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83. 즐거운 파티?
병실에서 지내며 계속 김우진의 곁에 있어 준 나는 녀석의 퇴원과 함께 23층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 뒤를 따라 방에 들어온 김우진은 언제나처럼 냉장고부터 살폈다.
“상한 음식은 딱히 없네. 지금은 배 안 고프지?”
“응, 괜찮아.”
간단하게 대답한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봤다. 따스한 낮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미국에서 건너와 바로 천사연의 집으로 갔고, 그 후로 여러 사건을 겪느라 23층 방을 오래 비웠다.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끌려간 김우진을 구하러 가기 직전에 잠깐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제대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드는 건 지금이었다.
드디어 평온한 일상이 돌아왔다. 이제 남은 건 우리 대신 대가를 치르고 고생하고 있을 엘로힘과 엘라하, 그리고 여우의 소식이었다. 회복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으니 침착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아도 불쑥 치솟는 걱정은 어쩔 수 없었다.
“한이결.”
한참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방을 꼼꼼히 살피던 김우진은 어느 정도 정리를 끝냈는지 내게 걸어와 말했다.
“나도 내 방 좀 갔다 올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 맞아. 김우진도 자기 방이 따로 있었지? 내 방에서 지내는 게 워낙 자연스러워서 잠깐 잊었다.
“그래. 다녀와.”
“금방 올 테니까…….”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보던 김우진은 말을 끝맺지도 않고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방을 나갔다. 김우진과 서로 감정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키스를 한 이후로 자주 저런 행동을 하는 터라 그리 놀랍진 않았다.
혼자 방에 남은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만끽했다. 창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며 따듯하고 느긋한 분위기가 몸의 긴장을 절로 풀어 줬다.
노곤한 기분에 졸음이 살짝 밀려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현관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직 10분도 안 지난 거 같은데 김우진이 벌써 돌아왔나. 늘어지게 하품하며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형.”
방을 찾아온 손님은 놀랍게도 김우진이 아니라 권정한이었다. 과일 바구니와 커피 캐리어를 든 채로 활짝 웃은 권정한이 당황한 나를 밀며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왔다.
“뭐야? 네가 어떻게 여길 왔어?”
“김우진 선배님 병실로 갔는데 퇴원하셨다고 들어서 여기로 와 봤어요. 이건 김우진 선배님 선물.”
권정한이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내게 넘겼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든 나는 짙게 풍기는 과일 향을 맡으며 권정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했다.
“몸은 괜찮은 거야?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그럼요. 다친 건 벌써 다 완치됐죠.”
프라우스 신도단원이 휘두른 무기에 어깨를 찔렸던 권정한은 레퀴엠 길드로 건너오자마자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몸은 힐러의 힘으로 치료가 됐어도 다쳤을 당시 신체에 가해진 충격과 과다한 출혈 때문에 하루 더 입원했다. 그 뒤로는 정식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이틀 정도는 더 쉬고 오는 게 나을 텐데.”
“답답하고 좀이 쑤셔서 안 되겠더라고요. 다들 걱정되기도 하고. 민아린 힐러님은 아직 쉬는 중인가요?”
“응.”
민아린도 권정한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집으로 돌아간 상황이다. 과하게 소모된 기운은 다른 힐러에게 받아 보충했지만,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상태에서 김우진을 무리하게 치료한 탓에 또 한 번 쓰러졌었으니 휴식이 필요했다.
길드 내 병실보다는 가족이 있는 집이 몸도 마음도 편할 테니 좋은 결정이었다.
“들어와.”
권정한의 건강이 염려스러워도 여기까지 찾아온 상대를 다시 집으로 가라고 내쫓을 수는 없었다. 나와 함께 거실로 들어온 권정한은 방 안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엄청 오랜만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23층 방은 형이 없으면 열리지 않으니까 오랜만인 게 맞겠지만.”
“나도 너 오기 전까지 그 기분 똑같이 느꼈다.”
과일 바구니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 둔 나는 권정한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달라졌는데, 뭐가 달라진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눈가를 좁히고 권정한의 얼굴을 뚫어질 만큼 바라보자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나와 시선을 맞추던 권정한이 한참 뒤에 알려 줬다.
“저 안경 바꿨어요.”
“아……!”
그러네. 안경의 생김새가 살짝 달라져 있었다.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내 옆으로 다가와 소파에 앉은 권정한이 과일 바구니를 뒤적였다. 그러고는 은색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여기요.”
권정한이 케이스에서 꺼내 넘겨준 것은 다른 안경이었다. 그 안경은 한쪽 안경알이 깨져 있었다.
“이거 설마…….”
“네. 그때 금이 간 모양이에요. 그래서 급하게 바꿨죠.”
커피 캐리어도 테이블에 올린 권정한이 커피를 꺼냈다. 그러고는 내가 안경을 구경하는 동안 주방에 가서 잔 하나를 들고 왔다.
“미안하다.”
“형이 왜 사과를 해요.”
“괜히 나 따라와서 다친 거잖아. 안경도 깨졌고.”
커피를 잔에 옮겨 담은 권정한이 내 말에 눈을 깜빡였다. 잔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한 권정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힘이 부족해서 다친 거죠. 저 말고 다른 분들도 다 다쳤는데요.”
“너는 정신계 능력자니까 우리보다 더 위험하지. 민아린 씨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권정한이 나와 민아린의 앞을 막아서다가 어깨를 찔렸던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만약 권정한이 어깨가 아닌 심장이 찔렸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과도한 기운 소모로 민아린까지 기절한 상황이라 바로 치료할 수도 없었을 텐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차라리 내가 찔리는 게 더 안전해.”
권정한이 나보다 등급이 높다고 해도 정신계 능력자의 신체는 일반인과 똑같았다. A급이라도 공격계 능력자인 내가 더 튼튼했으니 권정한이 아니라 내가 다치는 게 마음 편했다.
“……아뇨.”
조용히 내 얘기를 들은 권정한은 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찔리는 게 맞아요.”
“권정한.”
“형, 저는 형과 민아린 힐러님의 마지막 방패에요.”
이어서 나오는 권정한의 목소리는 굉장히 단호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조금도 웃지 않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번처럼 모두가 같이 싸울 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제 능력은 그럴 때 쓸 수 없으니까요.”
“무슨…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런 생각하지 않아도 넌 우리한테 충분히 도움이 돼.”
“글쎄요.”
스스로 방패가 되겠다는 말을 듣고 속상한 나와 달리 권정한은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전 지금 자신감이 떨어지거나 보호만 받아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현실이에요. 제 정신계 능력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쓸모가 없어요. 그러니 팀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죠.”
“…….”
“하지만 형은 달라요. 변했을 때 능력만이 아니라 바람 능력도 팀에 없어선 안 되는 능력이고… 민아린 힐러님도 마찬가지죠.”
권정한은 놀랄 만큼 냉정하게 자신을 판단했다.
“그러니 마지막 방패라도 되려는 거예요. 그 역할마저 빼앗기면… 전 여기에 남아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이해해 달라는 마지막 부탁에 목 끝까지 올라온 수많은 말이 턱 막혔다.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알겠다고 하고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생각을 바꾸라고 설득해야 하나. 하지만… 나와 마주한 권정한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결정을 내렸구나.’
그렇지 않았으면 애초에 우리 앞을 막아서지도 않았을 거다. 굳이 설명하지 않았을 뿐, 권정한은 이미 오래전에 각오를 끝내 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알겠어.”
이렇게 대답해야만 하는 현실에 속이 쓰렸다.
민아린에 이어 권정한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둘의 안전이 걱정되는 내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함께 싸우는 동료이니 나도 그들을 신뢰하고 등을 맡겨야 한다.
“이해할게.”
“형이라면 그렇게 대답해 줄 거라고 믿었어요.”
권정한이 경직된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나 또한 복잡한 가슴속을 애써 외면하며 마주 웃어 줬다.
***
닷새 후 주말, 내게 미리 얘기를 들어 둔 대로 팀원들 모두가 23층 방으로 모였다. 일단 레퀴엠 길드에서 모인 후에 천사연의 집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이결 씨!”
내게 따로 연락을 받은 민아린도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나게 됐다. 집에서 쉬는 동안 건강을 많이 회복했는지, 전처럼 화사해진 얼굴로 돌아온 민아린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반겼다.
“잘 쉬고 오셨습니까?”
“그럼요. 아, 역시 휴가가 최고네요.”
촉촉해진 뺨을 쓸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린 민아린이 아 참, 하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결 씨, 고마워요. 잘 썼어요.”
민아린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기운 회복 아이템인 팔찌였다.
“뭘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혹여라도 잃어버릴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이결 씨 만나자마자 돌려주려고 신경 써서 챙겼어요.”
음, A급 아이템이라서 비싸긴 하지. 나도 천사연한테 받아서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민아린에게 돌려받은 팔찌를 다시 손목에 착용했다.
허전하게만 느껴졌던 텅 빈 손목이 다시 채워졌다. 그래도 제법 오랜 기간 팔찌를 낀 채로 생활해서 그런가, 나도 이젠 팔찌가 없으면 좀 어색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군.”
우서혁을 끌고 제일 늦게 방으로 찾아온 천사연이 거실에 가득 찬 팀원들을 보고 이죽거렸다. 본인 안방처럼 소파에 드러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박건호가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오지, 안 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한이결 능력자가 술을 마시자는데.”
“술이 목적이 아닌데요.”
“아무튼 술을 마시는 자리잖아. 내가 오늘을 기념해서 좋은 술을 많이 챙겨 왔지.”
천사연의 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박건호와 하태헌이 자가용을 끌고 온 참이었다. 설마 차 트렁크에 술을 가득 채워 온 건 아니겠지?
박건호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하태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천사연을 향해 말했다.
“불만이면 빠져라.”
“빠지고 싶어도 어쩔 수 없지. 우리 이결이가 내 넓은 집이 필요하다는데.”
“굳이 거기 아니라도 내 집이면 충분하다.”
“두 분은 왜 만나자마자 싸우세요?”
자연스럽게 서로를 견제하는 천사연과 하태헌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역시 친해질 필요가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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