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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61화 (360/394)

361화

91. 이해

그렇게 나와 하태헌은 겨우 화해하게 됐다.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태헌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갇혀서 줄곧 무서웠으니까. 이번 일로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됐다.

이제 ‘어비스’ 책에 대한 진실을 설명해 주고 레퀴엠으로 돌아가 날이 밝는 대로 팀원들에게 알려 주면 되는데…….

“흐… 아, 읏, 잠깐…….”

아무리 숨을 헐떡거리며 하태헌을 불러 봐도 그는 봐주지 않았다.

“헉, 자, 잠깐… 잠깐만요, 하… 태헌 씨.”

내 입술을 깨물고, 타액을 거리낌 없이 받아 마시고, 커다란 혀로 내 입 안을 자꾸만 간지럽혔다.

‘키스가 안 끝나…!’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물론 키스 자체도 예상외였지만… 그래도 키스는 그간 천사연이나 김우진과 몇 번 했었고, 하태헌과 스킨십도 처음이 아니었으니 좀 놀라긴 했어도 나름 받아들일 만했는데.

‘벌써 20분도 더 넘게 한 거 같은데, 그만 좀!’

이렇게까지 오래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참다 참다 짜증을 담아서 하태헌의 가슴팍을 밀어 봐도 역시나 미동도 없었다. 환장하겠다.

추읍, 춥, 질척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성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처럼 끊임없이 키스를 해 오는 하태헌을 힘겹게 받아 주던 나는 이윽고 허리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반사적으로 허리를 흠칫 세웠다.

뜨거운 손바닥이 허리를 감싸 왔다. 치료하고 나서 바로 얘기를 나누느라 여전히 상의를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적나라하게 닿아 오는 체온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태헌 씨?”

허리에 닿은 커다란 손이 슬슬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하태헌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움직임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경악하며 눈을 번쩍 뜨자 키스하느라 코앞에 있는 하태헌의 멋들어진 얼굴이 한가득 보였다. 그중에서도 나를 정확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대체 왜…….’

며칠 굶은 사람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거지?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하태헌의 얼굴에 넋이 절로 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손은 여전히 허리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자꾸만 가슴을 향해 올라오는 손과 갈급하게 입을 맞춰 오는 하태헌 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윽, 읏…….”

내가 키스에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자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하태헌이 아랫입술을 제법 아프게 물어 왔다. 아릿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니 이번에는 달래듯이 깨문 입술을 부드럽게 핥아 왔다.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키스는 계속 이어져서 숨이 막혔고, 허리 부근을 느긋하게 쓸어 만지는 손길에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가서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이러다간 내가 미치고 말 거다. 하태헌을 뿌리치고 도망쳐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열심히 버둥거려 봐도 하태헌에겐 별 타격이 없는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SS급 같으니라고.

“으… 좀!”

결국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진심을 담아 짧게 타박하자 그제야 하태헌이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하태헌의 이마에 강하게 처박혔다.

피이익! 피이이익!

“여우?”

날아온 게 뭔지 알아보기도 전에 너무나도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며 안겨 오는 여우를 무심코 안아 줬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피익! 픽!

여우가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서 그런지, 녀석이 온 힘을 다해 들이박았던 하태헌의 이마에 붉은색 흔적이 남았다.

서럽게 울어 대는 여우를 하태헌이 싸늘하게 노려봤다. 여우에게 두 번이나 방해받은 하태헌은 기분이 몹시 상한 듯했다.

“…….”

하태헌이 눈가를 있는 대로 찌푸리고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서 의심을 읽어 낸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데려온 거 아닙니다! 분명 방에 두고 나왔는데 왜 여기 있는 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의심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 건 맞았지만, 정말로 여우를 데려온 적 없었기에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설마 방에서 출발했을 때부터 몰래 따라온 건가?’

여우는 엘로힘과 엘라하의 힘이 깃든 존재라서 기운을 느끼기 힘들고, 투명화도 가능했기에 따라온다 해도 알아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여우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고.

여우를 들어 올려서 살펴보자 녀석이 눈을 길게 접으며 귀를 바싹 낮췄다. 자신은 잘못한 거 하나 없다는 듯이 애처롭게 울음소리를 흘리는 모습에 혼내기 어려웠다.

“하… 옷 준비해 줄 테니 기다려라.”

하태헌도 마찬가지인지 여우에게 한 소리 하는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는 하태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가 사라지자마자 여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잘했어.”

피익.

진심을 담아서 칭찬해 주자 여우가 그럴 줄 알았다는 기색으로 짧게 울었다.

***

하태헌과 대화를 나누고 레퀴엠 길드로 돌아가려고 했던 내 계획은 정체불명의 공격을 받은 탓에 하태헌의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출발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예전처럼 하태헌이 준비해 둔 파자마를 입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하태헌이 차려 준 아침을 먹은 뒤 차를 얻어타 레퀴엠으로 돌아오자 시간은 오전 10시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결 씨,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

“위험하니까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몰래 밖을 나가요? 그것도 한밤중에? 이결 씨가 무슨 사춘기 청소년이에요?”

“…….”

난 하태헌의 호출을 받고 모여든 팀원들에게 아주 제대로 혼나는 중이다.

굳은 얼굴로 나를 혼내는 민아린의 모습에 고개를 숙인 채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설마 하태헌이 밤에 있었던 일을 팀원들에게 일러바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몇 시쯤에 집에 도착했고, 상처 부위는 어디이며, 얼마만큼 다쳤고, 무기는 뭐로 추정되는지 아주 상세하게 알려 준 하태헌 덕분에 난 23층 방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대기 중이던 팀원들에게 그대로 붙잡혔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지난 새벽에 나한테 달려들어서 키스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쉽게 배신을 할 수가 있냐는 말이다. 나를 팀원들에게 집어 던진 당사자는 유유자적 커피 잔을 기울이고 있어서 더 어이가 없었다.

“23층 방에 창문을 다 없애 버리든가 해야겠군.”

“창문을 없애고 대신 유리 벽을 설치하는 방향이 좋아 보입니다. 방탄유리 아이템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를 알아보겠습니다.”

상심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은 천사연이 중얼거리자 우서혁이 거들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박건호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오, 우서혁 비서. 아이디어 좋은데?”

좋기는 개뿔이.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팀원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내 자유를 억압하려고 했다. 물론 밤중에 밖을 나간 건 내 잘못이 맞았지만 이건 과분한 처사였다.

반박하려고 고개를 든 나는 잔뜩 서글픈 기색으로 내 곁에 앉아 있는 김우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

물기에 젖어 그렁그렁한 고동색 눈동자를 보자 반박이 목구멍 너머로 쑥 들어갔다. 내가 혼자 나갔다가 공격받았다는 소식에 적잖이 놀랐는지 김우진의 안색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아무래도 따지는 건 천사연이나 하태헌에게 따로 시간을 내서 해야겠다. 최소한 김우진이 없을 때 해야지.

“자, 다 됐어요.”

상처가 깊지 않은 데다 하태헌이 새벽에 한 번 처치해 준 덕분인지 치료는 금방 끝났다. 민아린의 능력으로 흔적 없이 깔끔해진 어깨와 얼굴 상태를 확인한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또 이렇게 다쳐 오면 그때는 혼나는 거로 안 끝낼 거예요.”

“예에…….”

“형, 자꾸 경호원 없이 나가서 다쳐 오면 어떡해요. 저 난감해 죽겠어요.”

“미안…….”

엄하게 한마디 더 하는 민아린의 옆에서 권정한이 말을 얹었다. 평소에는 친절한 두 사람이 강하게 나오니까 식은땀만 흘렀다.

“세현아.”

민아린과 권정한에게 붙잡혀서 쩔쩔매는 내 뒤에서 여우와 대화를 하던 엘로힘이 나를 불렀다. 엘로힘도 다른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23층 방에 찾아온 손님이었다.

“네?”

벗어날 기회에 옷을 추스르며 엘로힘 곁으로 냉큼 다가가자 뒤통수에서 찌를 듯이 노려보는 민아린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여우가 하는 얘기를 좀 들어봤는데.”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낸 엘로힘의 옆에는 식탁에 앉아 있는 여우가 있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여우는 나를 향해 양 앞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리광을 부리는 녀석을 안아 주며 엘로힘의 설명을 들었다.

“끝까지 따라갈 작정은 아니었다고 하는구나.”

“예? 그럼요?”

피이익! 피익!

여우가 안긴 채로 앞발을 휘둘러서 내 턱을 후려쳤다. 아야.

“처음에는 걱정돼서 조금만 따라갔는데, 제대로 가는지 지켜보는 와중에 네가 공격받아 버려서.”

“아.”

“그다음부터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계속 따라간 모양이다. 근데 네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봐 버린 게 하필…….”

“거, 기까지만 말씀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엘로힘의 말을 재빨리 막았다. 여우가 봐 버렸다는 장면이 뭔지 굳이 듣지 않아도 너무 잘 알았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하태헌과 키스했다는 걸 엘로힘이 말했다간 또 무슨 개판이 날지 불 보듯 뻔했다. 엘로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짙은 미소를 지었다.

픽! 피익!

여우가 아직 화가 안 풀렸는지 씩씩거리며 솜방망이로 내 얼굴을 때렸다. 여우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한밤중에 밖으로 나간 내가 공격받아서 놀란 마음에 하태헌의 집까지 따라왔다는 건가.

하태헌한테 혼나고, 팀원들한테 혼나고, 이젠 여우한테도 혼났다. 하태헌이랑 화해 한번 해 보려고 나갔다가 몇 명한테 혼나는 건지 모르겠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으니 슬슬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구나.”

중요한 이야기. 팀원들에게 ‘어비스’에 관한 설명을 해 주고 앞으로 신도단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다 같이 대화를 나눠 봐야 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기 위해서 모두 모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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