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45화 (345/394)
  • 345화

    87. 교란

    “어때요, 한이결 능력자? 다른 일 없으면 저한테 시간을 좀 내 줄 수 있나요?”

    내 손을 살짝 힘줘서 잡은 앨리스가 열기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계속 만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오기에 가까운 열기였다.

    하지만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우서혁이 나와 앨리스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안 됩니다.”

    단호하게 나온 거절과 함께 우서혁은 앨리스가 붙잡고 있는 내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한이결 씨와 약속을 잡고 싶으시면 길드를 통해 절차를 거치십시오.”

    “그 절차를 거치려고 하는데 자꾸 거절하잖아요. 별의별 핑계를 다 대면서 제 요청만 쳐 내는 거 모를 줄 알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절차를 거치셔야 합니다.”

    얼씨구. 절차는 무슨 절차?

    내 만남을 절차까지 들먹이며 관리하려고 하는 레퀴엠의 모습에 헛웃음만 나왔다. 나는 앞을 가로막은 우서혁을 억지로 옆으로 밀쳐 내며 말했다.

    “시간 낼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한가했습니다.”

    “정말요?”

    다른 때 같았으면 우서혁의 의견을 존중해 줬겠지만, 그가 철저하게 나를 속였으니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

    설마 우서혁이 내게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다. 솔직히 이번에는 기분이 좀 상했다. 난 정말 진심으로 걱정해 준 거였는데.

    “한이결 씨.”

    “뭐요.”

    짜증을 억누르며 되묻자 우서혁도 내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는지 차마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걸 그대로 무시하고 앨리스에게 말했다.

    “저도 한 번 더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좋네요. 솔직히 한이결 능력자가 절 만나기 싫어해서 레퀴엠 길드 측에 부탁이라도 한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아닙니다.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쯤에서 다시 우서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딘가 시무룩한 기색으로 내 옆에 서 있던 우서혁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우서혁 씨. 앨리스 부마스터와 대화할 수 있게 응접실 하나만 빌릴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안 되면 앨리스 부마스터가 지내고 계신 호텔 응접실로 갈 겁니다.”

    “…알겠습니다.”

    우서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다 포기하진 않았는지 재빨리 이어 말했다.

    “대신 응접실에는 저도 함께 들어갈 겁니다.”

    “그건…….”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한이결 씨 곁에만 앉아 있겠습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천사연이라도 불러올 기세라 어쩔 수 없이 앨리스에게 양해의 눈빛을 보냈다. 다행히 앨리스는 우서혁이 있어도 상관없는지 흔쾌히 허락했다.

    협의를 끝낸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우서혁은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천사연에게 전화를 걸어서 현 상황을 보고했다.

    “죄송합니다.”

    우서혁의 설명을 들은 천사연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회의는 진작 끝나서 부딪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상황을 파악해 본 바, 앨리스 부마스터 쪽에서 일부러 나가지 않고 1층 홀 카페에서 기다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여간 집요하군.]

    적나라한 통화에 나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앨리스에게 힐끔 시선을 던졌다. 기품이 가득 넘치는 몸짓으로 찻잔을 들어 올린 앨리스가 그걸 듣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회의하는 내내 천사연 곁에 우서혁 비서가 없더군요. 원래라면 나와 우서혁 비서가 만나지 않도록 일부러 뺐다고 생각했겠지만… 한이결 능력자와의 만남을 번번이 퇴짜 놓은 행동 때문에 의심이 갔죠. 혹시나 해서 기다려 봤더니 역시 그렇네요. 길드를 책임지는 마스터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만나기 싫다는 사람을 음침하게 기다린 쪽이 문제 아닌가? 정말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군.]

    우서혁의 핸드폰으로 싸우기 시작하는 앨리스와 천사연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만하시죠. 우서혁 씨는 그렇게 계속 핸드폰 붙잡고 보고하실 거면 나가 주세요. 대화하는 데 방해되니까.”

    “아닙니다. 끊겠습니다.”

    내 지적에 우서혁이 황급히 천사연과의 통화를 끝내 버렸다. 통화 상대가 상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재빠른 속도였다.

    “방해꾼이 사라졌으니까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볼까요?”

    차를 한 모금 마신 앨리스가 화사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그녀는 의외로 미사여구 하나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제가 회의해서 말했었죠. 날개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과 함께 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예. 하지만 제 바람 능력과는 차이가 커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이결 능력자에게 명확한 해답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을 뿐이에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언젠가는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앨리스가 순한 눈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온 크고 동그란 눈은 어딘가 강아지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러니까 도와주실 수 있나요? 물론 도와준다면 저도 그만큼 도움을 드릴게요.”

    거절하기 쉽지 않은 분위기이긴 했지만, 앨리스에게 원하는 정보가 있는 만큼 내 입장에서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능력을 보여 주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좋아요.”

    내가 승낙하자 앨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제 능력부터 먼저 보여 드릴게요. 어차피 비교하려면 우리 둘 다 능력을 써 봐야 하니까요.”

    그녀는 내가 부탁을 받아들여서 진심으로 기쁜지 설명하는 태도에서 신난 기분이 묻어났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은 앨리스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새하얀 등이 훤히 드러났다. 평범한 블라우스인 줄 알았는데 뒤는 저렇게 드레스처럼 뚫려 있는 건가?

    “언제든 능력을 편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생긴 옷을 입어요. 대신 위에 외투를 하나 더 걸치죠.”

    “그렇군요. 확실히 날개가 크기도 커서 그편이 편해 보입니다.”

    “흐음…….”

    내 얘기를 들은 앨리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담담하시군요.”

    “네?”

    “사실 제가 이렇게 등을 보여 주면 남성분들은 보통 놀라시거든요. 근데 한이결 능력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좀 의외네요.”

    어리둥절하던 난 이어지는 설명에 어색하게 웃었다. 놀란 척 연기라도 좀 할 걸 그랬나.

    “겉보기에만 그렇고 속은 놀랐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이번 한 번은 믿어 줄게요.”

    곧이어 앨리스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매끈한 등이 새하얀 빛에 뒤덮이면서 무언가가 형체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 아닌 날개였다. 빛을 품고서 나타난 날개는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겨난 커다란 흰 날개가 천천히 펼쳐졌다.

    “대단하네요.”

    앨리스가 두 날개를 크게 움직이자 깃털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등에 새하얀 날개를 단 채로 웃고 있는 앨리스는 별명처럼 천사 같았다.

    “우서혁 씨는 아예 늑대로 변할 수 있는데, 앨리스 부마스터도 같습니까?”

    “그럼요. S급 변신 능력자는 완전체로 변할 수 있답니다. S급 아래는 신체 일부만 가능하고 완전체는 힘들어요.”

    “그렇군요.”

    주변에 우서혁 말고는 변신 능력자가 없던 터라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이 많았다.

    우서혁한테 진작에 좀 물어볼 걸 그랬다. 너무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서 아까 카페에서 느꼈던 미안함이 다시 밀려왔다.

    앨리스를 따라 나도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능력을 보여 줬으니 나도 보여 줘야겠지.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해진 한이결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후웅, 손끝에서 생겨난 바람이 몸 전체를 휘감았다. 평소보다 훨씬 약한 바람을 사용해서 위로 살짝 떠올랐다.

    “바람이 몸 전체를 감는 형태인 거군요. 지금 이 정도면 기운을 얼마나 쓴 건가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10%도 안 될 겁니다. 지금은 강도도 약하고 저 혼자만 띄운 거라서요. 강도와 사람 숫자에 따라 기운 소모가 많이 달라집니다.”

    대답을 들은 앨리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바람에 휘감긴 내 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곧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한이결 능력자. 여기서는 봐도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네요.”

    “실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앨리스가 응접실에 있는 적당히 넓은 창문을 찾아냈다. 그녀는 곧장 그곳으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창문을 열었다.

    “혹시 밖에 나가서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어떠세요?”

    “전 괜찮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앨리스는 씩씩하게 창틀을 밟고 올라섰다.

    수월하게 창문 밖으로 빠져나간 앨리스는 커다란 날개를 움직이며 무리 없이 허공을 날았다.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에 절로 시선이 향했다. 날개가 있으니까 확실히 멋있긴 하네.

    “자, 손잡으세요. 한이결 능력자.”

    앨리스가 에스코트하듯이 나를 향해 작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 마주 잡으며 나 또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창틀 위로 한 발을 올린 그때였다.

    누군가 강한 힘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질 정도의 힘이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무섭도록 표정이 굳어 있는 우서혁이 서 있었다.

    “우서혁 씨?”

    “…….”

    항상 봐 오던 얼굴과는 다른, 화난 게 확실해 보이는 얼굴에 나도 굉장히 놀랐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우서혁이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4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