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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32화 (332/394)

332화

“한이결.”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김우진이 무언가를 든 채로 후다닥 달려왔다. 내가 돌아오기를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거 마셔 봐.”

“뭔데?”

잔에는 어떻게 만든 건지 붉은빛이 감도는 술이 담겨 있었다. 칵테일을 만든 건가?

어리둥절한 내 모습에 뺨을 살짝 붉힌 김우진이 수줍어하며 말했다.

“소주 섞은 콜라 별로라고 했잖아. 그래서 만들어 봤어.”

“오, 진짜?”

한 모금 마셔 보니 적당히 달달하고 상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박건호가 대충 만들어 준 콜라보다 훨씬 맛있었다.

“어떻게 만들었어?”

“주스랑 술 적당히 섞어서. 어려운 건 아니야.”

잠깐 머뭇거리던 김우진이 재차 입을 열었다.

“가게에서 배운 거야. 그, 바텐더 있었잖아. 목에 타투를 한…….”

“…….”

이어지는 설명에 나 또한 김우진과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 둘이 제법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곤 했었지.

나도 모르게 나오는 쓴웃음을 억지로 지우며 김우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맛있네. 고마워, 잘 마실게.”

이제 와 떠올려 보면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현재의 내 소중한 사람들이 과거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웃고 떠들었다는 게.

물론 그만큼 끝은 고통스럽고 끔찍했지만…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막아 낼 수 없는 사건이었고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 무거운 마음은 조금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우진에게 받은 칵테일 잔을 홀짝이며 자리로 돌아오자 텅 빈 술병들이 거실에 뒹굴고 있었다. 그 많던 술이 반 이상이 사라지다니…….

나는 술을 물처럼 끝도 없이 들이켜고 있는 박건호와 천사연을 노려봤다. 그 앞에 앉아서 잔을 채워 주는 대로 냉큼 마시는 하태헌과 우서혁도 똑같았다.

“아하하, 정말요?”

평소보다 반절 정도 높은 톤으로 화사하게 웃는 민아린 또한 취기가 올라온 게 확실했다. 시간도 꽤 흘렀고 테이블에 놓인 음식도 어느 정도 바닥을 보이니 슬슬 타이밍을 봐서 자리를 정리해도 좋을 듯했다.

‘본래 목적을 달성하긴 한 건가……?’

나는 천사연과 하태헌, 박건호와 우서혁을 유심히 살펴봤다. 하지만 네 명 다 계속해서 술을 들이켜고 있을 뿐, 조금도 취해 보이지 않았다.

좀 취해야 솔직한 마음도 털어놓고 가까워질 계기가 좀 생길 텐데 답답해 죽겠네. 이 자리를 만든 이유나 다름없는 네 명이 달라질 기미가 없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됐다, 어떻게 첫술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겠어. 그래도 이번에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으니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두 번째 시도를 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두 번째 파티를 계획하며 김우진 표 칵테일을 마시자 술잔이 금방 비었다. 작은 잔이 아니라 양이 꽤 됐을 텐데, 마시는 속도까지 빨라서 그런지 다 마시자 머리가 띵하게 울려 왔다.

‘이제 더 마시면 안 되겠어.’

몸에 한계가 왔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술이 너무 맛있어도 문제네. 주량만 받쳐 줬으면 김우진한테 부탁해서 한두 잔 정도는 더 마시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달래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이 자리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싱그러운 백합 향이 코끝을 스쳐 왔다. 사라락, 실내 불빛에 비친 엘로힘의 기다란 은발이 반짝였다.

“세현아.”

“예?”

날 보며 빙긋 웃는 엘로힘의 얼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뭐지? 기분 탓인가?

“사실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단다.”

“보여 주고 싶은 거요?”

엘로힘이 깨끗한 새 잔과 테이블 구석에 놓인 물병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잔에 물을 반절에서 조금 더 넘게 채웠다.

“예전에 신전에서 함께 지낼 때는 이미 만들어 둔 게 많아서 못 보여 줬었지.”

투명한 잔에 담긴 물이 잘 보이도록 엘로힘이 팔을 들어 올렸다. 곧이어 잔에 담겨 있던 물에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하더니 빠른 속도로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물은 짙은 적색으로 완벽하게 변했다. 그 상태로 엘로힘이 잔을 내게 건네주었다.

“이거 설마… 와인입니까?”

“그래.”

잔을 받자마자 씁쓸한 와인 향이 가득 풍겨 왔다. 살면서 처음 보는 기상천외한 광경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평범한 물이 이렇게 향이 좋은 와인으로 변하다니.

“우와, 너무 신기해요. 이것도 능력인가요?”

“나와 엘라하만이 가진 힘이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민아린에 이어서 박건호가 물었다.

“많은 술 중에서 하필 포도주라… 지극히 종교적이군요. 혹시 다른 술도 가능합니까?”

“아니. 오로지 저 술 하나만 가능하단다.”

신전에서 지낼 때 딱 한 잔 마셔 봤던 와인이었다. 엄청 맛있었는데. 내가 반사적으로 입맛을 다시자 엘로힘이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마시렴, 세현아.”

“네?”

“내가 주는 선물이란다.”

선물이라고? 하지만 이미 취기가 한계까지 올라온 상태인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제가 이제 술은…….”

“저번보다 일부러 더 연하게 만들었단다.”

“…….”

엘로힘이 기대가 담긴 표정으로 시선을 맞춰 왔다. 난감함이 몰려와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예상대로 다들 궁금한 기색을 한 채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술잔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

그간 좀 편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엘로힘은 나보다 훨씬 윗사람…이나 다름없는 존재고, 이번 일에서 우리 대신 대가까지 치러 주면서 도와준 데다 일부러 연하게 만들었다는데.

벼락을 맞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지던 엘로힘의 모습이 자꾸만 내 양심을 콕콕 찔러 왔다. 그렇게 고생해 놓고 우리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찾아와 준 엘로힘이 고마워서 도저히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고민 끝에 대답하자 엘로힘의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우서혁이 이마를 짚었고 박건호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내 술버릇을 알고 도와주던 두 사람의 반응에 면목이 절로 없어졌다.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내가 만든 와인을 좋아하잖니.”

“예에…….”

좋아한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저번에 신전에서 처음 마셔 봤을 때,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와인은 처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억지로 받게 된 지금 상황에서도 솔직히 조금 기뻤다. 그만큼 엘로힘의 힘으로 만들어진 와인은 완벽했다.

눈물을 삼키며 잔에 입을 댔다. 짙은 와인 향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

엘로힘의 와인을 받아 든 한이결을 본 우서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김우진이 준 술을 마신 한이결은 딱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살짝 달아오른 두 뺨과 묘하게 흐느적거리는 몸이 한계라는 걸 알려 줬다.

거기에 딱 봐도 도수가 높아 보이는 와인을 받아서 마시고 있으니 이미 한계는 넘은 지 오래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은 얌전히 앉아서 술만 마시고 있다는 거지만.

사실 우서혁은 한이결이 와인을 받지 않기를 바랐다. 자기도 모르게 목 끝까지 올라온, 마시지 말라는 만류를 힘겹게 삼켜 낸 건…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이성 덕분이었다.

자신이 한이결과 무슨 사이라고 감히 막겠는가. 한이결이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었으니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최대한 고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뿐이었다.

“한이결, 괜찮나?”

한이결의 맞은편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천사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상태를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살피는 건 우서혁만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는 엘로힘을 제외한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이결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담은 채로 그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연히 괜찮죠.”

자연스럽게 나온 대답은 평소와 똑같았다. 담담한 목소리나 천사연을 정확히 응시하는 눈동자, 흔들림 없는 손도 술에 취한 사람 같지 않게 멀쩡했다.

혹시 진짜로 괜찮은 건가? 우서혁이 한 줄기 희망을 품은 그때였다.

눈을 깜빡이던 한이결이 천사연을 향해 갑자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르르 지은 미소는 빛이라도 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

제게로 대뜸 쏟아진 애정이 어린 미소에 천사연도 적잖이 놀랐는지 반응을 하지 못하고 넋을 놓았다. 그 꼴을 본 팀원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취한 거 맞네.’

속이 복잡해진 우서혁이 이마를 쓸어 만졌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마른세수하는 박건호와 같은 심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한이결이 대답할 정신은 남아 있다는 거였다. 와인도 그새 반절 이상 마셨는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남은 와인을 마시고 욕실로 들어가든 침실로 들어가든 뭐든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결 씨, 괜찮은 거 맞아요?”

“물론입니다.”

민아린도 술을 많이 마셔서 제정신이 아닐 텐데, 그 와중에도 한이결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아챘는지 걱정을 해 왔다. 놀랍게도 한이결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또다시 멀쩡히 대답했다.

“한이결, 일단…….”

불안해하던 박건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에 든 와인이라도 내려놓으라고 참견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달칵.

박건호가 말하기도 전에 한이결이 먼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아주 당연하다는 것처럼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한이결.”

“예?”

그 충격적인 광경에 눈가를 좁힌 하태헌이 무언가 확인하듯 느리고 정확하게 질문을 던졌다.

“왜… 갑자기 단추를 푸는 거지?”

한이결은 현재 상의를 흰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그걸 본인도 뻔히 알 텐데,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기색으로 답했다.

“더워서요.”

“…….”

대답을 들은 하태헌은 어디서부터 뭘 지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막힘없이 단추를 풀어 내리는 한이결은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제 몸을 봤다는 말에 경악하고 질색하더니 술에 취하면 옷부터 벗는 버릇을 갖고 있던 건가. 어쩐지 두통이 밀려와 하태헌은 우서혁과 마찬가지로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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