는 것도 사마엘이 원인이었다.
그의 정신 지배가 어디까지 뿌리를 내렸는진 모르지만, 호주에서 온 손님이나 마찬가지인 앨리스에게 압박을 가할 정도였으니 우습게 여길 수준은 아닐 터였다.
“지금이야 광화문 뒷수습하느라고 관리 본부가 정신없어서 괜찮지만, 조금이라도 정리가 되면 즉시 손을 쓰겠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신도단원들을 풀어 주고 행적을 지워 버릴 거다. 최미진 혼자서는 그걸 막을 수 없을 거고.”
“어차피 놓치게 될 놈들이니 그전에 한 명이라도 끌고 와야 하는 거군요.”
이런 이유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최미진도 설명을 들으면 우리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을 거다.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유감이 많은 건 최미진도 똑같았다.
“신도단을 데려와서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얻어 낼 수 있다면 우리에겐 무조건 이득입니다. 사마엘의 흔적을 찾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저만 믿으세요.”
내 시선을 받은 권정한이 걱정하지 말라는 기색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항상 기대 이상을 보여 주던 권정한이다. 믿지 않을 리가 없었다.
“좋군. 우서혁은 지금 바로 최미진 개인 번호로 연락 넣어 놔. 통화는 내가 이따 하지.”
“예.”
“그리고 한이결.”
뭔가 싶어서 의아하게 바라보자 천사연이 별로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앨리스 부마스터가 한번 만나자고 하더군.”
“…웬일로 순순히 알려 주십니까?”
“한 번만 더 숨겼다가는 진짜로 삐질 것 같아서.”
삐지긴 누가 삐져, 화를 내는 거겠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짓자 천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여 말했다.
“만난다고 하면 응접실을 빌려주도록 하지. 대신 우서혁은 무조건 데려가도록.”
“우서혁 씨는 또 왜요.”
“저번에도 잘만 데려가지 않았던가? 따로 보고는 안 받을 테니 데려가. 우서혁 없이 둘이 만나는 건 절대 안 돼.”
“맞아, 한이결. 꼭 데려가.”
“이결 씨, 비서님이랑 꼭 같이 가셔야 해요.”
“굳이 만나야 하나? 그냥 무시해라.”
신신당부를 하는 천사연의 뒤로 김우진과 민아린, 하태헌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왜 다들 같은 의견인지 모르겠다.
큰 잘못을 한 상태에서 싫다고 강하게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이렇게 돌아가려니까 너무 아쉬워요.”
응접실에서 마주한 앨리스는 무척이나 속상해 보였다.
이 주일 동안 여행을 할 계획으로 신나 하던 앨리스는 광화문 사건과 관리 본부의 압박으로 결국 오늘 저녁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돌아가게 됐다. 여행은커녕 날짜도 못 채우고 쫓겨나는 셈이었다.
“저도 아쉽습니다. 그런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앨리스 뒤로 눈길을 옮겼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앨리스 뒤로 수행 비서 테오가 딱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거까진 별문제 없었다. 관심이 가는 건 다른 이유였다.
내가 테오를 바라보는 것을 알아챈 앨리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한이결 능력자는 처음 보겠네요. 귀엽죠?”
“귀… 음…….”
귀엽다면 귀여운 거긴 한데… 나는 차마 맞장구를 쳐 주지 못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테오의 머리 위에는 끝이 둥글게 생긴 동물 귀가 뾰족 튀어나와 있었다. 귀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검은 무늬가 새겨져 있고, 등 너머에는 길고 가는 꼬리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테오는 A급 변신 능력자예요. 동물은 표범. 지금은 제 호위를 하기 위해서 변신을 한 상태랍니다. 저렇게 하면 청각과 후각이 어마어마하게 예민해지거든요.”
“그렇군요. 대단합니다.”
어딘가 낯익다고 했더니 다큐멘터리 영상에서나 보던 표범 귀와 꼬리였구나. 신기한 기분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테오를 구경하다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우서혁을 슬쩍 바라봤다.
앨리스도 등에서 날개만 꺼낼 수 있고, 테오도 귀와 꼬리를 꺼낼 수 있으니까 우서혁도 비슷하게 변할 수 있는 건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우서혁도 나를 바라봤다. 그와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상상이 되기 시작했다.
우서혁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한 늑대 귀가 돋아나고, 풍성한 늑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꽤… 어울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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