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하태헌이 전달해 준 김경욱의 정보에는 아쉽게도 우리가 원하는 내용은 없었다.
김경욱이 불법을 저지르며 살아온 건 맞았지만, 정작 그 일당에게 게이트 뒷거래를 의뢰했을 때는 이미 정신 지배에 당한 상태였다.
‘자의로 신도단에 소속된 사람이었으면 얻어 낼 정보가 더 많았을 텐데.’
물론 그랬다면 이렇게 쉽게 잡히진 않았겠지만. 아쉬운 마음에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혀를 차며 펼쳐 둔 서류를 접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짧고 간결하게 들려왔다.
누구지? 지금은 딱히 올 만한 사람이 없던 터라 고개를 기울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우서혁 씨?”
“좋은 오후입니다.”
문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은 예상외로 우서혁이었다. 놀란 내게 평온한 인사를 건넨 우서혁이 이어 물어 왔다.
“바쁘십니까?”
“아뇨, 로헌에서 보내온 서류를 보던 참입니다. 들어오세요.”
대답하면서 슬쩍 그의 뒤를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온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서혁이 직접 찾아올 정도면 중요한 용건인 게 틀림없었다. 그를 방 안으로 들이고 시선을 맞췄다.
“…….”
“……?”
뭐지?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우서혁과 마주 본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한참 만에 우서혁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이결 씨.”
“네.”
“그…….”
평소와 다르게 눈치를 살피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의 행동에 의문만 더욱 커졌다.
시종일관 담담한 우서혁이 이렇게 망설일 정도로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걱정이 밀려오던 그때였다.
“잠깐 시간을 좀… 내 주실 수 있습니까?”
“시간요?”
“예. 괜찮으시면 저와 함께 외출해 주셨으면 합니다.”
외출이라고? 시간을 내 달라길래 단순히 대화 좀 하자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가 보다.
우서혁에게 이런 제안을 받은 건 처음이라 좀 놀랍기는 했지만 안 될 건 없었다. 오히려 그간 다른 팀원들에 비하면 아직 어색한 감이 남아 있는 우서혁과의 외출은 내게도 꽤 반가웠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가는 건가요?”
“예.”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소파에 걸쳐 놨던 카디건을 걸쳐 입으며 묻자 우서혁이 이번에는 아예 얼굴을 슥 돌리며 대답을 피했다.
대체 뭔데 저러지. 내가 뭘 묻든 빠르게 답변해 주던 우서혁이었는데. 이런 모습은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낯설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출발하죠.”
가 보면 알겠지, 뭐. 태평하게 생각하며 우서혁을 지나쳐 먼저 방을 나서자 그가 얌전히 내 뒤를 따라왔다.
***
“…음, 우서혁 씨.”
그렇게 도착하게 된 장소는 정말이지 내 상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었다.
입가를 매만지며 난감해하던 나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하지? 앞에 놓인 옅은 노란색 물체를 내려다보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와 함께 오려고 한 장소가… 여기 맞습니까?”
“예.”
맞다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우서혁과 내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재차 살폈다.
동그란 원목 테이블에는 치즈 케이크부터 바닐라 라테 등, 갖가지 디저트와 음료가 가득 올라가 있었다. 다시 한번 머리를 굴려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카페는 왜……?”
“얼마 전에 새로 생긴 카페라고 민아린 힐러가 알려 주더군요.”
아아. 그러고 보니 민아린이 나한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그게 여기였구나.
“한이결 씨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런 곳에 같이 올 만한 사람이 없어서 부탁드렸습니다.”
“그렇군요. 새로 생긴 카페를 오고 싶으셔서…….”
아까 보였던 머뭇거리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온 우서혁이 자연스럽게 내 앞으로 치즈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밀어 줬다.
“드십시오.”
당황스럽긴 했지만 음식에는 죄가 없으니 잠자코 포크를 들었다.
그래, 우서혁도 사람인데 가끔 이렇게 바람 쐬러 나오고 싶겠지. 항상 천사연의 곁에서 일하며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그의 직업을 고려해 보면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른다.
‘좀 안쓰럽네…….’
원래 해 오던 비서 일만으로도 엄청 바쁠 텐데, 프라우스 신도단 관련한 자료 조사부터 팀으로서 이곳저곳 따라와 고생까지 했으니… 그동안 이런 휴식이 얼마나 필요했을까.
아무래도 내가 좀 무심했던 것 같다. 우서혁에게 도움도 많이 받아 놓고 돌려줄 생각은 안 했네.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테이블에 쌓여 있는 디저트와 커피를 꾸역꾸역 모두 삼켜 냈다. 카페를 나와 다시 차에 올라탄 나는 안전벨트를 매며 우서혁에게 물었다.
“우서혁 씨. 혹시 가고 싶으신 곳 더 있으십니까?”
천사연이 어쩐 일로 업무 지옥에서 우서혁을 내보낸 건진 모르겠지만, 이런 기회를 고작 카페 한 번 온 거로 날릴 수는 없었다.
“한이결 씨는 있으십니까?”
이대로 길드에 돌아가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가 볼 만한 장소들을 재빨리 떠올렸다. 하지만 나라고 좋은 곳을 알 리가 없었다.
“글쎄요.”
민아린이 있었으면 좋은 장소를 알려 줬을 텐데. 아니면 권정한이나.
난 놀러 다녀 본 기억이 손에 꼽아서 우서혁에게 좋은 선택지를 제시해 주기가 어려웠다.
‘전화로 물어봐야 하나?’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고민이 길어지자 차에 시동을 건 우서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없으시면 이만 길드로 돌아가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그… 한강은 어떠세요?”
미련 없이 길드로 가려는 우서혁의 팔을 붙잡으며 급히 한강을 외쳤다. 과거 기억에서 쥐어짜 낸 것 중에 그나마 가장 그럴싸하고 무난한 장소였다.
“한강… 가고 싶으십니까?”
“네. 뭐 대단한 거 하기보단… 잠깐이라도 걷고 오죠. 저 케이크 두 개나 먹었더니 배가 너무 불러서 좀 걷고 싶습니다.”
한강이라면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설명을 덧붙이자 우서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하는 우서혁의 옆모습에서 어쩐지 기뻐하고 있다는 느낌이 풍겼다. 역시 그도 말로는 길드로 돌아가자면서 좀 더 놀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
금방 도착한 한강은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여러 가지 색으로 단풍이 예쁘게 물든 나무와 들꽃,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나온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와 우서혁도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놓고 산책로에 들어섰다. 낮에 비가 잠깐 와서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깨끗했다.
“적당히 근처만 걸어 볼까요?”
“네.”
목덜미를 쓸며 묻자 우서혁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우서혁과 나란히 한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시선 집중이 어마어마하네.’
스쳐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들 한 번씩 우서혁의 얼굴을 훑어보고 지나갔다. 우서혁의 외모나 풍기는 분위기를 보면 저런 반응도 이해가 되지만 조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우서혁은 제게 꽂히는 타인의 시선에도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었다. 혹시 익숙한 건가? 본인 외모뿐만 아니라 천사연의 수행 비서로 오래 일해 왔으니 이 정도 시선에는 무감각해질 만했다.
‘괜히 왔나?’
속으로 한숨을 삼켜 내며 뒤늦은 후회를 할 때였다.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한이결 씨.”
따듯한 체온이 물감처럼 손목에서 번져 나갔다. 나를 붙잡은 우서혁이 멈춰 서며 한강을 가리켰다.
“노을이 지고 있습니다.”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노을로 붉게 물든 한강과 들꽃이 보였다. 짙은 푸른색의 하늘은 해에 가까워질수록 보랏빛이 감도는 붉은색으로 변해 갔다.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자 한강 건너편에 세워진 건물들에도 하나둘 불이 켜졌다. 앞에 펼쳐진 전경을 보자 왜 사람들이 한강에 놀러 오는지 마음 깊이 공감이 갔다.
“예쁘네요.”
가만히 서서 오랫동안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풍경이었다. 줄어드는 노을빛을 구경하다가 우서혁에게 말했다.
“가끔은 이렇게 휴식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
“우서혁 씨에게 매번 여러 부탁을 드리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멋쩍게 미소 지으며 덧붙이자 잠시간 눈을 깜빡인 우서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에도… 같이 나와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말재주도 없고 센스도 없는 나와 함께 있어 봤자 재미없을 텐데, 우서혁이 다음에도 같이 와 달라고 얘기해 줘서 고마웠다.
다음에는 꼭 민아린이나 권정한과 함께 와야겠다. 그럼 한강 말고 더 재밌고 좋은 곳을 갈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노을을 마저 구경하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한강을 걸은 시간은 30분도 채 안 되고 노을만 구경하다 온 셈이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길드 정문 앞에 차를 세운 우서혁은 경호원에게 차 키를 넘기고 내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평소보다 가까운 거리감이 좀 의아했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라서 별말 없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저번에 들었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머, 한이결 능력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앨리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 곁에는 저번 회의에 참석했던 비서도 보였다. 이름이 테오라고 했던가.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외출했다가 방금 돌아오는 길인가 봐요?”
“네. 다시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앨리스 부마스터.”
“저도 너무 반갑네요.”
내 쪽으로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를 건네자 앨리스가 눈가를 좁혔다.
“레퀴엠 쪽에서 한이결 능력자의 스케줄을 도통 알려 주질 않아서 말이죠.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더군요.”
짜증을 담아 입가를 비튼 앨리스의 검은 눈동자가 나와 우서혁을 한 번씩 오갔다.
“오늘은 아예 길드를 비웠다고 천사연 마스터가 그러던데. 우서혁 비서와 같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인가 봐요?”
“…….”
뾰족한 가시가 돋아난 말에 나는 그제야 왜 우서혁이 갑자기 방으로 찾아와서 나가자고 했던 건지 이유를 깨달았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천사연이 우서혁에게 앨리스가 길드에 와 있는 동안 나랑 같이 밖에 나가 있으라고 시킨 거구나.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던 의문의 실타래가 순식간에 풀렸다.
우서혁을 시켜서 밖으로 내보낼 정도로 내가 앨리스와 만나지 않기를 바란 거냐고. 장난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것도 질투라고 쳐야 하나. 나중에 천사연과 따로 만나면 이 부분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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