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89. 과거의 편린
나를 꿇어앉힌 사마엘이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새빨간 액체가 담겨 있는 시험관이었다.
그것을 보란 듯이 내 눈앞에 두어 번 흔든 사마엘이 말했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을 테니 설명을 간단하게 하자면, 여기엔 그분의 피가 들어가 있다.”
병이 흔들릴 때마다 안에 담긴 붉은 액체가 기묘한 빛을 품고서 반짝였다.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네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뒷머리를 움켜쥔 사마엘 손에 재차 힘이 들어갔다. 아릿한 고통에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고개를 억지로 들었다.
“손 내밀어.”
마치 선물이라도 주는 것처럼 다정한 음성이었다. 순순히 손을 들자 그가 시험관을 내게 쥐여 줬다.
“스스로 마셔.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조리.”
“…….”
“그럼 저 보석을 모두 넘겨주도록 하지.”
손에 쥐어진 시험관에서 차가운 감촉이 퍼져 나갔다. 등 뒤에서 불어온 차가운 가을바람에 오한이 끼쳤다.
사람의 피를 그대로 뽑아낸 것처럼 선명한 붉은색에 소름이 돋았다. 해로운 효과를 지니고 있을 게 분명한 액체를 제 손으로 마셔야 하는 순간이 오자 오히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갔다.
‘이걸 마시면 지금 상황에서 과연 얼마만큼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사마엘이 이동 아이템을 정말로 넘겨준다면 이런 액체 따위 몇 번이고 마실 수 있었다. 이 액체가 적어도 마시자마자 죽을 독약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나를 그렇게 쉽게 죽일 거였으면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게이트마다 이동 아이템을 설치하고 이런 습격까지 해 가면서 공을 들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액체가 나는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마시고 난 이후 상황은 두려웠다. 과연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순진하게 사마엘이 거래한 대로 이동 아이템을 넘겨줄 거라고 믿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는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나야?”
내가 언제쯤 액체를 마실지 즐겁게 기다리던 사마엘이 질문을 듣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걸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거래 상대에게 이 정도 질문의 답은 해 줄 수 있다고 보는데.”
“글쎄… 별로 끌리는 제안은 아니군.”
“좀 봐주지. 그쪽이 준 이 액체도 반항하지 않고 마셔 준다는데.”
“흠.”
우리가 불리한 입장이라 액체를 마시는 선택지밖에 없었지만, 나는 일부러 뻔뻔하게 미소 지으며 억지를 부렸다.
그런 와중에도 눈앞에 있는 이 미친놈이 내 억지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어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뭐, 좋아.”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사마엘은 불쾌한 기색 없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붙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놓은 사마엘의 손이 이번에는 내 턱을 붙잡았다.
“질문이 뭐였지? 아, 왜 하필 너냐고 했던가?”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가를 살살 쓰다듬어 왔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는 아자젤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을 가리는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매를 성가시다는 것처럼 비튼 아자젤이 얘기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나머지 벌레들은 시간이 반복될 때마다 항상 보이던 놈들인데, 당신만 이번 시간대에 갑자기 끼어든 존재잖아요. 그리고…….”
아자젤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를 잠시간 응시하던 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
“제가 말했을 텐데요? 아예 얻은 게 없진 않다고.”
아자젤이 곧 웃음을 흘렸다. 조롱이 담긴 비웃음이었다.
“고문을 할 때는 상대에게서 볼 수 있는 표정과 몸짓… 그 모든 게 힌트가 되죠. 물론 놀랄 정도로 잘 버텼지만, 입만 다문다고 해서 끝이 아니에요.”
나는 그제야 아자젤이 바라보는 상대가 김우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험관을 쥐고 있는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당신 이름만 나오면 어깨가 아닌 척 굳어 버리더군요. 마치 숨기고 있는 것을 들킬까 봐 겁을 먹은 것처럼.”
“…….”
“때로는 그 어떤 말보다 몸이 확실한 대답이 되어 주기도 하잖아요?”
목 끝까지 치솟은 욕설을 힘겹게 삼켜 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고 가슴속은 분노로 뜨겁게 타올랐다.
아자젤에게 고문받아 사망 직전까지 갔던 김우진의 처참한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이제는 자기 잘못으로 내가 붙잡힌 거라는 죄책감까지 느끼게 될 김우진을 생각하자 뱃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궁금증은 해결됐나?”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으려는지 사마엘이 내 볼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재촉을 해 왔다.
여기서 더 미뤘다간 겨우 얻어 낸 거래도 없어질 위험이 있으니 나는 잠자코 시험관에 꽂혀있는 마개를 열었다.
‘그래도…….’
방금 그 질문을 통해서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김우진을 통해서 내게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맞았지만, 내 능력까지 들통난 건 아니었다. ‘권세현’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 액체를 마시면 상황이 또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이제 와서 도망칠 수도 없으니… 뒤에서 나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는 팀원들을 믿을 수밖에.
“마셔.”
시험관을 조용히 내려다보자 사마엘이 재차 명령을 해 왔다. 나는 천천히 시험관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다 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시험관을 기울여 안에 담긴 차가운 액체를 마셨다.
***
따스한 햇살이 커튼 너머로 들어왔다. 열어 둔 창문 틈으로 불어온 옅은 바람에 살랑거리는 새하얀 커튼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릴 때 누나랑 같이 놀던 방인데, 좀 큰 후로는 쓰지를 않아서 창고가 됐어요.”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 여러 물건이 담긴 상자가 보였다. 그중에서 꺼내 든 스케치북에는 다양한 그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심심하시면 스케치북 말고 차라리 이걸 보세요.”
그러던 와중에 상대가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많은 책 중에서도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던 책이었다.
아무 문양 없이 검은색으로 덮인 책 표지와 ‘Abyss’라는 제목까지, 여러모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책이었다.
“소설책이에요. 한번 읽어 보세요.”
“무슨… 나 이런 거 안 봐.”
“왜요? 꽤 재밌어요. 10년도 더 전부터 이 책장에 꽂혀 있더라고요. 아버지 취향은 아닌데 누가 갖다 둔 건지.”
고개를 젓는 내게 상대방이 끝내 책을 쥐여 줬다. 손끝에 닿아 오는 책 표지의 까칠한 감촉이 영 낯설었다.
“안 읽는다고.”
“어차피 제가 사진 찾을 때까지 할 일도 없잖아요.”
“나도 같이 찾을 건데 할 일이 없긴 왜 없어.”
“누나 스케치북이나 몰래 구경했으면서… 그런 스케치북보다 이게 훨씬 더 재밌을걸요?”
상대가 내 곁에 바싹 몸을 붙이며 책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방 불빛에 비친 화사한 금발이 유독 눈부셨다.
상대의 이름을 떠올린 나는 그 이름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자꾸 까불지, 연선우.”
“맨날 뭐만 하면 까분대.”
기어코 내게 한 소리를 들은 연선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이러다가 진짜 삐지겠다 싶어서 나는 봐주는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소설책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다니까…….”
“지금 저랑 같이 처음 보면 되잖아요. 오히려 좋은데요?”
얼씨구, 별게 다 좋네.
헛웃음을 지으며 첫 장에 써진 글을 설렁설렁 읽어 내렸다.
“하태헌… 이게 이름이야?”
“네. 주인공이 하태헌이고, 다른 애들도 많이 나와요. 형, 진짜 이런 거 읽어 본 적 없어요?”
“이런 게 뭔데.”
“판타지 소설이요. 이건 여자가 조금 많이 나오긴 하는데…….”
여자가 많이 나온다고? 나는 의심을 담아 연선우를 바라봤다.
“역시 이거 이상한 책이지?”
뭐, 한창때의 남자애니까 그런 걸 봐도 이해는 한다만… 영상이나 그림도 아니고 그런 글을 읽는 건 살짝 한심해 보였다.
내 눈빛에서 한심해하는 티가 났는지 연선우가 뺨을 붉히며 발끈했다.
“아니에요!”
“적당히 봐. 그러다 뼈 삭는다.”
“아, 형님!”
그 격한 반응이 귀여워서 일부러 한마디 더 하자 연선우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적당히 쉬었으니 이제 사진을 찾아볼 시간이었다. 책을 덮으며 몸을 일으키자 연선우도 따라 일어서면서 입을 열었다.
“진짜 그런 소설 아니거든요? 제대로 봐 봐요! 아니면 나랑 내기하던가. 이상한 소설이면 내가 장을 지질게요.”
“장을 지지는 게 무슨 뜻인지 알긴 하냐? 얘가 무서운 걸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네.”
책 모서리로 연선우의 머리를 가볍게 때리자 녀석이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가리며 잔뜩 억울한 눈을 했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어이가 없다.
들고 있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내 손을 떠나간 검은 책이 책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
“본사에서 내려온 전달 서류입니다. 확인하시고 작성해서 일주일 내로 올리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 어제 본사 분위기는 어땠지?”
“나쁘지 않긴 한데요… 처음 보는 얼굴들이 좀 보였습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동주가 찝찝한 표정으로 말해 왔다. 새로운 얼굴들이라… 며칠 전에 마주한 유시혁의 기분 상태를 가늠해 보던 나는 이어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형님, 바빠요?”
들어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연선우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노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미소 가득한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망할 놈이… 이젠 지 마음대로 막 들어오네? 야, 인마! 여기가 네 안방이야?”
가만히 있는 나를 대신해서 고동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동주가 자신을 혼내거나 말거나 실실 웃으며 안으로 들어온 연선우가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소파에 내려놨다.
“귀 떨어지겠어요. 조용히 말해도 다 들리는데.”
“뭐? 이, 이 새끼가…….”
“됐어. 고동주 이만 나가 봐.”
고동주가 백날 잔소리해 봤자 연선우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걸 알기에 둘의 대화를 적당히 끊어 냈다.
“아이고, 시벌. 혈압 올라.”
고동주가 목까지 붉게 물들이고선 목덜미를 부여잡고 나갔다.
철컥, 쾅! 문을 거칠게 닫으며 고동주가 나가자마자 연선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로 걸어왔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눈꼬리까지 접어 가며 웃는 모습에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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