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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59화 (359/394)

359화

광화문 사건으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에 우리는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서 방에 모였다. 거기서 나는 정신을 잃은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꾼 꿈이 다 보였다고?’

생각해 보면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거울처럼 생긴 아이템이 망가져 있긴 했었지. 그게 내 머릿속과 연결되어 있던 미러 아이템일 거다.

사마엘이 넘겨준 액체를 마시고 정신을 잃고서 어떤 꿈을 꿨는지 기억에 선명했다. 연선우에게 ‘어비스’ 책을 선물 받고 처음 읽었던… 아주 오래된 과거의 기억이었다.

중간에 사마엘이 정신 지배 능력으로 간섭하면서 생긴 차이가 조금 있긴 해도 실제 기억과 큰 차이는 없었다.

“음, 거울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현장에 있는 사람 중에서도 몇 명만 봤을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이결 씨.”

걱정이 담긴 민아린의 위로에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과 달리 감정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처럼 복잡하게 뒤엉켰다.

하필 보여도 그런 장면을 보이다니. 들키고 싶지 않아서 숨겼던 진실을 모조리 들켜 버렸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을 향해 쓰게 미소 지었다.

‘어비스’ 책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내 실제 모습이 권세현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같이 설명했어야 하는데 무서워서 일부러 숨겼다.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즐겼던 소설책이 팀원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과거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어비스’ 책의 정체를 쉽사리 입에 올릴 수 없었다.

특히 어비스에서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하태헌과 천사연에게는 더더욱 면목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팀원들이 그 책에 대해서 앞으로도 계속 모르기를 바랐지만… 결국 최악의 형태로 들켜 버렸다.

“혹시… 하태헌 씨와 먼저 얘기를 나눈 후에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맞잡고 있는 손이 긴장으로 바싹 굳었다. 차마 앞에 앉아 있는 팀원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예전에 약속해 둔 게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전 상관없어요.”

민아린이 괘념치 말라는 목소리로 말하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민아린에 이어서 박건호도 말문을 열었다.

“나도 상관없다만… 한이결, 괜찮은 거 맞나?”

“예?”

“하태헌 부마스터와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던데.”

날카로운 질문에 바늘이 배 속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따끔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착잡한 기분을 억지로 외면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하태헌 씨도 혼란스러울 테니 시간이 좀 필요하겠죠. 괜찮을 겁니다.”

***

그렇게 닷새가 지나갔다.

팀원들을 향해 당당하게 괜찮을 거라고 말했던 게 무색하게도 하태헌은 그 뒤로 일주일간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전화를 걸면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왔고, 메시지는 읽지 않았다. 공개적인 일정은 모두 이주하가 처리하고 비공식 일정은 하태헌이 처리하는지 뉴스나 기사를 찾아봐도 하태헌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 내 연락이라면 해외에 나가도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 주고 최대한 곁을 비우려 하지 않던 하태헌이었는데. 단순히 바빠서 그런 거라고 넘기기에는 직전에 있었던 상황 때문에 너무나도 찝찝했다.

‘이렇게 계속 기다려도 되는 건가?’

하태헌과 내 사이가 감정적으로 어긋난 상태라는 건 확실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내가 억지로 숨기다가 터진 일이라 더 미안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만나서 얼굴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연락조차 닿질 않으니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번에 김우진과 겪었던 일로 화해할 시기를 놓치면 얼마나 후회하게 되는지 경험하지 않았던가. 하태헌의 언제 보내 줄지 모르는 연락만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그냥 내가 먼저 찾아갈까?’

하태헌의 집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집까지 찾아온 사람을 문전 박대하진 않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하태헌의 가차 없는 면을 떠올리고 이마를 긁적였다. 흠, 문전 박대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닐지도…….

베란다 창문을 통해 밤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야겠다고 결심이 들었으니 고민할 시간에 출발하는 게 훨씬 나았다. 문전 박대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도는 해 봐야겠지.

“여우.”

피익?

테이블에 드러누워서 TV를 시청하던 여우가 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간이라 방에는 나와 여우 둘뿐이었다. 하태헌의 집이 그리 멀지는 않았으니 아마 3시간 정도면 만나고 돌아올 수 있겠지.

“잠깐 밖에 나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졸리면 먼저 자고.”

새하얀 털로 덮인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하자 여우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피익! 피익!

꼬리 끝을 살랑거리며 옷에 매달리는 꼴이 딱 봐도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모양새였다. 평소라면 데려가겠지만, 이번에는 하태헌과 진지한 대화를 할 예정이었으니 여우를 단호하게 떼어 냈다.

“안 돼. 오늘은 방 지키고 있어. 금방 갔다 올 테니까.”

피이익!

“씁, 안 된다고 했어.”

안아 달라고 달라붙는 여우의 목덜미를 쥐고 억지로 밀어 냈다. 여우는 내가 이렇게까지 거절할 줄 몰랐는지 충격을 받은 기색으로 테이블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았다.

우우, 낮게 울음소리를 흘리는 여우에게서 등을 돌려 베란다 문을 열었다. 차게 불어오는 밤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을 느끼며 여우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미안. 금방 돌아올게. 쉬고 있어. 알겠지?”

여우가 대답 없이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내 얼굴을 노려보는 원망 어린 시선에 어색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태헌이랑 화해하려다가 이젠 여우가 삐치게 생겼군. 될 수 있는 한 빨리 갔다 와야겠다.

바람을 끌어 올려 밖으로 날아올랐다. 발아래에 펼쳐진 강남 거리는 늦은 시간에도 건물 불빛과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주변에 들키지 않도록 고도를 높인 이후에 하태헌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빠른 속도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마구 나부꼈다. 이 정도 속도면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좀 춥네.’

초겨울인 데다 밤바람을 계속 맞고 있으니 외투를 걸쳐도 꽤 추웠다. 어깨가 절로 부르르 떨려 왔지만 그렇다고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늦을 대로 늦은 시간이었다. 문제를 일으킨 상대가 한밤중에 찾아와서 대화하자고 하면 하태헌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해야 했다.

‘자고 있으면 어떡하지?’

SS급이니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충분히 깨겠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면 바빠서 여태껏 로헌 길드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헛걸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쉬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동시에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팍 번졌다.

“……?”

막힘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몸이 한순간에 멈췄다. 나는 당황하며 욱신거리는 왼쪽 어깨를 붙잡았다. 뜨끈하고 질척한 게 손바닥에 가득 묻으며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무언가가 내게 공격을 가해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데다 상상치 못한 공격이라서 현실을 곧장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게 무슨…….”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소름이 확 끼쳤다. 본능에 따라 몸을 비틀자마자 이번에는 볼에 통증이 퍼지며 축축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총? 아니다, 스치듯 본 건 그보다 더 길고 날카로웠다. 활? 석궁? 뭐가 됐든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있고,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지금은 당장 몸을 피해야 했다.

상황 파악을 끝낸 나는 우선 고도부터 높였다. 그 와중에도 나를 노리고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다리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주변이 구름에 가려질 정도로 올라오고 나서야 공격이 그쳤다. 아무래도 높은 건물 옥상에서 공격해 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고도를 낮출 수 없었다.

이미 하태헌의 집 근처까지 와 버린 탓에 레퀴엠 길드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지나치게 높은 고도에 숨쉬기가 불편하고 기온도 아까보다 훨씬 더 낮아졌다. 거기에 피로 잔뜩 젖은 왼쪽 어깨에서 밀려오는 통증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입술을 깨물고 어떻게든 하태헌의 집까지 날아간 다음에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혹시 또 공격이 날아오면 즉시 도망칠 수 있게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하태헌의 집 테라스로 내려왔다.

테라스 창문으로 보이는 집 안은 모든 불이 꺼져서 굉장히 어두웠다.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붙여 봐도 제대로 보이는 게 없어서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이 안 됐다.

한밤중에 남의 집 테라스에 홀로 서 있게 된 나는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붙잡은 채로 갈등했다.

어쩌지? 창문이라도 두드려 봐야 하나? 침실에서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소리가 들릴까? 아니, 하태헌이 집에 있기는 한 건가? 무엇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 결정을 쉽사리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피가 묻지 않은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

하지만 창문을 두드리기 직전, 집 안에서 검은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미처 상황 파악하기도 전에 쿵쿵 발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검은 인영이 테라스 창문을 단숨에 열어젖혔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한걸음 거리에 마주 선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본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하태헌 씨…….”

“…….”

미간을 강하게 찌푸린 하태헌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빗겨 가 왼쪽 어깨로 향했다. 곧이어 오싹한 감각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하태헌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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