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54화 (354/394)

354화

“그래서 또 뭔데?”

일부러 마주 웃어 주며 묻자 연선우가 신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저번에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요.”

“나 그거 놀러 간 거 아닌데.”

“아무튼요! 그때 봤던 소설책 있잖아요.”

소설책? 녀석의 말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책 하나가 떠올랐다. 제목이 어비스…였던가.

“그게 왜.”

“물어보니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책이라고 해서요.”

“…….”

불길한 느낌이 불쑥 치솟았다. 연선우가 방에 들어오면서 소파에 놔뒀던 종이 가방이 갑자기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웃음기가 사라진 나를 두고 연선우는 해맑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형 읽어 보라고 제가 가져왔어요!”

“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두통이 밀려와 이마를 짚자 연선우가 이젠 내 손목을 붙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선물 가져온 사람한테 반응이 너무한 거 아니에요?”

“멋대로 가져와 놓고 반기길 바라는 게 더 너무한 거 아니냐?”

타박하면서도 혹시나 연선우가 정말로 서운해할까 싶어, 잡아끄는 손길을 따라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선우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자 그가 종이 가방에 들어 있는 소설책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검은색 표지의 그 책이었다.

“이런 거 안 읽는다고 했던 내 말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한 페이지밖에 안 봤잖아요.”

연선우가 저번처럼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오며 소설책 1권을 내밀었다.

“딱 한 권만 읽어 주면 안 돼요? 제가 주는 선물이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주는 거니까 받아 달라는 뜻이 담긴 연선우의 대답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내가 연선우한테 유독 약하다는 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눈치 빠른 연선우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이런 투정도 부리는 거겠지.

‘결국 받아 주는 나도 문제지만.’

연선우가 영악하게 굴 때마다 한숨이 나오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권 읽고도 재미없으면.”

“그러면 더 조르지 않고 포기할게요. 진짜로.”

“흠.”

“형니임…….”

연선우가 눈썹 끄트머리를 아래로 내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 열렬한 시선에 혀를 차며 책을 받아 들었다.

“소설책 보는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조르냐.”

“이런 거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책을 가져가자 그제야 불쌍한 얼굴을 싹 지운 연선우가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선물해 주는 책이 처음인 거니까… 그래서 좋아요.”

“별게 다 좋다.”

“진심인데요. 형님은 나보다 경험해 본 일이 훨씬 많으니까요.”

“내가 나이가 몇인데. 당연히 너보다 많아야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연선우가 미묘한 표정을 했다. 씁쓸한 감정에 가까운 표정으로 잠시간 눈을 깜빡이던 그가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내게 치대 왔다.

“어리고 귀여운 동생의 부탁인데 쿨하게 좀 들어 달라고요. 1권 다 보고 나서 어땠는지 저한테 감상평 들려주셔야 해요.”

“어쭈, 이젠 숙제도 내 주네.”

어이없는 와중에도 감상평을 바라는 연선우의 모습이 좀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부스스한 노란색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 줬다.

“마음 잡고 책 읽어 본 일이 적기도 하고, 요즘 가게도 바빠서 보려면 시간이 좀 걸려.”

얌전히 내게 머리를 내어 준 연선우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읽어 주기만 하면 다 좋아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하여간 대답 하나는 잘한다니까. 픽 웃으며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봤다.

까슬한 감촉의 검은 표지와 ‘Abyss’라고 적힌 제목. 약간 묵직한 무게가 무척 생소했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된 나는 그 이후로 틈날 때마다 책을 펼쳐서 조금씩 읽어 갔다. 귀찮아서 던져 놓으려다가도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연선우의 눈빛을 생각하면 저절로 책에 손이 갔다.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때는 열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는데, 중반쯤 넘어가자 자연스럽게 내용에 집중이 되면서 페이지가 굉장히 쉽게 넘어갔다. 그 변화가 참 신기했다.

‘재밌…는데?’

게이트나 몬스터 같은 생소한 단어가 많이 나와서 어색한 감은 있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읽다 보니 낯설기만 했던 단어들의 의미와 세계관을 알게 돼서 더 흥미로웠다.

‘멋있네.’

특히 주인공으로 나오는 하태헌이라는 인물이 마음에 들었다. 약자를 지켜 주고, 정의와 신념을 갖고 행동하는 모습이 좋았다.

하태헌 같은 사람에게는 내가 악역이겠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어비스 1권을 덮었다.

한 달은 족히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책 읽기는 의외로 취향에 맞았던 내용 덕분인지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물론 다 읽은 게 아니라 이제 1권만 읽은 거지만. 아무튼 연선우가 내 준 숙제는 1권만이라도 읽는 거였으니까.

“나 숙제 다 했다.”

하루가 멀다고 가게로 출석 도장을 찍는 연선우는 그날 밤에도 나를 찾아왔다.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은 껄렁한 걸음걸이로 들어서는 연선우에게 인사 대신 말하자 녀석이 잠시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설마 책 읽어 본 거예요?”

“읽어 보라며? 1권은 다 읽었다.”

내 앞으로 재빨리 다가온 연선우가 서류 위에 올려진 어비스 1권을 가져갔다.

“정말요?”

“정말이지. 그런 거로 거짓말을 왜 하겠냐.”

“어땠어요? 여전히 별로예요?”

“아니.”

괜히 목덜미를 쓸어 만지다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볼만하던데. 주인공 성격도 마음에 들고.”

머쓱한 대답에 연선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형 마음에 들 거라고 했잖아요. 그럼 제가 내용 물어봐도 돼요?”

“진짜 확인하려고 하네… 물어보든가.”

턱을 괴며 허락을 내리자 책상에 걸터앉은 연선우가 책을 펼쳤다. 장난기가 가득 깃든 얼굴을 하고서 책 페이지를 파라락 넘기며 연선우가 말했다.

“주인공 이름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 하태헌.”

“로헌 길드의 SS급 부마스터?”

“부마스터? 하태헌은 부마스터 아니던데. 혹시 뒤 권에서는 부마스터 되냐?”

이 자식이, 이제는 스포일러까지 하네. 눈가를 찌푸리며 한 소리 하자 연선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천사연 나와요? 레퀴엠 마스터.”

“걔가 라이벌 아니야? 초반부터 나오던데.”

“천사연도 SS급이고?”

“그래.”

그쯤에서 나는 어딘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눈앞에 보이는 연선우는 평소와 같았는데 물어보는 질문은 하나같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뭐지?’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라서 정확한 설명이 어려웠다. 복잡해진 나를 두고 연선우가 이어서 물었다.

“그럼 한이결은요?”

“……뭐?”

“한이결은 누구예요?”

연선우 입에서 나온 이름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황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연선우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져 있었다.

***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짙은 회색빛으로 변했다.

군데군데 피어오르는 연기와 흩날리는 검은 재, 바닥을 가득 적신 붉은 피가 이곳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도 처치하지 못한 몬스터들이 많이 남아 있는지 광화문 곳곳에서 사람의 비명과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졌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정신을 잃은 한이결의 뺨을 툭툭 두들기던 사마엘이 옆에 있는 아자젤에게 말했다.

“이거 제대로 되는 거 맞나?”

“이론상으로는 완벽해요.”

“목소리가 좀 다른데.”

사마엘과 아자젤의 머리 위에 둥근 형태의 커다란 거울이 띄워져 있었다. 거울에는 현실이 아닌 듯한 장면이 영상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역시 이 몸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

거울을 바라보던 사마엘이 앞에 있는 한이결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았다. 강제로 고개가 들린 한이결은 잠이 든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사마엘이 한이결에게 손을 대는 동시에 맞은편에서 살의를 띤 날카로운 기운이 확 터져 나왔다. 피부에 닿아 오는 강한 기운을 느낀 사마엘이 시선을 들었다.

“도무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구나, 동생아.”

사마엘의 조롱에도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는 한이결만을 향해 있었다. 천사연뿐만 아니라 뒤에 서 있는 하태헌과 레퀴엠 길드원들도 똑같았다. 마치 주인 잃은 개새끼들 같았다.

“아니면 한이결이라서 조절을 못 하는 건가?”

사마엘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한이결의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천사연의 검 끝이 살짝 흔들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서늘했다.

거래를 하자는 사마엘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다가간 한이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마시자마자 곧장 기절했다.

칼리와 사마엘의 피가 섞인 액체를 한이결에게 먹인 직후에 한이결의 팔뚝을 베어 내서 피를 뽑아낸다. 그렇게 칼리와 사마엘의 기운이 깃든 한이결의 피는 써먹기 좋게 변한다.

여러 기운이 섞인 한이결의 피를 머릿속의 장면을 그대로 보여 주는 아이템에 융합시켰다. 이제 한이결은 사마엘의 정신 지배를 받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기억을 저 거울을 통해 보여 줄 것이다.

이 모든 게 오로지 한이결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함이었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존재이자 현 시간대에서 가장 거슬리는 인물. 그게 바로 한이결이었으니까.

[제가 선물해 주는 책이 처음인 거니까… 그래서 좋아요.]

[별게 다 좋다.]

[진심인데요. 형님은 나보다 경험해 본 일이 훨씬 많으니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거울에 비친 장면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한이결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해서 보여 주는 터라 한이결 본인의 모습은 나오지 않고 대화하는 상대방의 모습만 보였다.

청재킷을 걸친 금발의 남자. 대화 내용만 봐도 둘이 제법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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