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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47화 (347/394)
  • 347화

    천사연이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 서너 마리가 강한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차수연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순식간에 남아 있는 몬스터를 모두 처리한 천사연이 검날에 묻어 있는 자신의 피를 털어 내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경찰차와 헬기가 보였다. 경직된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만 문제일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건가?

    이 경직된 공기는 적대감에서 시작된 게 확실한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나만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던 걸지도 모른다.

    내 앞을 가로막은 천사연과 하태헌 또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에 새하얀 SUV 차량 여러 대가 들어섰다.

    SUV 차량에서 우르르 내린 사람들은 모두 길드 관리 본부 직원들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봐서 최소 B급, 높으면 A급이었다. 방호복을 갖춰 입은 직원 중 한 명이 굳은 목소리로 외쳤다.

    “무기를 집어넣으십시오, 천사연 마스터.”

    “지시에 따라 주시기를 바랍니다.”

    긴장 어린 기색으로 말하는 직원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천사연이 순순히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곳은 저희가 수습할 테니 여러분들은 안내에 따라서 차에 타 주시길 바랍니다.”

    “뭐라고요?”

    차수연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말이야 차에 타 달라고 부탁하는 거지, 담긴 뜻은 자기네들이 끌고 가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여기 모인 건 갑작스럽게 등장한 몬스터를 막기 위해서였다. 본래 이런 사고는 관리 본부 몫이었다.

    일 처리도 느렸던 주제에 저런 요구까지 해 오니 차수연이 어이없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솔직히 나 또한 차수연만큼이나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으니까.

    “굳이 다 갈 필요 있나?”

    금방이라도 폭탄이 터질 것처럼 날카로워진 분위기 속에서 천사연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나와 하태헌 부마스터만 가도록 하지. 아니면 뭐… 뒤에 있는 이들도 따라가야 할 마땅한 구실이라도 있으면 지금 말하고.”

    “…알겠습니다.”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던 직원은 이내 천사연 뒤에 서 있는 앨리스의 눈치를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깔끔하게 답변을 남긴 천사연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관리 본부 직원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 낮춰 말했다.

    “우서혁 비서 따라서 길드로 돌아가. 절대로 다른 곳 가지 말고.”

    “…괜찮은 거야?”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야. 나와 하태헌 말고도 이주하 마스터와 홍시아 마스터도 부를 테니까.”

    차가운 손길이 내 뺨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천사연은 눈길을 돌려 우서혁에게 명령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이결을 안전하게 길드로 데려가도록. 김우진과 권정한에게 연락해서 23층 방에 함께 있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앨리스 부마스터, 그쪽도 제가 회의를 끝내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레퀴엠 길드에 계시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천사연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한눈에 알아챈 앨리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흠, 장난칠 때는 아닌 것 같네요. 그 호의는 일단 고맙게 받아 두죠.”

    해외에서 제법 힘 있는 길드의 부마스터인 앨리스가 함께 있어 준다면 최소한 관리 본부가 우리를 건들 수 없을 것이다. 천사연은 그걸 노리고 앨리스를 붙잡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게 시선을 보낸 천사연과 하태헌이 관리 본부 차를 타고 사라졌다.

    “어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상황이 일단락되자 차수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차수연에게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수연 씨. 어서 길드로 돌아가 보세요.”

    차수연이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저 지나가던 길에 사람을 돕기 위해서 합류한 거니까.

    “그래. 오고 간 얘기를 들어 보니 길드랑 관리 본부가 또 충돌하는 모양인데, 이런 건 우리가 끼어들어 봤자 소용없어. 관리 본부가 저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찝찝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인 차수연이 내 등을 힘줘서 팍 때렸다.

    “갈게. 넌 연락 좀 자주 해.”

    “하하, 네. 조심해서 가요.”

    인사를 끝으로 깔끔하게 갈 길 가는 차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난장판이 된 주변을 둘러봤다.

    알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머리가 아팠다. 관리 본부 일은 뭔지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길어지지 않고 잘 해결되면 좋을 텐데.

    ***

    길드 관리 본부 4층 회의실. 프라우스 신도단의 습격으로 한 번 무너졌던 건물이 다시 세워지면서 생겨난 길드 관계자 전용 회의실이었다.

    그곳에 자리한 각 길드의 대표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회의실 문이 열리며 게이트 센터장인 최미진과 함께 어느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 둘이 등장하자 다리를 꼰 채로 턱을 괴고 있던 홍시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한테는 빨리 기어 오라고 하도 시끄럽게 굴길래 뭔가 했더니, 불러낸 당사자는 이제야 행차하시네. 이거야 원, 황송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대놓고 나온 이죽거리는 말에 최미진이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삼켜 냈다. 예상은 했지만, 웬만한 일은 웃고 넘기는 홍시아마저 한껏 날카로워져 있으니 이번 회의가 확실히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평소라면 홍시아를 어느 정도 막아 줬을 제이나 길드의 부마스터 김나율마저도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만 있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얼마나 불유쾌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오히려 제가 할 말일 텐데요. 제이나 길드는 지금 사태 파악이 제대로 안 된 모양입니다.”

    최미진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선 남자가 질세라 걸려 온 시비를 맞받아쳤다. 검은 안경을 쓰고 예민한 느낌을 풍기는 마른 남자의 이름은 조경태. 안전 관리부 총책임자였다.

    짜증이 가득 담긴 몸짓으로 거칠게 자리에 앉은 조경태가 말을 이었다.

    “길드 관리 본부, 그것도 회의실에 당신들을 부른 걸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이런 뻔뻔한 태도라니. 정말 어이가 없군요. 지금 위에서 얼마나 난리인지 압니까? 방금 강남에서 있었던 사건도…….”

    “잠깐.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조경태 부장? 뻔뻔한 태도라고? 똥개 부르듯이 제멋대로 호출해 놓고 어이가 없어서… 본부 회의실이 아니라 어디로 부르려고 했는지 어디 말이나 해 보시지 그래요. 궁금해 죽겠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홍시아가 입꼬리를 비틀어 조소를 지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인내심 짧은 조경태가 회의실 책상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거야 당연히 조사실이지! 몬스터로 쑥대밭이 된 강남 거리 때문에 온 언론이 뒤집혔는데 뭘 잘했다고!”

    “조경태 부장. 소리 낮추세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있던 최미진이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말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흥분한 조경태는 계속해서 침을 튀겨 가며 외쳤다.

    “대낮에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도 강남 거리 한복판에! 이게 말이 되냐고. 지금 위에서도 난리야, 아주 언론이고 국가고 우리 멱살을 잡고 뒤흔들고 있는데 당신들은……!”

    조경태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듣던 홍시아는 헛웃음을 흘렸고 이주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회의실 분위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긴장감이 극도로 달했다.

    “미안해하지는 못할망정 배 째라는 태도를 보이는데 우리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

    조경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사연이 말문을 열었다.

    “조경태 부장은 이번 몬스터 출몰 사건이 우리 길드들의 문제라고 말하는 겁니까.”

    “당연히……!”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궁금하군요.”

    천사연이 조경태의 대답을 자연스럽게 끊어 내며 말을 이었다.

    “안전 관리부 책임자이니 우리가 소유한 게이트의 클리어 시기가 언제인지는 다 꿰고 계실 테고.”

    “그…….”

    “게이트 폭주가 아니면 또 뭐가 있을까… 강남 한복판에 저런 몬스터가 나타날 만한 방법이. 멍청한 제 머리로는 도저히 짐작이 안 되는 데 좀 알려 주시죠.”

    천사연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여유롭게 물었다. 천사연의 기세에 밀렸던 조경태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기, 길드에서 연구하던 몬스터가 탈출했다거나, 하는 그런…….”

    “아. 길드에서 개별 관리하던 몬스터를 실수로 놓친 거다? 써먹을 곳 없는 B급 지네 몬스터 수십 마리를?”

    “…….”

    “그래요. 좋습니다. 그럼 감사팀을 꾸려서 길드로 보내십시오.”

    “뭐요? 감사팀?”

    “길드 문제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요. 강남에 위치한 레퀴엠과 로헌, 제이나 길드에 감사팀을 보내서 아주 샅샅이 뒤져 보십시오. 조경태 부장의 말대로라면 감사팀이 문제를 발견해 내지 않겠습니까?”

    “오, 좋네. 난 찬성이야. 당장 보내도 상관없어.”

    턱을 괸 홍시아가 천사연의 제안의 맞장구를 쳐 왔다.

    “다만, 조경태 부장.”

    천사연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회의실 불빛 아래로 드러난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오싹하리만치 차가웠다.

    “그렇게 마음대로 뒤져 본 뒤에 만약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조경태 부장이 져야 할 겁니다.”

    “……!”

    “길드를 관리하고 지켜 줘야 할 관리 본부가 나서서 길드를 의심한다라, 볼수록 웃음만 나는군요.”

    그제야 천사연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한 조경태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다 못해 자빠져 버린 모습에 최미진이 속으로 혀를 차며 적당히 중재했다.

    “다들 그쯤 하세요. 조경태 부장의 발언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최미진 센터장도 그리 크게 다른 얘기를 할 것 같진 않은데. 아닌가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주하가 한 말에 최미진은 반박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민감한 문제라 조심스럽게 논의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조경태 때문에 괜한 문제만 커졌다.

    결국 최미진은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을 꺼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길드 관리 본부는 물론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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