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88. 대치 상태
‘불편해…….’
흐릿한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온몸을 편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왼쪽과 오른쪽에 온도 차이가 극명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더워… 아니, 시원한 건가?’
그나마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고개를 돌리며 이리저리 뒤척였다.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불편하고 덥고, 아니, 시원하고… 아니…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간지러운 감각이 얼굴에서 퍼져 나갔다. 벌레라도 날아다니는 건가? 피하려고 얼굴을 숙여 봐도 끈질기게 따라와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한참 달게 자고 있던 터라 이 모든 게 짜증스럽기만 했다. 좀 더 자고 싶은데… 내 마음과 달리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머릿속은 점점 선명해졌다.
“큭…….”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뜨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함께 적나라한 살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좋은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타인의 가슴에 그대로 굳어 버린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침 인사를 보내왔다.
옆에서 길게 누운 채로 턱을 괴고 있던 천사연이 손가락으로 내 볼을 꾹 눌러 왔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이 미친……!”
마음속 깊이 치솟은 오싹함을 견디지 못하고 냅다 주먹을 내질렀다.
우당탕,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천사연이 침대 밖으로 떨어졌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천사연의 하체는 다행히 바지를 제대로 입고 있었다.
“뭐지?”
오른편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곤히 자고 있던 하태헌이 비명을 듣고 눈을 떴다. 이 자식도 천사연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아야… 하룻밤을 사이좋게 보낸 상대방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닥쳐요!”
진저리를 치며 놓으라는 뜻을 담아 하태헌의 팔을 거칠게 밀어 냈다. 손바닥에 닿아 오는 하태헌의 피부가 온통 뜨끈뜨끈했다. 오른편에서 느껴졌던 뜨거운 기운의 원인은 하태헌이었다.
헐레벌떡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나란히 바지만 입고 있는 천사연과 하태헌에게 정색하고 물었다.
“제가 어제 옷 빌려줬잖아요! 근데 왜 둘 다 벗고 있는 겁니까?”
“너무 작다.”
“작아서 잠을 잘 수가 없던데.”
그제야 침대 바로 밑바닥에 버려지듯 놓여 있는 반팔 티셔츠 두 장이 보였다. 딱 봐도 내가 잠들자마자 즉시 벗어서 침대 아래에 던져둔 모양새였다.
자고 가겠다고 하도 떼를 써서 그나마 제일 큰 옷을 찾아서 빌려줬더니, 이게 뭐란 말인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피익! 피익!
내 외침을 들은 여우가 방문을 통과해서 내게 날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서 잠을 자던 여우는 천사연과 하태헌에게 풍기는 SS급의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거실 소파로 내쫓겨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 작고 어린 여우의 잠자리를 뺏은 두 무뢰배는 여우의 서러운 울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어났으면 씻고 아침 식사나 하지.”
보란 듯이 기다란 두 팔을 쭉 뻗어서 스트레칭한 천사연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사연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잘 짜인 상체의 근육이 불끈거리며 움직였다. 그 옆에 있는 하태헌도 마찬가지라 보고 있자니 짜증만 더 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쫓아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평온한 아침이 다 망해 버렸다.
하지만 고작 A급인 내가 저 고집 센 SS급 두 명을 어떻게 내쫓을 수가 있겠는가. 난 억울했다.
그나마 김우진이 방에 찾아오기 전에 일어나서 다행이었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을 김우진이 봤다고 생각하면… 아, 정말 끔찍했다. 그 뒷수습은 누가 하라고.
김우진이 보통 9시 좀 넘어서 아침 먹자며 찾아오니까, 대충 두 시간 정도 남은 셈이었다. 그 두 시간 안에 천사연과 하태헌이 자고 갔다는 흔적을 최대한 없애야 했다.
낑낑거리는 여우를 품에 안아 주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사람 시켜서 옷이나 사 오라고 하세요.”
***
천사연과 하태헌은 씻고 나서 수행 비서가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멀쩡한 옷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의 모습에 마음이 좀 놓였다.
우서혁에게 연락하겠다는 천사연을 뜯어말려서 다른 비서에게 옷 심부름을 시켰다. 그 비서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눈치 빠른 우서혁에겐 절대 이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지친다…….”
침실까지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니까 온몸에 힘이 없었다. 소파에 축 늘어져서 중얼거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천사연이 쯧쯧 혀를 찼다.
“체력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일어난 지 이제 막 두 시간 지났는데 벌써 지친다니.”
“조용히 하세요…….”
진짜 양심 없는 놈이었다.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힘이 없어서 그냥 무시했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던 그때였다. 현관문 도어 록 번호 눌리는 소리와 함께 평소처럼 김우진이 찾아왔다.
“한이결, 일어났…….”
아무 생각 없이 거실로 들어온 김우진이 천사연을 마주하고 곧장 멈춰 섰다. 당황한 녀석의 시선이 천사연 옆에 있는 하태헌에게 갔다가 마지막으로 내게 꽂혀 들었다.
“안녕, 김우진. 들어와.”
“어, 응.”
김우진이 싱긋 웃는 천사연의 눈치를 보며 내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제 영역에서 낯선 이를 마주한 고양이 같아서 좀 안쓰러웠다.
“놀랐냐?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얘기할 게 있어서 일찍 만났어.”
“일찍?”
혹여라도 천사연이나 하태헌이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 재빨리 설명해 주자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에 의심이 깃들었다.
“여기서 잠을 자거나… 그런 게 아니라? 두 분 다 아침 일찍 찾아왔다는 거야?”
“…당연하지. 그럴 리가 있겠어?”
예상했던 것보다 날카로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을 들은 김우진은 곧 의심을 지우고 순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렇구나. 알겠어. 밥은 아직 안 먹은 거지?”
“으응.”
미안하다, 김우진. 하지만 세상에는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는 거야.
“김우진도 왔으니 이제 아침 식사를 하면 되겠군. 오후에는 앨리스 부마스터와 함께 회의를 진행할 예정이니 참고하도록 하고.”
애쓴다는 표정으로 나와 김우진을 구경하던 천사연이 한 말에 반사적으로 어제 봤던 앨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날개를 달고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샷건으로 몬스터를 죽이던 앨리스. 레퀴엠 길드에서 천사연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던 그녀는 결국 호텔로 돌아가지 못하고 손님 방을 빌리게 됐다.
앨리스도 어제 겪었던 갑작스러운 몬스터 출몰 사건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많을 테니 웬만하면 회의 일정을 받아들이겠지. 앨리스와 내 거래도 중간에 끊어졌으니 다시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앨리스에게 물어볼 질문을 머릿속에 정리하던 나는 내친김에 천사연에게 말했다.
“앨리스 부마스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제가 앨리스 부마스터를 만나든 말든 관심 꺼 주시죠. 전 레퀴엠 소속도 아니잖아요. 왜 자꾸 참견하는 겁니까?”
“참견이라니, 그런 심한… 난 그저 한이결, 네가 쓸데없이 복잡한 일에 엮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경 써 준 건데…….”
“헛소리 그만하세요.”
차분하게 따지자 천사연이 냉큼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썹을 한껏 아래로 내렸다. 마치 자신은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내가 괜히 혼낸다는 것처럼 잔뜩 서러운 표정이었다.
하여튼 진지한 대화가 안 된다니까. 이렇게 장난식으로 넘겼다가 다음에도 또 같은 짓을 벌일 테니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통보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레퀴엠을 나가서 로헌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언제든 괜찮으니 와라. 여기보다 훨씬 좋은 방을 줄 테니까. 아니면 아예 내 집으로 들어와서 살아도 되고.”
뒤에 서서 느긋하게 관전하던 하태헌이 내 입에서 로헌이 나오자마자 득달같이 끼어들었다. 집에 들어와서 살아도 된다는 부분에서 천사연의 눈썹이 불쾌감을 담고 치켜 올라갔다.
“하태헌 부마스터는 이럴 때마다 눈치가 참 없군. 어디로 보나 나와 한이결의 애정 어린 말싸움일 뿐인데, 저렇게 끼어드는 꼴이라니.”
“한쪽의 일방적인 애정만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만.”
“한이결의 목소리만 들어 봐도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난 쉽게 알겠는데. 하태헌 부마스터는 우리 이결이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또 시작이네. 지긋지긋한 건 나만이 아닌지 내 옆에 앉아서 천사연과 하태헌의 말싸움을 듣던 김우진도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주방으로 가 버렸다. 여우도 지겨운지 웬일로 김우진의 뒤를 따라서 자리를 빠져나갔다.
본격적으로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나 또한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기적처럼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네.”
이런 황금 같은 타이밍이라니. 분명 센스 좋은 손님일 게 분명했다.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한이결 씨.”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사람은 의외로 우서혁이었다. 최근 유독 자주 마주치는 얼굴에 나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그럼요.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용건이 없으면 찾아오지 않는 우서혁의 성격을 아는 터라 편하게 알려 달라는 의미로 물어본 건데, 어째서인지 우서혁이 시선을 살짝 피하며 머뭇거렸다.
“우서혁 씨?”
“죄송합니다. 어제 일로 괜찮으신지 걱정이 돼서… 와 봤습니다. 다른 용건은 없습니다.”
“아…….”
걱정돼서 확인차 와 봤다는 건가? 공적인 용건이 없는데도 그저 내 상태를 보려고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우서혁의 말에 조금 감동이 밀려왔다.
방에 천사연과 하태헌만 없었으면 같이 아침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았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웃으며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우서혁 씨도 많이 바쁘셨을 텐데, 피곤하진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그럼 얼굴도 봤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네.”
내가 가라고 하기도 전에 우서혁이 먼저 물러섰다. 별문제 없이 지나간다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쉰 그 순간이었다.
“누가 왔길래 인사를 길게 하나 했더니, 우서혁 비서였군.”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순순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던 우서혁도 동시에 딱 멈췄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식적인 미소를 만면에 띄운 천사연이 경악하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우서혁에게 인사를 보냈다.
“좋은 아침이야, 우서혁 비서.”
“……예.”
“이젠 내 명령이 없어도 23층 방에 잘만 찾아오는군.”
“…….”
“이왕 온 거 아침도 먹고 가지 그래? 들어와.”
굳어 버린 나와 우서혁은 보이지도 않는지, 여유롭게 아침까지 먹고 가라는 말을 남긴 천사연이 먼저 등을 돌렸다.
“…….”
“…….”
우서혁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지레 찔려서 급히 변명을 내뱉었다.
“아, 아침 일찍 온 겁니다. 어제 그 일로 할 얘기가 있어서…….”
“…….”
변명에도 우서혁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혀 믿지 않는구나.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다 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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