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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55화 (355/394)
  • 355화

    이용할 대상을 바로 찾아낸 사마엘이 상체를 숙여 한이결의 귓가에 속삭였다.

    『로헌 길드의 SS급 부마스터?』

    정신 지배 능력이 깃든 사마엘의 말을 듣자 한이결의 꾹 감긴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거울에서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로헌 길드의 SS급 부마스터?]

    [부마스터? 하태헌은 부마스터 아니던데. 혹시 뒤 권에서는 부마스터 되냐?]

    “흐음…….”

    예상과 다른 대답에 사마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곧이어 천사연 옆에 서 있는 하태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하태헌 부마스터는 지금 미러 아이템에 보이는 장면이 뭔지 알고 있나?”

    “…….”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걸어오는 사마엘의 행동에 하태헌이 미간을 좁혔다.

    불쾌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하태헌을 보란 듯이 비웃은 사마엘이 한이결의 귓가에 재차 속삭였다.

    『그 책에 천사연도 나오는지 궁금하네.』

    금발 머리를 한 남자가 사마엘과 비슷한 질문을 꺼냈다.

    [천사연 나와요? 레퀴엠 마스터.]

    [걔가 라이벌 아니야? 초반부터 나오던데.]

    『SS급이 확실하고?』

    [천사연도 SS급이고?]

    [그래.]

    일이 참 재미있게 굴러가네. 가면 속에서 사마엘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한이결이 봤다는 소설책에서 천사연과 하태헌이 등장한다. 아직 모든 것을 다 파악하진 못했지만, 저 소설책 내용이 사실이라면…….

    “저 책이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해 준 것 같네요.”

    그가 떠올린 생각을 아자젤이 그대로 얘기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흥미로운 전개에 사마엘은 즐거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더불어 정신을 잃은 채로 잠들어 있는 한이결에게 더욱 관심이 갔다. 예전에 납치했을 때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런 비밀까지 숨기고 있을 줄이야. 진심으로 탐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한이결은 이쪽 세계의 사람이 아닌 모양이야. 게이트를 통해서 이곳으로 넘어온 몬스터와 비슷하겠군.”

    “몬스터만이 아니라 사람도 가능한 거였군요.”

    “넘어온 사람은 한이결이 최초다. 닥터가 살아 있었으면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직접 알아봤을 텐데.”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찬 사마엘이 정보를 더 얻어 내기 위해 다시 한이결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소설에 한이결도 나오나?』

    [그럼 한이결은요?]

    [……뭐?]

    『한이결은 누구지?』

    [한이결은 누구예요?]

    금발 남자가 사마엘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이번에도 당연히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여기던 그때였다.

    지이잉!

    공중에 떠 있던 미러 아이템에서 귀를 찌르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소음뿐만 아니라 거울 표면에도 파문이 일며 영상이 잘게 흔들렸다.

    “아자젤, 아이템이 왜 저러는 거지?”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자젤도 드물게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한이결의 머릿속과 연결된 미러 아이템은 아자젤이 오랫동안 공들인 회심의 역작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한이결의 정체가 모호한 만큼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한 건데, 아이템이 갑자기 이런 불안정한 상태가 될 줄이야. 하지만 아자젤이 아이템을 살펴보기 전에 거울 표면에 비친 장면이 변했다.

    새까만 색으로 물들었던 거울에 새로운 장면이 나타났다. 금발의 남자가 사라지고 테이블 위에는 ‘Abyss’라고 적힌 책이 여러 권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스스로 상황을 바꿔 버린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평범한 A급이라면 불가능해요. 하지만…….”

    아자젤이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의미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이결, 그는 A급면서 SS급인 사마엘의 감정 지배 능력이 통하지 않는 특이한 존재였다. 그걸 고려하면 이런 변수를 보여 주는 게 마냥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제법 나빠졌는데.”

    사마엘이 미간을 찌푸린 동시에 천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마엘의 손아귀에 한이결이 잡혀간 이후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천사연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뭐 문제라도 생겼나 보지?”

    “…….”

    마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을 다 예상했다는 듯한 어투였다. 가면 틈으로 드러난 사마엘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명백하게 우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사연이 보이는 저 자신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속이 뒤틀리는 감각을 느끼며 사마엘 또한 천사연을 비웃었다.

    “천사연 마스터는 한이결 능력자를 별로 걱정하질 않네?”

    사마엘의 장갑 낀 손이 한이결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는 일부러 한이결의 목과 얼굴을 매만지며 이어 말했다.

    “그러다가 내가 수틀려서 이 목을 부러뜨리면 어쩌려고? 구하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는 처지에 뭘 믿는 거지?”

    천사연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회색빛 하늘 저편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피가 마르는 불안감을 힘겹게 감추며 천사연이 대답했다.

    “한이결을 믿어.”

    “뭐?”

    “천제헌, 너는 그 사람을 절대로 발밑에 둘 수 없을 거다.”

    확신에 가득 찬 단호한 음성이었다. 흔들림 없는 모습에 사마엘이 눈썹을 치켜세운 그 순간이었다.

    [형님.]

    거울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마엘이 천사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지금은 저런 도발에 넘어갈 필요 없었다. 정말 아이템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라면 연결이 끊기기 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내야 했다.

    ***

    툭, 투둑.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가슴을 어지럽혔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은 방 안은 손끝이 절로 떨릴 정도로 한기가 감돌았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홀로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무거운 얼굴을 들었다. 테이블에 순서대로 쌓여 있는 책이 시야에 들어왔다.

    “…….”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가장 위에 올려진 책의 겉표지를 쓸어 만졌다. 연선우와 함께 처음 책장에서 꺼내 들었던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 사실이 명치를 아프게 찔러 왔다. 순식간에 눈가가 뜨거워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한참을 앉아서 책을 바라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형님.”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고동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사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형님 핸드폰으로 전화했는데 받지를 않으셔서… 제게 따로 전달이 왔습니다.”

    고동주의 보고에 아주 조금이지만 정신이 돌아왔다.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래.”

    “운전해 드릴까요?”

    “됐어, 내가 알아서 갈게. 오늘은 가게 일찍 접자.”

    느슨하게 풀었던 넥타이를 깔끔하게 맸다. 목을 옥죄는 감각에 숨이 절로 막혀 왔다.

    “저, 형님.”

    소파 등받이에 걸쳐 놨던 정장 재킷을 입는 내게 고동주가 물어 왔다.

    “괜찮으십니까?”

    “…….”

    아무렇지 않은 척 간단히 넘기려고 했지만 몸이 절로 멈췄다. 잠시 텀을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미안한데 먼저 퇴근할게. 가게 뒷정리 좀 부탁해.”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를 응시하는 고동주의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방을 나가기도 전에 등 뒤에서 고동주의 부름이 다시 들려왔다.

    “형님.”

    “왜.”

    “형님 성함이 한이결 맞습니까?”

    “뭐?”

    예상치 못한 질문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고동주가 입을 열었다.

    “테이블에 놓인 책에 한이결이 나옵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 몰래 읽기라도 했어?”

    묘한 기시감이 나와 고동주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내가 아는 고동주일 텐데, 굉장히 낯선 분위기가 풍겼다.

    “형님 이름이 뭡니까?”

    기분 탓인가? 아니, 기분 탓이 맞나? 나는 의심스러운 와중에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대답했다.

    “난… 내 이름은… 한이결이 아니야.”

    “그럼 뭡니까?”

    “고동주, 정신 차려.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뒷걸음질 치는 내 손목을 고동주가 강하게 붙잡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고동주는 마네킹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에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저 책을 준 사람은 누굽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이 손 놔라.”

    “책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까? 형님에게 저 책을 준 남자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책을 준 남자? 그 아이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고동주의 어깨 너머로 테이블에 놓여 있는 책이 눈에 박혀 들었다. 다정한 속삭임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제가 선물해 주는 책이 처음인 거니까… 그래서 좋아요.

    책의 정체? 내게 책을 준 남자에 대한 설명?

    대체 내가 그걸 왜 입에 올려야 한단 말인가. 난 지금 연선우의 이름조차도 함부로 꺼낼 수 없는데. 이런 내 심정을 고동주가 모를 리가 없다.

    그걸 깨닫자 분노가 울컥 치솟았다. 고동주에게 벗어나려던 나는 반대로 녀석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너 뭐야.”

    현실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주변의 모든 것들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내게 붙잡힌 고동주의 이목구비가 뭉개지면서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목구비가 사라진 고동주는 정말로 마네킹 같았다. 나는 그제야 여기가 현실이 아닌 꿈속이고, 누군가가 꿈을 조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도단, 이 개새끼들이…….’

    이젠 고동주 같지도 않은 상대의 멱살을 붙잡은 채로 바닥에 내던졌다. 상대는 곧 주변 물건과 마찬가지로 파스스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내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꿈이 깨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억누르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권세현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진짜 현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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