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85. 리오 길드
“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가야 한다’라… 확실히 의미심장하긴 하군.”
박병석의 집에서 나온 우리는 하이드가 넘겨준 자료 속 피해자들의 집을 찾아가는 계획을 접고 길드로 되돌아왔다. 김우진과 함께 레퀴엠에 도착한 나는 즉시 천사연을 만나러 갔다.
대표실에 모인 팀원들에게 박병석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자 천사연이 복잡한 눈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들어가야 한다는 곳이 만약 게이트라면… 우리가 지금 알아보고 있는 사건과 일치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 하지만 지금으로선 섣불리 확정 지을 수 없어.”
천사연의 말도 맞았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 우리 또한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잘못된 추측으로 이상한 곳에 힘을 뺐다간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터질 수도 있으니까.
프라우스 신도단의 행적을 정확히 파악해서 계획을 막아 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이트를 빌리는 놈들이 프라우스 신도단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나와 천사연의 대화를 듣던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하이드라고 했나? 그 친구가 로헌에 무사히 입사하게 되면 우리가 의뢰한 일도 알아봐 줄 것 같은데.”
“네. 상황이 답답해도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정신 지배 능력에 당해서 강제로 프라우스 신도단의 일원이 되었던 박병석을 포함한 피해자들은 이제부터 로헌이 담당해서 한 명씩 만나 볼 것이다.
그들이 프라우스 신도단과 엮인 사람이라는 게 박병석을 통해서 확실해졌으니 나와 하태헌이 직접 돌아다녀서 괜히 얼굴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자칫하다간 우리의 활동 반경이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알려질 여지가 있었으니까.
프라우스 신도단의 꼬리를 잡는 게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막막한 심정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자 천사연이 이해한다는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급한 마음을 가져 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 일단은 두고 보는 거로 해야겠군. 그리고 내일 찾아올 손님이 한 명 있기도 하고.”
“손님이요?”
“호주에서 오는 손님이지.”
“호주? 혹시 에드워드가 말한 게이트 뒷돈 거래 사건과 관련된 사람인 겁니까?”
“어느 정도는.”
천사연이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우서혁이 들고 있던 서류 하나를 빼서 내게 넘겨줬다.
“리오라고 불리는 호주의 길드입니다.”
“리오… 소유하고 있는 게이트의 숫자가 제법 많네요. 이 중에서 하나를 뒷돈 거래자들에게 빌려준 겁니까?”
“예. 게이트를 빌려서 들어간 자들과 게이트 관리자를 모두 찾아내서 조사를 해 봤다고 하니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을 겁니다.”
“음…….”
그렇다고 해도 한국까지 와서 내용을 알려 줄 정도면 원래부터 레퀴엠과 교류가 있던 사이인 것 같은데. 서류에 나와 있는 리오 길드의 설명을 읽던 나는 다소 독특한 부분을 발견했다.
“소속 길드원의 80% 이상이 변신 능력자? 이거 정말입니까?”
“온 세계 변신 능력자가 거기 다 모여 있으니 사실이긴 하지.”
천사연의 느긋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우서혁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 길드에서 공개한 수치는 그 정도입니다만, 아마 제대로 따지면 90% 정도일 겁니다. 전 세계에서 저를 포함한 몇 명을 제외하면 모든 변신 능력자는 리오 길드 소속입니다.”
“대단하네요. 이런 길드가 있었군요.”
“그쪽은 리오가 꽉 잡고 있으니까. 대우도 좋아서 변신 능력자로 각성하면 리오 길드부터 알아보는 편이지. 리오 측에서 변신 능력자에게 적극적으로 스카우트를 제안하기도 하고.”
소파에 앉아서 대화를 듣던 민아린이 흥미로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럼 우서혁 비서님께도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었나요?”
“들어왔다 뿐일까.”
팔짱을 낀 천사연이 기분 나쁜 기색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지. 짜증 날 정도로 줄기차게 요청하더군. 우서혁 비서 개인에게도 따로 연락을 심심찮게 보냈었고. 근래에는 자기들도 바쁜지 좀 조용해졌지만.”
“우서혁 씨는 이미 레퀴엠 소속인데 개인에게 연락하는 건… 좀 예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 따지는 놈들이 아니야.”
단호한 천사연의 말을 박건호가 이어 갔다.
“확실히 리오라면… 그럴 만하군요. 거긴 양심에 털 난 놈들이 수두룩해서. 그리고 우서혁 비서가 그 귀하다는 S급 변신 능력자라 탐나기도 할 거고.”
나야 리오라는 길드를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박건호나 우서혁, 천사연은 전부터 나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S급 변신 능력자가 흔치 않긴 하네.’
한이결이 된 지도 시간이 꽤 지났으니 나도 적지 않은 능력자를 만나 본 셈인데, S급은 고사하고 변신 능력자 자체를 우서혁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우서혁을 바라봤다.
우서혁은 평소와 달리 시선을 슬쩍 피했다. 자기가 대화의 중심이 돼서 부담스러운가 보다.
“아무튼 리오 길드의 부마스터가 내일 도착할 예정이니 시간 맞춰서 회의실로 모이도록. 로헌에 들어갔다던 정보원이 국내 정보를 찾아 주는 동안 해외부터 알아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천사연의 깔끔한 정리에 동의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게 최선이었다.
***
한국을 찾아오는 리오 길드 부마스터의 이름은 앨리스로 S급 변신 능력자였다. 늑대인 우서혁과 달리 그녀는 백조였다.
능력을 사용하면 등에 새하얗고 커다란 날개가 생겨서 팬들은 엔젤이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서류에 첨부된 사진을 보니 정말로 천사 날개와 아주 흡사한 생김새였다.
내 옆에서 날개가 돋아난 뒷모습 사진을 함께 본 민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마디 했다.
“우와, 엄청 예쁘네요. 진짜 천사 같아요.”
“민아린 씨도 어제 처음 들으셨던 거면 리오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드인가 봅니다.”
“전 호주는 좀 낯설어서 그런 것 같기도… 일단 호주 1위나 2위 길드가 리오는 아니기도 하고요.”
하긴, 타 국가의 길드를 일일이 기억하는 건 쉽지 않긴 하지.
“리오 길드는 들어본 적 없지만, 앨리스 부마스터는 제법 유명하긴 해요.”
주방에서 쿠키를 들고나온 권정한이 나와 민아린 손에 하나씩 쥐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호주는 우리나라처럼 아이돌이나 배우를 좋아하듯이 능력자를 좋아하는 문화가 없는 편인데도 팬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신기하네.”
“뭐, 저도 듣기만 하고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권정한은 안 그렇게 생겨서 의외로 이런 정보에 빠삭하단 말이지. 쿠키를 입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이제부터 만날 사람이니 우리끼리 이러니저러니 떠들어 봤자 별 의미가 없었다. 만나서 직접 얘기를 나눠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
김우진과 민아린, 권정한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시간 맞춰 도착하자 회의실에는 우서혁이 미리 와 있었다.
“우서혁 씨, 좋은 오전입니다.”
“예.”
언제나처럼 덤덤한 모습의 우서혁을 보자 갑자기 살짝 걱정이 들었다.
우서혁은 리오 길드에서 보내온 수많은 이적 요청을 거절한 상황인데, 이렇게 만나도 되는 건가? 리오 부마스터가 또 부담을 주거나 괴롭히기라도 하는 거 아닌가?
우서혁이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좀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천사연이 잘 막아 줄 거라고 믿어도 괜찮으려나.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럼요. 우서혁 씨는요?”
“…했습니다.”
우서혁이 반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딱 봐도 안 먹었다는 게 티가 났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우서혁 밥도 안 먹이고 일을 시키는 건지. 하여간 천사연이 문제라니까.
우리가 각자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사연과 박건호도 회의실에 도착했다. 왜 둘이 같이 오나 했더니 아침 일찍부터 특수작전부 회의가 있었다고 한다.
“인재가 없는 걸 대체 나보고 어떡하라는 겁니까?”
“눈을 낮추면 주변에 널려 있을 거다, 박건호 팀장.”
“아니, 눈을 낮추면 그게 어떻게 인재입니까? 제 마음에 쏙 드는 인재는 한이결 이후로는 한 명도 없었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건호가 투덜거리자 천사연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 한이결? 레퀴엠 특수작전부 소속이 되어 보는 건?”
“안 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단호하게 거절하자 천사연이 그것 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진지한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회의실 광경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외부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회의실 입구를 지키던 수행원이 리오 길드 부마스터의 도착을 알렸다. 나는 수업 시간에 떠드는 학생처럼 행동하는 박건호의 팔을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한 후에 입구로 눈을 돌렸다.
곧이어 회의실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능력자가 들어섰다.
선두에 들어선 여자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블라우스와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다. 약간 처진 눈꼬리와 입가에 맺혀 있는 미소가 전체적으로 온화한 느낌을 풍겼다.
여자의 뒤로는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한이결과 비슷한 키의 남자는 특이하게도 주황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브리지 염색이 곳곳에 들어가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천사연 마스터.”
“어서 오십시오.”
리오 길드 부마스터 앨리스가 가녀리고 청아한 목소리로 천사연에게 인사를 보내왔다. 회의실 내부를 가볍게 둘러본 앨리스가 남자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제 개인 경호원이자 비서인 테오라고 해요.”
나긋나긋한 말투와 어울리는 몸짓은 조용하고 우아했다. 능력을 쓰면 백조로 변한다고 했었지.
‘뭔가… 내 상상과는 많이 다른데?’
우서혁에게 막무가내로 스카우트 제안을 보내고 양심에 털 난 놈들이 많다고 하길래 좀 더 뻔뻔한 타입일 줄 알았더니.
이러면 예상보다 회의 진행이 좀 수월하겠다, 그렇게 생각한 그때였다.
“우서혁 비서도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죠?”
“예.”
“소식은 전해 들었어요. 천사연 마스터 곁에서 여전히 많은 고생을 하고 계신다고.”
“손은 놓고 말씀하십시오.”
우서혁의 손을 덥석 붙잡은 앨리스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우서혁을 바라봤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뒤에 서 있는 테오라는 남자에게 파일철을 건네받은 앨리스가 그걸 우서혁에게 억지로 쥐여 줬다.
“이따가 시간 나면 천천히 읽어 보세요. 우리 리오 길드로 오게 되면 우서혁 비서가 받을 수 있는 이점과 계약 사항들이에요.”
“…….”
이어지는 앨리스의 얘기를 들은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지금 대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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