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각자 위치 브리핑 부탁드립니다.]
[저 막 도착했어요! 광화문역 2번 출구 앞이고, 구급 인력은 여기 다 모여 있어요. 저는 여기서 부상자들 도운 다음에 이동하겠습니다.]
[특수작전부 현재 세종 문화 회관 뒤쪽입니다. 파악된 몬스터 현재 15마리. 로헌 길드 지원팀도 이곳에 있습니다.]
[피해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시민들은 이미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물리지원팀.]
[물리지원팀, 현재 위치 일민 미술관 골목입니다. 파악된 몬스터 숫자는 5마리. 정리 끝나 가는 중입니다.]
[마스터, 독기 액체가 퍼지고 있습니다! 위치는 동상 앞과 북쪽!]
[북쪽은 우서혁 비서가 가도록. 동상 쪽은…….]
“제가 갈게요.”
이어 피스에서 들려오는 천사연의 말에 대답하며 바람의 강도를 올렸다. 높다란 건물들 위로 빠져나오자 맞은편에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가 나타났다.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속도를 높여 동상 앞으로 날아갔다. 박건호가 알려 준 대로 동상 앞에는 박쥐처럼 생긴 검은 몬스터가 퍼덕거리며 질척한 검은 액체를 쏟아 내고 있었다.
“으, 아아악!”
새하얗게 질린 채로 도망가던 남자 한 명이 내가 미처 능력을 쓰기도 전에 액체에 닿아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무언가가 타는 소리와 함께 속이 매슥거리는 끔찍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혀를 세게 깨물어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죽은 남자 바로 옆에 있던 어린아이의 팔을 급히 낚아채 높이 올라왔다. 방금까지 아이가 서 있던 장소에 검은 연기가 파도처럼 밀려오며 바닥을 태우기 시작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품에 안긴 어린아이도 방금 그 남자처럼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한이결 능력자!”
뒤에서 앨리스가 새하얀 날개를 움직이며 날아왔다. 겁에 질려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아이를 그녀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광화문역 2번 출구로 데려가 주십시오. 여긴 제가 막아 보겠습니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지원팀이 금방 올 테니 괜찮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나만큼이나 여러 곳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건 앨리스뿐이었다. 성인이면 어려웠겠지만, 체구가 작고 가벼운 어린아이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안고 날 수 있겠지. 그걸 아는 앨리스도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아이를 안은 채로 자리를 떠나갔다.
내가 살린 아이를 마지막으로 동상 앞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는 강한 독기가 담긴 액체를 계속해서 뿜어내는 몬스터를 내려다보며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크 하이퍼. 앨리스가 말했던 위험 몬스터 중 하나. 호주 게이트 안에 있어야 할 놈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나타났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형 몬스터도, 지진을 일으키며 땅바닥 아래에 숨어 기어 다니는 몬스터도,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사람을 집어삼키는 몬스터도 모조리 이 근방에선 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후우웅, 앞으로 내민 오른손에서부터 강한 바람이 터져 나왔다. 한이결의 기운이 쉴 틈 없이 흘러나와서 바람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앞으로 나아간 바람이 다크 하이퍼 열 마리의 몸에 휘감겼다. 그 상태로 손목을 돌리자 바람이 수십의 칼날이 되어서 다크 하이퍼의 몸 전체를 찢어발겼다.
키에에엑!
동시에 산산조각 찢긴 다크 하이퍼가 마지막 울음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놈들은 죽을 때조차 몸속에서 독기 액체를 울컥 뿜어내며 주변을 더럽혔다.
보이는 모든 다크 하이퍼를 처리한 나는 이어서 바람을 이용해 넓게 퍼져 있는 액체를 끌어모았다. 사람 수십 명을 죽였을 검은 액체가 허공에 모여 커다란 원 형태를 이뤘다.
“한이결.”
때마침 도착한 천사연이 들고 있는 검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그대로 독기 액체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천사연의 강한 기운과 열기를 버티지 못한 액체가 증발했다.
크르륵, 크륵!
독기 액체를 무사히 없애자마자 하늘을 떠돌던 비행 몬스터 중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날쌔게 하강했다. 액체를 지탱하는 데에 모든 집중력을 쏟고 있던 내가 뒤늦게 몬스터를 발견하고 몸을 비틀어 피하려던 그때였다.
타앙!
“……!”
귀를 울리는 총소리와 함께 내게 입을 쩍 벌렸던 몬스터의 머리가 터지며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총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새까만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걸어오는 이주하와 곁에 서 있는 하태헌이 보였다.
양손에 총을 들고서 큰 보폭으로 천사연에게 걸어온 이주하가 입을 열었다.
“길드 관리 본부에서 출동한 기동대가 광화문 일대를 모조리 통제하고 있어요. 시민들은 어느 정도 대피를 마쳤고, 몬스터 숫자도 빠르게 줄고 있고. 그리고 정찰을 하던 우리 길드원이 이런 걸 발견했는데…….”
이주하가 설명하며 하태헌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가 들고 있던 무언가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나도 천사연 곁으로 내려와 하태헌이 바닥에 던진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주변 곳곳에 설치되어 있더군요.”
“아이템이군.”
루비처럼 보이는 보석이 박혀 있는 물건이었다. 마치 CCTV처럼 벽에 설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생김새였다.
“이게 몬스터들을 불러낸 이동 아이템인가 봅니다.”
신발 끝으로 아이템을 툭 걷어차자 깨져 있던 보석 부분에서 파편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마 처음 아이템을 발견한 로헌 길드원이나 하태헌이 부순 거겠지.
나는 이어 피스 마이크를 켜고 모두에게 이 정보를 전달했다.
“몬스터를 불러내는 아이템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붉은 보석이 달린 주먹만 한 크기의 아이템으로, 아마 벽에 설치됐을 겁니다. 각 팀에 전달해서 발견 즉시 처리하세요.”
[확인했습니다.]
[확인했어.]
[Roger.]
장난스러운 박건호의 대답 직후에 민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태가 위급한 부상자들은 어느 정도 처치가 됐어요. 저도 그쪽으로 이동할게요.]
[저도 바로 가겠습니다.]
굳이 여기로 모일 필요가 있나?
동상 앞에 모여 있던 다크 하이퍼는 내가 모두 처리했으니 다른 곳에 퍼져 있는 몬스터를 마저 찾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다른 의견을 말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낯설면서도 언젠가 느꼈었던 기운이 등을 찔러 왔다. 그 기묘하면서도 오싹한 감각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내가 먼저 뒤를 돌아본 직후에 천사연과 하태헌도 고개를 들고 내 뒤를 바라봤다.
분명히 거리가 굉장히 먼데도 불구하고 바닥을 딛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폐허에서 피어오르는 회색빛 연기와 바람에 흩날리는 재, 바닥 곳곳에 퍼져 있는 붉은 피 사이로 이질적인 하얀 색이 눈에 박혀 왔다.
“저 사람…….”
이주하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일렁이는 연기 틈으로 나타난 가면을 마주하자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들이닥쳤다.
“뒤로 물러서.”
천사연이 나를 등 뒤로 가리며 S급 검 대신에 릴리스의 검을 꺼내 들었다.
“흠, 개판이네. 복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어?”
바닥에 있는 다크 하이퍼의 시체 일부를 구두 끝으로 툭 쳐 낸 남자가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상 앞에 선 남자의 뒤로 연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자와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안녕, 동생. 오랜만이야.”
바람에 하얀 가면 위로 드러난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인사를 들은 천사연이 아무 대답 없이 검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입술을 깨물며 천사연에게 시선을 보냈다. 뒤돌아선 천사연의 상태가 보이지 않아서 더 걱정스러웠다. 저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얼굴이 어떤지 이제는 아니까.
‘설마 사마엘이 직접 올 줄이야…….’
길드 관리 본부를 습격한 이후로 그가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사연의 대답이 없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마엘이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 어때? 나름대로 노력을 좀 들여서 그런가, 평가가 궁금하네.”
“…저번보다 별로네. 감이 좀 죽은 모양이야.”
“저번? 그 저번이 네가 뒤지기 전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지금을 말하는 거야?”
칼리에게 시간을 빼앗긴 천사연의 처지를 비웃은 사마엘이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프라우스 신도단이 케이스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팀원들과 명령을 듣고 온 레퀴엠, 로헌 길드원들이 광장으로 몰려왔다.
“이결 씨!”
“한이결!”
민아린을 선두로 김우진과 박건호, 우서혁, 권정한이 차례로 뛰어왔다. 앨리스까지 함께 온 것을 본 나는 뒤늦게 아차 싶어졌다.
사마엘은 SS급이니 나와 천사연, 하태헌을 제외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정신 지배에 걸릴 수 있었다. 내 개입 능력으로 지배를 끊어 낼 순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사마엘에게 권세현의 모습을 들키게 된다.
“잠깐만요, 여기로 오면……!”
“괜찮아, 한이결.”
급히 사람들을 돌려보내려던 나는 부드럽게 들려오는 말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처음에는 천사연이 말한 줄 알았다.
착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목소리와 자연스럽게 나온 호칭에 목덜미에 소름이 끼쳤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부른 사마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뭘 걱정하는진 알겠는데, 난 별로 그럴 생각이 없거든.”
“……뭐?”
“다 같이 모여서 싸우는 거. 좋잖아? 각자가 준비한 걸 모두 보여 주는 평등한 자리인 셈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는 믿기 어렵게도 진심이 느껴졌다. 당황한 내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신도단이 들고 있던 케이스가 열렸다.
네 개의 케이스가 연달아 열렸다. 검은 케이스 내부에 담겨 있는 것은 붉은색 보석이었다.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던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소리쳤다.
“잠깐……!”
“잘 막아 봐, 한이결.”
케이스에 담겨 있던 붉은 보석이 모조리 공중에 떠올랐다. 새빨간 보석 열 개가 번쩍 빛을 내더니 하늘 위에서 타원형의 입구가 생겨났다.
크르륵, 키에엑! 키엑!
게이트와 아주 흡사하게 생긴 그 입구에서 새로운 몬스터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왔다. 셀 수 없이 많은 비행형 몬스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거대한 체구의 몬스터가 미친 듯이 뛰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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