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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31화 (331/394)

331화

맥주 없이 시작된 술자리는 의외로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다.

9명이나 모인 만큼 커다란 테이블 두 개를 붙였는데도 자리가 빈틈없이 꽉 찼다. 얼떨결에 가운데에 앉게 된 내 양옆으로는 박건호와 우서혁이 앉았다.

차라리 잘됐다. 내 술버릇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니 취하지 않도록 도와줄 가능성이 제일 컸다.

‘솔직히 박건호는 믿기 좀 어렵지만…….’

저 재미주의자 인간이라면 모를까, 소란을 싫어하는 우서혁은 든든한 아군이 확실했다. 나는 내 앞에 잔을 놔주는 우서혁에게 신뢰의 미소를 보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미소를 본 우서혁이 묘한 표정으로 물어 왔지만 남들 다 있는 앞에서 구구절절 설명해 줄 수는 없으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콜라랑 오렌지 주스 중에서 어느 게 더 좋으세요?”

“저는 오렌지 주스요.”

나란히 앉은 민아린과 에드워드가 귀여운 대화를 나누며 잔에 주스를 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옆에 앉아 있는 박건호가 새 잔을 꺼냈다.

“자, 우리 한이결 능력자의 몫은 여기.”

맥주잔에 콜라와 소주를 부어 넣은 박건호가 그 잔을 내 앞에 놔주었다. 콜라가 거의 85% 이상 채워져 있어서 술이라고 부르기엔 우스울 지경이었다.

‘장난 안 치고 도와주려나 본데.’

솔직히 박건호라면 콜라와 소주를 반반씩 섞거나 소주량을 더 많게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내가 취하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건가 보다. 웬일인가 싶었지만 나야 나쁜 건 없었다.

“한이결 술은 왜 그 모양이지?”

나와 같은 맥주잔에 양주를 한가득 따라 낸 천사연이 콜라가 담긴 내 잔을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으쓱이는 박건호를 대신해서 말했다.

“관심 끄시죠.”

“바로 앞에서 이상한 걸 만들어 마시는데 어떻게 관심을 끄지?”

“박건호 팀장님이 맥주만 빼고 사 와서 어쩔 수 없습니다.”

천사연의 시선이 쌓여 있는 술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맥주가 없군. 주량이 약한 편인가?”

“…이 몸은 그렇더라고요.”

많은 의미가 담긴 짧은 대답에 팀원들의 눈길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뭐야? 갑작스러운 주목에 당황한 내게 민아린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결 씨, 그럼 원래 몸은 술을 더 잘 마셔요?”

“아무래도… 그렇죠. 술집 운영까지 했으니까요. 술 마실 일도 더 많았습니다.”

“지금 몸은 주량이 어느 정도인가요?”

“소주 한 병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저번에…….”

아차. 무심코 설명하던 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소 어색하게 찾아온 정적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천사연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한이결이 된 이후로 술을 마셔 본 적 있나 보군.”

“…어쩌다 보니 조금.”

“혼자 마셨을 리는 없고. 누구랑?”

“…….”

“근데 술을 마실 틈이 있었어요? 항상 방에 계셨잖아요. 아, 혹시 우진 씨랑?”

“아뇨. 전 한이결이랑 술 마신 적 없습니다.”

“…….”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식은땀이 절로 났다. 내가 실수했으니 수습도 내가 해야 하는데, 대체 이걸 어떻게 해명해야 무난히 넘어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끝까지 입술을 다물고 있자 맥주잔을 소주로 반절 정도 채운 권정한이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에이, 형도 성인 남자인데 여자들과 술을 마시러 갈 수도 있죠. 굳이 파고들지 말고 적당히 넘어가 주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뭐?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상상도 못 한 발언을 듣고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민아린이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사과를 보내왔다.

“아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이결 씨. 여자들과 술을…….”

“예? 아니에요. 아닙니다!”

여자들하고 마시긴 뭘 마셔? 지금 양옆에 앉아 있는 이 곰 같은 놈들하고 마셨는데!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이만큼 억울하진 않았을 거다.

박건호, 우서혁과 마신 적이 있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긴 하지만… 그럼 술 취했을 때 내가 보였던 행동도 언급될 위험이 커진다.

그래서 일부러 얘기 안 했던 건데. 어차피 놀림당하게 된 거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낫겠다.

“박건호 팀장님이랑 우서혁 비서님과 마신 겁니다. 벌써 몇 개월은 지난 일이에요.”

쓸데없는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간결하게 답하자 우서혁과 박건호가 덧붙여 설명했다.

“당시 한이결 씨는 납치 사건을 겪은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혼자서 외출하도록 두는 건 불안했습니다.”

“술도 한두 잔 마시고 끝냈었지. 제대로 따져 보자면… 한이결 능력자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 한 번 경험으로 정확하진 않아 보이는데.”

이 두 명과 따로 술을 마셨던 일은 하태헌을 포함해서 지금껏 아무한테도 말 안 했던 건데 이렇게 밝혀지는구나. 우리를 흥미롭게 쳐다보던 민아린이 입을 열었다.

“몸이 달라지니까 주량 같은 사소한 부분도 변하는군요. 그럼 지금 예전 몸으로 변하면 주량도 늘어날까요?”

“…아마요? 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주량 확인하자고 이 자리에서 기운을 쓸 수도 없는 터라 진실은 나도 모른다.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자 천사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어 왔다.

“술버릇은?”

“…….”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내 모습을 본 팀원들의 눈빛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나 또한 파스타가 담긴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빙긋 웃어 보이는 엘로힘 때문에 난감해 죽을 지경이었다.

‘괜히 모인 거 같다…….’

술자리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후회가 밀려왔다.

***

모두가 ‘파티’라고 지칭한 이 모임은 밤 11시가 넘도록 이어졌다.

술 대신 음료수를 마시며 자리를 지키던 에드워드는 졸음을 못 이기고 먼저 자러 들어갔다. 술자리 내내 쿠키를 받아먹으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여우도 지루해졌는지 소파 구석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았다.

소주가 섞인 콜라 두 컵, 소주 두 잔 정도 마신 나는 슬슬 밀려오는 취기에 바람이라도 쐬고자 몸을 일으켰다.

‘대충 어림잡아 소주 넉 잔 정도 마신 건데 이 정도면… 정말로 한 병이 한계인가 본데.’

살짝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정원으로 나가자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구름이 흘러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상대가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벌써 취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슬리퍼를 신고 박건호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에는 술이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무슨 바람 쐬러 나와서까지 술잔을 들고 있습니까?”

“별생각 없이 들고나온 건데. 탐나면 주고.”

“필요 없습니다.”

딱 잘라 거절하자 박건호가 픽 웃었다.

“하긴, 위스키라서 우리 한이결 능력자한테는 조금 강하겠는데.”

이놈의 주량 놀림은 한참 가겠네. 쉬러 나와서 하필 박건호를 마주친 나는 그냥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래, 이것도 기회인데 이참에 하려던 말이나 해야겠다. 그간 정신없어서 박건호와 단둘이 대화를 할 만한 타이밍이 없었던 탓에 시간이 좀 지난 문제긴 하지만.

“술은 됐어요. 그보다 팀장님께 사과할 일이 있습니다.”

“나한테 사과할 일이라고?”

박건호가 꽤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박건호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이해는 됐다.

“미술관에 가기 전에… 제가 천사연 마스터의 과거가 담긴 책을 봤었는데, 기억하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책으로 누군가의 과거를 본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되기는 해도.”

“자동으로 재생되는 영상을 보는 거랑 비슷하다고 여기면 될 겁니다.”

잠시 머뭇거린 뒤에 이어 말했다.

“박건호 팀장님도 오래전에 한국으로 넘어와서 레퀴엠에 들어가셨더라고요. 초기 멤버로요. 천사연 과거를 보다가 알게 됐습니다.”

“흠, 맞아. 그때 마스터는 참 귀여웠지. 근래에는 그 맛이 사라져서 참 아쉽군. 시간을 반복해서 살고 있다고 했으니 사라져도 이상할 건 없다만.”

“뭐… 귀엽긴 했죠. 전 아주 어릴 때부터 봤습니다.”

“아주 어릴 때면 몇 살 정도지?”

“7살쯤이요. 요만한 애가 뛰어다니는데 완전 귀여웠…….”

…잠깐, 왜 갑자기 천사연 귀엽다는 얘기로 넘어간 거지? 헛기침하며 딴 곳으로 새어 버린 대화 주제를 다시 돌렸다.

“크흠, 과거를 볼 때 팀장님의 이야기도 같이 들었습니다.”

“내 이야기라… 뭐 특별할 건 없을 텐데.”

“천사연과 둘이 맥주를 마실 때였습니다. 그…….”

어떻게 설명을 해야 박건호가 놀라거나 불쾌해하지 않을까. 일단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셨는데, 제가 그걸 봤습니다. 여동생… 이야기인 것 같았습니다.”

“아아.”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은 채로 듣던 박건호는 여동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불편해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태도는 생각보다 더 담백했다.

“그런 문제라면 사과할 필요 없지. 상대의 과거를 동의 없이 봐 버린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죄송합니다. 지금에서야 설명해 드리는 것도요.”

사과를 들은 박건호가 쓰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여동생은… 좋지 않은 과거인 건 맞지만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이야. 만약 그때 마스터뿐만 아니라 네가 함께 있었어도 난 똑같이 말했을 거다. 그러니 더 신경 쓰지 말도록.”

“…….”

그 자리에 내가 있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라는 박건호의 위로가 마음에 박혀 왔다. 가슴 속에 깃털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생소한 감정이 밀려와 곧장 대답하지 못하는 내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은 박건호가 이내 입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닌가? 이렇게라도 신경 쓰는 게 나은 건가?”

“…혼자서 뭐라는 겁니까? 손 치우세요.”

“이런.”

그래도 날 어린애 취급하는 건 짜증 나서 머리 위에 올려진 박건호의 손을 깔끔하게 쳐 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한이결은 외모에 문제가 너무 많았다.

내 원래 모습이었으면 머리 쓰다듬는 건 절대 못 했을 거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박건호보다 1살 연상이다!

“정리하자면 과거는 괜찮으니 나 자체에 신경을 좀 더 써 달라는 거지. 요즘 날 너무 홀대하는 거 아닌가? 섭섭하게.”

“팀장님은 원래 홀대했는데요. 아무튼 얘기 끝났으니까 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여간 천사연이나 박건호나 조금만 긴장을 풀면 바로 장난질이라니까. 혀를 차며 정원을 빠져나가는 내 뒤로 박건호가 냉큼 따라붙었다.

“이것 봐. 같이 들어가자고 하면 얼마나 좋아? 꼭 이렇게 사람을 버리고 혼자 들어가 버린다니까.”

“조용히 하세요.”

이쯤이면 일부러 괜찮은 척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한숨을 속으로 삼켜 내며 박건호와 나란히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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