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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62화 (361/394)
  • 362화

    원래는 약속한 대로 ‘어비스’ 책에 대한 설명을 하태헌에게 먼저 알려 주려고 했다. 하지만 나와 화해한 하태헌은 오히려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설명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했다.

    나로서도 그편이 더 좋았다. ‘어비스’ 책에는 하태헌뿐만 아니라 천사연과 민아린을 포함한 다른 팀원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설명을 두 번이나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태헌도 그걸 알고 배려해 준 거겠지.

    엘로힘은 이제부터 설명할 ‘어비스’에 대해 모두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프라우스 신도단과 있을 앞으로의 싸움에 조언을 얻기 위해서 초대했다. 초대라기엔 그냥 엘로힘이 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마자 그가 알아서 찾아와 준 거지만.

    “제가 저번에 미국에서 말했던 제 과거에 관한 이야기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다 알려 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닥터가 만들어 낸 공간에서 만났던 과거의 나, 권세현. 다이스 가게와 직원들. 그리고… 유시혁.

    팀원들이 만나지 못한 유일한 사람은 연선우였다. 닥터가 만들어 낸 공간은 ‘가장 강한 이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 재현되는 곳이었으니까. 연선우와 함께 지낸 시간은 당연히 공간에서 구현되지 않았다.

    “이번에 신도단이 만들어 낸 미러 아이템을 통해서 여러분이 본 남자는…….”

    무심코 말이 잠시 멈췄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연선우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멈췄던 말을 이었다.

    “제가 아끼던 동생이었습니다. ‘어비스’ 책은 그 아이 본가에서 처음 발견한 겁니다. 그걸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제가 한이결의 몸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고요.”

    “책의 정체는 대체 뭐지?”

    박건호의 질문에 옆에 서 있는 엘로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엘로힘이 나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천사연이 칼리라는 존재에게 시간을 빼앗긴 상태라고 설명했었지.”

    엘로힘이 허공에 손을 들자 황금색 빛무리가 몰려와 책의 형상을 띠었다.

    “우리는 칼리와 대적하고 있는 천사연의 삶을 모조리 기록했다. 한참 뒤에는 천사연과 더불어 프라우스 신도단과 가장 많이 충돌하는 하태헌, 네 삶도 기록하기 시작했지.”

    자신의 삶이 기록됐다는 말에 하태헌이 눈썹 한쪽을 치켜세웠다.

    “이번 시간대에는 없는 일이니 기억 못 하겠지만 너도 동의한 일이란다. 프라우스 신도단과 싸우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니까. 우리에게 정보를 대가로 기록을 넘겼지.”

    칼리가 시간을 되돌리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모두 사라진다. 지난 시간대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건 시간의 본 주인인 천사연과 뺏어 간 칼리, 이 세계의 관리인인 엘로힘과 엘라하뿐이다.

    “그 덕분에 너는 매시간 예언자라고 불리는 나를 만날 수 있었던 거다. 세현이와 함께 내 공간에서 일주일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이미 대가를 치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건 나도 처음 알게 된 부분이었다.

    하태헌이 엘로힘을 만나고, 나와 함께 신전이 있는 장소로 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전 시간대에 대가를 치러 둔 상태라서 그런 거라니.

    “그렇게 우리는 천사연에 이어서 하태헌의 삶도 기록했다. 하지만 책의 양이 많아서 구분이 어려웠단다. 그래서 추가적인 표식을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천사연과 다르게 표지를 검은색으로 바꾸고 이름을 넣은 겁니까?”

    책에 관련된 사항은 나도 모르는 게 많았다. 안 그래도 전부터 의문을 가졌던 터라 조심스럽게 묻자 엘로힘이 고개를 저었다.

    “표지 색은 기록의 주인을 따라 정해진다. 우리가 바꿀 수 없지. 그러니 대신 이름을 새겨 둔 거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천사연의 과거 기록을 본 대가로 과거의 기억을 넘기지 않았던가.

    그럼 내 기억으로 채워진 책의 표지도 천사연의 붉은색이나 하태헌의 검은색처럼 색이 나타나려나. 어떤 색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이름을 ‘abyss’라고 지은 이유는… 글쎄. 엘라하가 문득 생각해 낸 단어를 써넣은 건데, 우리가 하는 일에 우연은 그다지 없으니… 언젠가는 그 의미가 밝혀질 것 같구나.”

    우리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웃음과 함께 가벼운 어투로 덧붙인 엘로힘이 아까 내가 했듯이 눈짓을 보냈다.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배턴을 이어받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제가 권세현으로 저쪽 세계에서 살면서 보게 된 ‘어비스’ 책은 엘이 설명한 책과 동일합니다. 하태헌 씨의 삶이 기록된 책이죠.”

    그저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책이 사실은 한 사람이 살아온 진짜 인생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떨리는 숨을 작게 내쉬며 제일 중요한 내용을 꺼냈다.

    “책에는… 하태헌 씨가 서술자로 등장합니다. 천사연 마스터와 민아린 씨, 김우진도 나오고요. 한이결이 된 후로 처음 만나게 된 사람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도 많습니다.”

    나는 처음 한이결이 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주변 모든 게 창작물이 만들어 낸 환상이나 가짜, 혹은 죽은 내가 꾸고 있는 백일몽이라고 여겼었다.

    “한이결은 유일하게 사망하는 등장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기 위해서 책에서 본 정보를 최대한으로 활용했습니다. 한이결이 죽은 원인을 천사연 마스터라고 오해해서 레퀴엠을 벗어나기 위해 하태헌 씨와 로헌을 이용했죠.”

    “오.”

    “호오.”

    잠자코 내 설명을 듣던 천사연과 박건호가 갑자기 감탄사를 뱉어 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반응이지?

    “…뭡니까?”

    진지한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가장 강한 반응을 보인 천사연을 노려보자 녀석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아니, 이제야 이해가 좀 돼서.”

    “뭐라고요?”

    “나로서는 당연히 그러지 않나? 고분고분하던 애가 갑자기 하태헌을 키우겠답시고 난리를 치는데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심지어 코트는 어떻게 찾아낸 건지, 알아서 선물로 주기까지 하고.”

    “으음. 죄송해요, 이결 씨. 상황에 맞지 않는 건 알지만 솔직히 재밌어서요. 소설책에 등장한 사람이 됐는데 그렇게 계획을 세우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역시 형은 대단하다고 생각 중이에요.”

    “…….”

    예상치 못한 팀원들의 반응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인 나를 내버려 둔 채로 하태헌마저 태평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때는 지나치게 수상하긴 했지. 책을 통해서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거면 납득이 가는군.”

    “엇, 그럼 이결 씨는 책 주인공이랑 등장인물하고 친해진 셈이네요? 우와!”

    “책에 나와 우서혁 비서는 안 나온 건가? 하태헌 부마스터와 친하지 않아서?”

    “하태헌 부마스터가 주인공이었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마스터가 주인공이었으면 나랑 우서혁 비서 분량도 많았을 텐데. 아쉽군.”

    …대체 왜 이런 분위기가 된 거지? 복잡한 심경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저 설명을 마저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아주 흥미로우니 더 해 보도록.”

    팀원들의 기대 가득한 눈이 내게 몰렸다. 동화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한탄이 절로 나왔다.

    “이곳이 단순히 책 속이 아니라 다른 세계라는 건 하태헌 씨와 함께 중국에서 엘을 만나고 알게 됐습니다. 책은 그저 두 세계를 이어 주는 매개체가 됐을 뿐입니다.”

    “단순히 그거로 끝은 아니지.”

    엘로힘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오며 살짝 웃었다.

    “책이 게이트와 비슷한 역할을 한 건 맞다만, 그것만으로는 권세현이 이곳으로 오는 건 어려웠을 거란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능력을 각성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내가 일부러 피하는 지점을 엘로힘이 정확히 짚어 냈다.

    이제 와서 또 숨기거나 거짓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태헌의 삶이 담긴 책이 얼마만큼 이득이었는지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능력 각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 능력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는 거다. 책을 통해서 능력을 알게 된 권세현은 죽는 순간에 각성했고, 개입 능력을 사용해서 책과 이어져 있는 통로로 들어갈 수 있던 거지.”

    “하태헌 부마스터의 책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이결 씨는 없었겠군요.”

    “그렇단다.”

    “책이 목숨을 살렸다 해도 제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단호하게 나온 말은 끝이 살짝 갈라졌다. 체한 것처럼 쿡쿡 쑤셔 오는 가슴 속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내 과거가 실체화된 닥터의 공간이나 천사연의 책을 봤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다. 서로 신뢰하는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이었으니까.

    내가 ‘어비스’를 읽은 건 앞선 두 상황과 달랐다. 하태헌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타인에게 낱낱이 보여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걸 읽은 타인은 책 내용을 판타지 소설로 치부하며 너무나도 가볍게 소비하고 즐겼다.

    책에 등장한 모두가 피해자였다. 그리고 그걸 다 알면서도 끝까지 숨긴 나는 정말로 비겁한 새끼였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팀원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눈을 꾹 감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 말을 끝으로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시선에 보이는 내 손끝이 티가 날 정도로 떨릴 때쯤, 느긋한 음성이 정적을 갈랐다.

    “이거 완전 하태헌한테만 좋은 거 아닌가?”

    천사연이 턱을 괸 채로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하태헌도 질세라 무심히 받아쳤다.

    “이럴 때만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군.”

    “책 주인공이라고 한이결한테 온갖 호감과 관심을 다 받았던 걸 생각하면 참… 내 기록이 넘어갔어야 했는데. 평생 쓸 운을 저기에 다 쓴 모양이야.”

    “기록을 그만큼 많이 남겨 놓고도 선택받지 못한 쪽이 운이 없는 거겠지.”

    천사연을 대놓고 비웃은 하태헌이 팔짱을 낀 채로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한이결.”

    “…….”

    “저번에 얘기하지 않았던가? 할 수만 있다면 천사연이 했듯이 내 과거의 책도 보여 주고 싶다고.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

    자책으로 움츠러든 나를 달래 주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책이 널 살렸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되는군.”

    하태헌이 진심 어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그제야 나를 제외한 모두가 옅게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과 직후에 느꼈던 경직된 침묵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 사실에 긴장으로 바싹 굳었던 어깨가 천천히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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