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33화 (333/394)
  • 333화

    84. 추적

    모두가 혼란에 빠진 사이에 셔츠 단추를 전부 다 푼 한이결은 멍한 눈을 하고서 벨트에 손을 가져갔다.

    철컥, 거침없이 풀리는 벨트 소리에 속으로 비명을 내지른 김우진이 허겁지겁 달려와 한이결의 손을 붙잡았다.

    “한이결. 더우면 방에 가서 옷 갈아입자, 응?”

    울고 싶은 심정으로 억지로 웃으며 말하는 김우진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김우진을 잠시간 바라보던 한이결이 벨트에서 손을 천천히 뗐다.

    그래도 말은 통하는 상태인가? 김우진이 안도한 그때였다. 한이결의 손이 그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

    그러고는 쓱쓱 쓰다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한이결이 쓰다듬기 편하도록 고개를 숙였던 김우진은 곧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한이결?”

    김우진이 불러도 한이결은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거로 한이결에게 완벽하게 제압당한 김우진의 모습에 결국 하태헌이 몸을 일으켰다.

    “그만해라.”

    열심히 김우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한이결을 번쩍 들어 안은 하태헌이 그를 마치 짐짝처럼 한쪽 어깨에 짊어졌다.

    “하태헌 씨… 저 쏠려요…….”

    “위층 방에 던져 두고 오겠다.”

    칭얼거리는 한이결을 무시하며 천사연에게 통보를 날린 하태헌은 곧장 거실을 빠져나가 계단을 올라갔다. 피이익! 한이결의 곁에 누워 있던 여우도 재빨리 일어나 뒤를 따라갔다.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던 천사연이 우서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서혁 비서.”

    “……예.”

    “내 기억력이 안 좋아졌나… 저번 보고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던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따로 챙겨 주는 보너스는 잘 받아 가면서 이런 식으로 배신하다니. 마음이 참 아프군.”

    “…죄송합니다.”

    “박건호 팀장이랑 사이도 나쁘면서 이럴 때는 둘이 죽이 참 잘 맞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저는 왜…….”

    무표정한 얼굴로 앵무새처럼 사과만 뱉어 내는 우서혁과 짐짓 억울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박건호 사이로 민아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팀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인 한이결이 술에 취해서 자러 갔으니 모임도 여기서 끝이었다. 천사연에게 혼나고 있는 우서혁과 박건호를 구경하며 민아린은 제 앞에 있는 술병들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천사연이 부하들을 열심히 혼내는 동안 하태헌은 저번에 한이결이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깨에 대롱대롱 걸쳐진 채로 축 늘어진 한이결을 푹신한 침대 위에 내려 줬다.

    “한이결.”

    하태헌의 부름에 한이결이 머리를 들었다. 뺨에 붉은 기가 살짝 감도는 것을 빼면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단추가 완전히 풀어진 셔츠와 고리가 풀린 벨트. 한이결의 차림새를 찬찬히 살핀 하태헌의 시선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한이결의 얼굴로 향했다.

    “한이결.”

    “네.”

    혹시나 해서 이름을 불러 보면 곧장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피곤한지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아직도 덥나?”

    “네, 덥습니다.”

    “술 마셔서 그런 거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라. 맨몸으로 자지 말고.”

    안 그래도 다른 A급보다 몸도 약하면서 옷을 자꾸만 벗으려고 하는 게 걱정스러웠다. 그는 허구한 날 감기나 몸살로 앓아눕곤 했으니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저번에도 입었던 잠옷을 하태헌이 대신 찾아 주는 동안 한이결은 얌전히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셔츠와 바지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멀뚱히 앉아 있는 한이결을 마주하고서도 하태헌은 별다른 반응 없이 파자마를 건네주고 입는 것을 도왔다.

    하태헌으로서는 한이결의 몸은 이미 익숙한 터라 새삼스럽게 놀랄 이유가 없었다. 권세현으로 변한 상태라면 모를까.

    문제없이 옷을 갈아입힌 하태헌은 방에 딸린 욕실에서 칫솔에 치약을 묻혀 왔다. 한이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칫솔을 내밀자 그가 순순히 입을 벌렸다.

    술에 취하면 덥다며 옷을 벗는 버릇도 문제였지만, 상대가 뭘 하든 받아들이는 이 태도도 마찬가지로 문제였다. 한이결이 낯선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졌다.

    간단하게 씻은 한이결을 번쩍 들어서 침대에 눕힌 하태헌은 내친김에 이불까지 끌어와 가슴 위로 덮어 줬다. 술기운에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온 데다 순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이결은 마치 고등학생 같은 앳된 느낌이 났다.

    피익, 하태헌의 기운이 싫어서 방구석에 앉아 있던 여우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한이결 머리맡에 누워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이결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여우가 꽤 든든하게 느껴져 하태헌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만 자. 자고 일어나서 혼날 각오도 하고.”

    “저, 하태헌 씨.”

    “뭐지?”

    백지 같은 얼굴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내내 인형 같던 한이결이 보이는 감정에 하태헌 또한 의아한 마음이 생겼다.

    “사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해라.”

    “그…….”

    한이결이 눈가를 찌푸리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불그스름하던 뺨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다.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에 불안이 한가득 담겼다. 대체 할 얘기가 뭐길래 술에 취한 와중에도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나중에 하고 일단 자라. 중요한 얘기면 제정신일 때 듣는 게 나으니까.”

    “……예.”

    궁금했지만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한이결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태헌이 커다란 손으로 눈을 가리자 한이결도 고분고분 눈을 감았다.

    평온한 숨을 내쉬는 한이결을 잠시간 응시하던 하태헌이 작게 속삭였다.

    “잘 자라, 한이결.”

    ***

    감은 눈 너머로 화사한 햇살이 닿아 오는 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이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가 눈을 떴다.

    피익!

    내가 일어났다는 걸 알아챈 여우가 따듯한 혀로 뺨을 핥아 왔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기분이…….’

    너무 상쾌한데? 상체를 일으키곤 시야를 가리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천사연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사용했던 익숙한 방이었다.

    “으음.”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난 다음이면 항상 꿈자리도 사납고 몸도 피곤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괜찮지? 꿈을 안 꾸고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아니면… 편한 사람들하고 마셔서, 긴장을 안 해서 그런 건가?

    ‘편한 사람들이라 해도 필름 끊긴 건 문제지만.’

    엘로힘이 마지막으로 준 와인을 끝으로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와인을 한 모금 삼킬 때까지만 해도 버텼던 것 같은데. 아닌가? 두 모금인가?

    머리를 부여잡고 으으, 신음을 흘리다가 침대 밖으로 나왔다. 일단 씻자. 씻고 나서 생각하자.

    욕실로 들어가 재빨리 씻고 나온 뒤에 테이블에 올려 있는 어제 입은 셔츠와 바지를 다시 입었다. 대체 어느 정신에 옷을 갈아입고 누운 건지도 모르겠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어쩐지… 방 밖으로 나가기가 좀 무서웠다. 정황상 필름이 끊긴 사이에 옷을 벗는 술버릇이 고스란히 나온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낯으로 모두와 마주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웬만하면 술버릇을 알고 있던 박건호나 우서혁부터 만나서 상황 설명을 듣고 싶은데. 그래도 이른 아침이고 2층이니까 조심스럽게 나가면 다른 사람들을 최대한 적게 마주칠지도 모른다.

    가까이 다가온 여우를 품에 안으며 각오를 마치고 손에 힘을 주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방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복도가 보이자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인사를 해 왔다.

    “좋은 아침.”

    “허억……!”

    깜짝이야! 벽에 기댄 채로 커피잔을 들고 있던 천사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날 보며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기가 막혀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미친… 너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어젯밤에 옷을 화려하게 벗어 던지던 우리 주인공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

    비꼬듯 나온 대답에 할 말이 싹 사라졌다. 어이없는 마음을 담아 노려보자 천사연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래서, 잠은 잘 잤나?”

    “잘…….”

    “굳이 묻지 않아도 안색을 보아하니 아주 잘 잔 것 같군.”

    “…….”

    입은 웃고 있어도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 보이는 천사연의 태도에 식은땀이 났다. 길이 가로막혀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녀석과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나는 결국 먼저 항복했다.

    “불가항력이었어.”

    “누가 뭐라고 했나?”

    “네가 지금 눈으로 욕하고 있잖아.”

    “들켰군.”

    “비켜.”

    쓸데없는 대화에 시간만 낭비됐다. 천사연의 어깨를 팍 밀치며 계단으로 걸어가자 그가 입을 손으로 가리며 쫓아왔다.

    “난 걱정돼서 얘기한 건데. 이렇게 매정한 반응이라니, 정말 가슴이 아파져 오는…….”

    “아, 좀!”

    천사연과 티격태격하면서 거실로 내려오니 김우진이 주방에서 후다닥 뛰어나왔다. 민아린과 권정한도 거실 소파에서 뉴스를 보다가 나를 반겼다.

    “이결 씨, 잘 잤어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형.”

    “예에. 좋은 아침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보내오는 인사들에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며 대답했다.

    다들 왜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깨어 있는 거지? 천사연이 아니더라도 박건호나 우서혁을 몰래 만나는 건 불가능했구나.

    “한이결, 이거 마셔.”

    김우진이 건넨 것은 따듯한 꿀물이었다. 어제는 칵테일을 주고 오늘은 꿀물을 주다니. 딱히 숙취는 없었지만 준비해 준 정성이 있으니 군말 없이 받아 마셨다.

    ‘얘는 꿀물도 잘 만드네.’

    요리 잘하는 건 알았지만 설마 평범한 꿀물도 맛있게 만들 줄이야. 꿀물을 열심히 비우는데, 정원에 나갔던 엘로힘이 안으로 들어왔다.

    “잘 잤니, 세현아?”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엘로힘의 등장에 눈가가 절로 좁혀졌다. 내 불만 어린 표정을 본 엘로힘이 어깨를 으쓱였다.

    “엘…….”

    “어차피 술버릇 같은 건 평생 숨길 수 없지 않니?”

    “다 알면서 와인을 주신 게 나쁜 건데요.”

    “그래도 맛있게 잘 마셨으니까 한 번만 봐주렴. 안타깝게도 맛있게 마신 기억은 사라진 것 같다만…….”

    “…….”

    뻔뻔한 사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엘로힘이 아무리 애처롭게 바라봐도 와인을 거절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 우리 팀 주정뱅이가 드디어 일어났군.”

    “한이결, 몸은 좀 어떻지?”

    “한이결 씨. 혹시 몰라서 숙취 해소제를 사 놨으니 필요하면 드십시오.”

    그사이에 밖에 나갔던 박건호와 씻고 나온 하태헌, 우서혁도 거실로 들어오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내 몸 상태를 체크하는 모습에 두통이 일어났다.

    어제 계획했던 두 번째 파티는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접어 넣었다. 이 상황에서 다시 술 파티를 열었다간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괜찮냐는 소리도 같이 들어야 할 텐데, 도저히 버틸 용기가 나지 않았으니까.

    ‘이놈들이랑 다시는 술 안 마신다, 진짜로…….’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3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