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48화 (348/394)

348화

“나 혼났어.”

“…….”

잔뜩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로 서 있는 천사연의 모습에 기가 차서 말문이 절로 막혔다.

새벽 1시 30분, 진작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에 거침없이 현관문을 두드린 두 사람을 마주한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회의가 이제 끝난 겁니까?”

내 질문에 천사연과 하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따지자면 이런저런 조사를 한다면서 계속 붙잡더군. 그러다 보니 늦은 거다.”

“나 힘들어.”

의젓하게 설명하는 하태헌의 옆에서 천사연이 어깨를 축 늘이며 다시 한번 칭얼거렸다. 대체 누가 더 나이를 먹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하… 들어오세요.”

이 시간에 집으로 안 가고 내 방을 찾아온 거면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잘됐다. 나도 아까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계속 찝찝하던 참이었으니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비켜 주자 둘 다 거절하지 않고 들어왔다.

피익?

나와 함께 침대에서 잠을 자던 여우도 시끄러워서 깼는지 잠이 덜 깬 얼굴을 하고서 비척비척 날아왔다. 품으로 파고드는 여우를 안아 주며 거실 불을 켰다.

“뭐라도 마시겠습니까?”

“음…….”

“준비해 준다면 고맙게 마시지.”

내 물음에 천사연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천사연이 어딘가 묘한 눈빛을 하태헌에게 보냈다.

영문 모를 짓을 하는 두 사람을 거실에 내버려 두고 주방에 들어갔다. 김우진이 정리하고 간 주방은 깔끔하면서도 낯설어서 어디서부터 뒤져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일단 찬장부터 열어 봤다. 그래도 여기 어딘가에 차로 마실 만한 티백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찬장과 냉장고, 온갖 곳을 다 뒤진 끝에 차를 끓일 수 있을 만한 티백 몇 가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근데… 어떻게 만들어 먹는 거야?’

찾았다고 해도 이걸 마실 수 있는 무언가로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만드는 방법을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결국 가장 무난한 녹차 티백을 꺼냈다.

전기 포트로 끓인 물을 잔 두 개에 절반씩 나눠 담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맹물에 봉투를 뜯어낸 녹차 티백을 던져 넣고 천사연과 하태헌에게 돌아갔다.

“여기요.”

“…….”

“오…….”

내가 내민 녹차를 본 하태헌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잔을 받아 갔고 천사연은 짐짓 놀란 척을 했다.

“그새 성장했나? 이번에는 그래도 끓인 물에 티백을 담가 줬군.”

“무슨 헛소리… 아.”

천사연의 말에 뒤늦게 예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찬물에 티백만 대충 던져서 줬었지.

‘이 자식이 기껏 챙겨 주니까…….’

천사연에게 건네주려던 찻잔을 뒤로 휙 뺐다.

“제가 대접하는 차에 불만이 많으신 것 같은데. 마시지 마세요.”

“불만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 오히려 칭찬을 해 준 거지.”

“그게 어떻게 칭찬입니까? 비꼬는 거잖아요.”

나와 천사연의 말다툼을 잠자코 지켜보던 하태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내가 대신 마시겠다. 줘.”

“예?”

“이걸 뺏어 간다고? 우리 하태헌 부마스터는 상도덕이 없나?”

“그딴 거 관심 없다. 한이결, 나한테 줘. 난 아주 잘 마시고 있으니까.”

“한이결 보러 간다는 말을 엿듣고 쫄래쫄래 따라왔으면서,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군.”

“그쪽이 오든 말든 상관없이 난 나대로 한이결을 만나러 온 거다.”

“로헌 길드 부마스터는 지금 여기가 어딘지 깜빡 잊은 모양이야. 레퀴엠에 들어오려면 당연히 마스터인 내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는데.”

“한이결이 로헌으로 와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겠지?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도록.”

“그만… 그만!”

아오, 시끄러워.

천사연 앞에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둘의 논쟁을 끊어 냈다. 어깨 위로 올라온 여우도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짜증 섞인 울음소리를 길게 흘렸다.

“자, 됐죠?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아까 그건 뭐였습니까? 단순한 회의 소집이라기엔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았잖아요.”

천사연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녹차를 한입 마시는 동안 하태헌이 대신 입을 열었다.

“레퀴엠과 프라우스 신도단이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더군.”

“예? 잠깐만요, 누가요? 설마 관리 본부가요?”

“표면적으로는.”

“표면적이라면… 단순히 관리 본부만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까?”

예상치 못한 설명에 경악한 나와 달리 시종일관 여유로운 천사연은 소파에 등을 길게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관리 본부를 방패 삼아 우리를 압박하는 세력이 있는 게 확실하다만… 상관없어. 어차피 그놈들도 사마엘이 심어 둔 프라우스 신도단의 일원일 테니까.”

망설임 없이 나오는 예측에 나는 천사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챘다.

“이전 시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천사연은 그렇다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한국만이 아니야. 활동 반경을 넓히기 위해서 각 국가에 중심이 되는 인물들을 본인들 아래에 두려고 할 거다. 보통은 정치인이고. 한국도 그 과정이 진행 중일 뿐이야.”

“…그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길드는 견제하는 거군요.”

답답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압박을 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싸움이 길어지니까 이젠 길드까지 건드리는구나. 천사연이 어떤 마음으로 레퀴엠 길드를 세웠는지 아주 잘 아는 터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태헌이 굳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우리 길드와 제이나 길드도 똑같이 견제 대상에 들어가는 모양이더군. 레퀴엠은 추가로 프라우스 신도단과 내통하고 있다는 누명까지 씌우려는 거고.”

“왜 레퀴엠만…….”

“레퀴엠은 프라우스 신도단이 벌였던 사건마다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지난 시간을 머릿속에 차례로 떠올리던 나는 눈가를 좁혔다.

“강남 사건, 게이트 테러 사건, 미국 레드 마켓 사건, 미술관 사건… 프라우스 신도단이 문제를 일으킨 곳마다…….”

“…….”

“천사연이… 있어서?”

힘겹게 이어 간 내 말을 들은 천사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마주한 나는 너무나도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천사연이 사건이 벌어진 곳마다 있었던 건 프라우스 신도단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고생을 하면서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막아 왔더니, 되돌아온 건 내통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라니. 내가 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거실을 둘러싼 공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 속에서 천사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사건들도 문제지만, 그쪽이 의심된다고 내세우는 사건은 길드 관리 본부가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습격받았을 때라고 하더군.”

길드 관리 본부 습격은 내가 엘로힘과 엘라하의 신전에서 지낼 때 벌어진 사건이다. 관리 본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프라우스 신도단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지. 그 당시에 나도 엘로힘이 빌려준 책을 통해서 지켜봤다.

그 사건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됐었는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이 반석 위에 그분의 업적을 세우리라.

정신 지배를 당해서 사마엘이 시킨 대로 말을 내뱉던 목소리 증폭 능력자. 결국 천사연에게 제압당했지만…….

“천사연 마스터가 목소리 증폭 능력자를 제압했던 장면은 카메라로 찍혀서 실시간으로 송출이 됐었다.”

하태헌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거로 한동안 잡음이 많았지. 목소리 증폭 능력자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으니까.”

“천사연이 죽인 게 아니라는 증거가 다 있는데도 여태껏 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겁니까?”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이니 어쩔 수 없지. 이제는 그게 다 짜고 치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고.”

그게 쌓이고 쌓여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가. 젊은 나이에 국내 1위 길드 마스터가 된 천사연을 시기하는 집단을 프라우스 신도단이 아주 적절하게 써먹은 것이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두통이 밀려오는 이마를 짚으며 묻자 천사연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다행히 중간에서 최미진 센터장이 어느 정도 막아 줘서 경고 수준에 그쳤어.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졌다는 건 확실하군. 자칫하다간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거라는 것도.”

“이제야 겨우 프라우스 신도단의 꼬리를 잡아냈는데… 설마 이번에 갑자기 몬스터가 등장한 이유도 이 일과 연관이 있을까요?”

“가능성은 있군. 다만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몬스터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라.”

시원하지 않은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트 불법 뒷거래에 갑작스럽게 출몰한 몬스터와 국가적인 경고까지. 모든 게 복잡하게 엉켜서 어디서부터 풀어 가야 할지 모르겠다.

내 한숨을 들은 천사연이 싱긋 웃었다. 지금 제일 속상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웃고 난리야.

“한 번에 다 해결하려고 하면 당연히 머리 아플 거다. 이럴 때는 가장 중요한 것부터 순서대로 처리하는 게 나아. 지금으로선… 강남 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겠군. 날이 밝는 대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지. 관리 본부는 신뢰가 안 가니까.”

“…알겠습니다. 하태헌 씨, 로헌은 좀 어떻습니까?”

“레퀴엠보다 덜할 뿐이지, 우리도 활동하기 편한 상황은 아니다.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레퀴엠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터진 몬스터 사건부터 살필 예정이다. 제이나도 같은 계획이더군.”

“좋네요.”

레퀴엠, 로헌, 제이나 길드가 하나로 뭉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길드 관리 본부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니 더더욱 제이나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못하게 됐다.

“흠. 시간이 늦었으니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새 내가 준 녹차를 다 비운 천사연이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려는 건가? 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새 새벽 2시가 훌쩍 넘어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늦긴 했네.

“씻고 잘 준비를 해야겠군.”

“조심해서 가세… 예? 뭐요?”

잘 가라는 인사를 하려던 나는 이어지는 천사연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그를 바라봤다. 어이없어서 입이 절로 벌어진 내 모습에 천사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아니, 씻고 잘 준비를 왜 제 방에서 하세요?”

“그럼 이 늦은 시간에 내쫓으려는 건가? 이렇게 매정할 수가… 나는 이결이 네가 궁금해서 잠도 못 잘까 봐 회의 끝내고 새벽같이 달려온 건데.”

“뭔 개소리를…….”

“천사연이 자고 간다면 나도 자고 가겠다.”

“왜들 이러세요, 진짜!”

경악하며 천사연과 하태헌의 등을 현관문 쪽으로 있는 힘을 다해 밀어 봤지만 둘 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못 이긴 척 순순히 나갔을 텐데, 이렇게 버티는 걸 보면 둘 다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더 충격적이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으면서 대체 어떻게 자고 가겠다는 겁니까?”

“옷이야 뭐… 안 입으면 그만 아닌가?”

“나 먼저 씻고 오지.”

“이런, 선수를 뺏겼군. 그럼 난 잔이라도 치울까.”

“……!”

천사연보다 좀 더 믿었던 하태헌이 냉큼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천사연은 빈 잔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거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맸다. 둘 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어깨에 올라온 여우가 피이익, 울음소리를 내며 위로를 보내왔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4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