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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50화 (350/394)

350화

“그렇군요. 정치적인 압박이라…….”

오후에 잡힌 앨리스와의 만남은 정식으로 약속한 회의 일정이 아닌,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느낌으로 진행됐다. 일이 있는 사람은 제외하고 나와 천사연, 우서혁이 참여했다.

“한국은 이럴 때 좀 답답할 수밖에 없겠네요.”

“호주는 다릅니까?”

“호주를 포함한 해외 쪽은 한국과 좀 다르긴 하죠. 한국은 길드부터 능력자 정보까지 모두 국가에서 관리한다고 알고 있어요.”

한국은 보통 능력자로 각성하면 국가에 신분을 등록하고 길드에 들어간다.

그편이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니까. 각성한 이후에도 평범한 직업을 갖거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수가 굉장히 적었다.

“사실 저희도 지금 그리 편하진 않아요.”

한숨을 짧게 내쉰 앨리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길드에서 연락이 왔어요. 일 크게 벌이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오라고… 근데 우리 마스터가 갑자기 저런 얘기를 할 성격은 아니거든요.”

얘기를 잠자코 듣던 천사연이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압박을 가한 길드가 우리만이 아닌 모양이군.”

“한국에 와 있는 제게 직접 얘기한 게 아니라 굳이 길드를 통하다니…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찝찝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나도 앨리스를 따라서 미간을 찌푸렸다.

국내 길드만 건드린 게 아니라 앨리스에게도 압박을 가했다니. 물론 앨리스는 호주에서 온 귀한 손님이나 마찬가지이니 우리와는 차이가 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찝찝한 건 사실이었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천사연이 굳은 표정을 하고서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잠시간 고민하던 그가 곧이어 말문을 열었다.

“한이결 능력자가 말한 대로 과해 보이는군. 길드 관리 본부가 이런 식으로 해외 길드에 직접적으로 눈치를 준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어. 심상치 않은 건 맞아.”

나는 천사연이 무언가 떠올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뭔가 짐작 가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그래. 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제 상황부터 짚고 넘어가도록 하지.”

천사연이 옆에 서 있는 우서혁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가 즉시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켜서 보고를 시작했다.

“어제 강남 거리에서 발견된 몬스터는 프랑스에 있는 E271 구역 게이트와 일본의 후쿠오카현 F12 구역 게이트에 등장하는 돌연변이 지네입니다.”

“네? 무슨, 그럼…….”

“프랑스와 일본에 있는 게이트에서만 등장하는 몬스터가 한국 강남에 등장했습니다.”

우서혁이 내게 태블릿 PC를 넘겼다. 화면에는 어제 마주쳤던 몬스터와 똑같이 생긴 몬스터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고, 옆에는 관련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또한 강남 주변에 있는 게이트에서 폭주나 몬스터가 빠져나온 흔적은 없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우서혁의 브리핑을 듣던 앨리스가 말했다.

“정리하자면, 해외 게이트에서 발견되는 몬스터가 뜬금없이 한국 강남 한복판에 나타났다는 거군요. 그것도 이동 아이템이라도 쓴 것처럼 흔적 하나 없이.”

…이동 아이템?

앨리스의 얘기를 듣던 나는 ‘이동 아이템’ 부분에서 몸을 움찔 떨었다.

불길한 예감이 천천히 밀려왔다. 앨리스가 비유하기 위해서 사용한 ‘이동 아이템’이라는 표현이 머릿속에 강하게 박혔다.

갑자기 나타나서 강남 거리를 습격한 해외 몬스터 수십 마리. 게이트와 몬스터 간에 이어지지 않은 흔적. 게이트에 불법적으로 들어간 뒷거래 정황들….

-의뢰한… 놈들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야.

-트래퍼가… 모여 있는 곳에 아이템을 떨어트리라고…….

프라우스 신도단이 시킨 대로 게이트 안에 들어가 아이템을 떨어트리고 왔다던 남자들의 증언을 떠올린 나는 벼락처럼 내리친 깨달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경악스러운 심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와 눈이 마주친 천사연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쉽사리 믿기 어려운 추측은 조용한 천사연의 태도를 마주하자 빠르게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게… 그게 가능한 겁니까?”

“글쎄. 그 방법 말고는 없긴 해.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다만.”

“네? 무슨 소리예요?”

나와 천사연의 대화를 듣던 앨리스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뒤에 서 있는 우서혁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왜 정신 지배를 써 가면서까지 게이트에 사람을 보낸 건지 알 것 같습니다.”

앨리스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 뒤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게이트 내부에 바깥과 이어지는 이동 아이템을 넣어 둔 것 같습니다.”

“이동 아이템을… 게이트 내부에요?”

“네. 프랑스, 혹은 일본 게이트 내부에 있는 이동 아이템을 통해서 몬스터가 순식간에 강남에 나타난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외 게이트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한국에 아무 흔적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는지 설명이 됩니다.”

“음, 아니… 한이결 능력자, 잠시만요.”

앨리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분위기를 깨서 미안한데, 그만큼 효율이 좋은 이동 아이템은 존재하지 않아요. 프랑스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 아이템을 연결한다니, 이건 말이 안 돼요.”

맞는 말이었다. 거리도 문제였고, 수십 마리나 되는 몬스터를 한 번에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프라우스 신도단은 가능합니다.”

-붉은색의 보석같이 생긴…….

붉은색 보석이라는 건 이동 아이템을 뜻하는 거였다. 이동 아이템을 제작하면서 칼리의 피를 넣은 거겠지.

세계 각지에서 게이트 뒷거래 사건을 벌인 것도 이게 목적이었겠지. 위험한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게이트 안에 이동 아이템을 넣어서 민간인이 많은 장소로 옮긴다. 정말 끔찍한 계획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미술관 사건 아십니까? 프라우스 신도단은 자기들이 직접 제작한 아이템을 사용해서 미술관 전체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장막을 펼쳤습니다.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집단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앨리스도 심각성을 느꼈는지 눈가를 좁혔다.

“솔직히 쉽게 믿긴 어렵지만… 한이결 능력자와 천사연 마스터가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일단은 받아들일게요.”

깔끔하게 다듬어진 앨리스의 눈썹 끝이 아래로 처졌다. 근심을 가득 담은 채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이결 능력자가 말한 게 정말 사실이라 해도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문제가 더 커졌다고 봐야겠네요.”

“예. 게이트 내부에 이동 아이템이 뿌려진 게 맞다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게이트 뒷거래 사건은 벌써 2개월도 더 된 사건이었다. 2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게이트에 이동 아이템을 뿌렸을지, 그리고 그걸 최종적으로 언제 써먹을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응접실 공기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천사연이 말했다.

“현재 프랑스 E271 구역 게이트와 일본 후쿠오카현 F12 구역 게이트에 관계자 외에 사람이 접근한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기록이 확인되면 우리의 추측이 맞겠지. 그다음에 판단을…….”

쿠구궁!

천사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건물이 살짝 흔들렸다. 평소라면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진동이었지만,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던 우리는 그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방금 느끼셨습니까?”

“지진인가요?”

서울 한복판에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바로 밖에 상황을 체크해 보겠…….”

“마스터!”

나처럼 싸한 분위기를 감지한 우서혁이 핸드폰을 꺼내 든 그때였다. 응접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다른 수행원이 급히 보고를 해 왔다.

“로헌에서 지원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등급은 1급 레드, 장소는 광화문입니다!”

“마스터, 제이나 길드에서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

수행원들이 앞다퉈 지원 요청을 외쳤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천사연을 돌아봤다. 차갑게 내려앉은 천사연의 눈동자가 보였다.

***

자동차에서 흘러나온 기름을 타고 생겨난 불이 뜨겁게 타올랐다. 메케한 연기가 흩날리고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진 비명이 정신없이 뒤엉켰다.

“아아악!”

“아, 안 돼, 안 돼!”

귀를 찌르는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비명 중간마다 들려왔다. 쿠웅, 새까만 연기 너머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부딪치고 무너지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빨리 움직여! 눈에 보이는 몬스터부터 처리해!”

“예!”

“움직여, 각자 위치로!”

홍시아의 명령에 길드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홍시아가 자신을 제치고 빠르게 뛰어나가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대체…….’

광화문 광장이 시체와 피로 뒤덮여 지옥처럼 변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몬스터 수십 마리가 눈 깜짝할 새에 일반인들을 덮치고 사냥하기 시작했다.

“마스터, 인근 길드에 지원 요청을 모두 보냈습니다. 금방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래. 상황은?”

광화문 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제이나가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수습하기 위해 도착한 참이었다.

홍시아의 물음에 김나율이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지 않아요. 비행형 몬스터의 숫자도 많고, 저번 지네 몬스터처럼 바닥에 숨은 놈들도 있어요. 그리고 독 연기까지 퍼져서…….”

“끄아아악!”

“트, 트랩이…! 다들 바닥 조심해, 트랩이 깔려 있어!”

근처에 있던 길드원의 외침이 김나율의 말을 중간에 끊어 냈다. 사람들을 구하기는커녕, 길드원들도 고전하는 모습에 홍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트랩을 설치하는 몬스터까지 있다고?”

당장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몬스터부터 트랩을 까는 몬스터까지. 모조리 이 근방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몬스터였다.

어제 보고받았던 강남 거리를 습격한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나타난 수십 마리의 몬스터에 적절한 대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타일 사이로 새빨간 피가 번져 나갔다. 그걸 내려다보며 홍시아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을 흘리는 홍시아의 뒤로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길드 지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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