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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28화 (328/394)

328화

자세히 설명해 주기 위해 응접실을 나와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에드워드까지 포함하면 9명이나 되는 대인원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천사연의 집이 필요했다. 그러니 직접 만나서 설득을 해 봐야지.

천사연이 미리 언질을 줬는지 복도에서 대기하던 수행원이 대표실로 안내해 줬다. 편한 마음으로 노크를 하고 바로 문을 연 나는 대표실 안에 천사연 뿐만 아니라 우서혁도 함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왔군. 들어와.”

“아… 죄송합니다. 일하는 중이었나 보네요.”

우서혁이 서류를 들고 있는 걸 보아하니 무언가 보고를 하고 있던 모양인데, 괜히 내가 끼어들어서 흐름을 깬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문을 닫고 머쓱하게 웃으며 묻자 우서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침 브리핑이 끝난 참입니다. 들어오십시오.”

“바쁘신 거면 이따가 다시 와도 괜찮습니다. 별로 급한 일은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나와 우서혁의 대화를 지켜보던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대표는 나인데.”

“바쁜 건 우서혁 씨가 더 바빠 보이는데요.”

아, 맞아. 그렇지 않아도 우서혁한테 할 말이 있었다.

“일정 조정해 주셨다는 얘기 전해 들었습니다. 덕분에 김우진 곁에 오래 있어 줄 수 있었어요. 쉴 시간도 많이 생겼고요. 감사합니다, 우서혁 씨.”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내 인사에 우서혁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을 해 왔다. 상대방을 신경 써서 챙겨 주고도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가 가슴을 울렸다.

역시 우서혁이야. 짧은 대화만으로도 마음이 절로 든든해졌다. 소소하게 감동을 느끼는 내게 천사연이 시비를 걸어왔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아까부터 자꾸 왜 그러세요?”

“그걸 몰라서 묻나? 우서혁 비서, 나가.”

“예. 서류는 말씀하신 대로 정리한 후에 처리하겠습니다.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웃는 낯으로 우서혁을 쫓아낸 천사연의 행동에 기가 막혔다. 지금 자기 내버려 두고 우서혁이랑만 대화하니까 질투하는 거 맞지, 이거?

황당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사연이 나를 소파로 잡아끌었다. 뭘 하려는 건가 싶어서 순순히 앉자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은 천사연이 손목시계를 두드렸다.

덜그럭.

허공에 생겨난 작은 상자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상자에 묶여 있는 리본을 풀고 내용물을 확인해 보자 가지각색의 사탕이 나왔다.

“…….”

기분 탓인가?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입꼬리를 끌어 올린 상태로 내 반응을 기다리는 천사연에게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이번에도 선물 받은 거냐?”

“아니. 내가 직접 산 거다.”

“이런 걸 사 올 시간이 있었다고?”

“길드 관리 본부에 회의 갔다가 돌아오면서 샀지.”

저번에는 초콜릿을 주더니 이번에는 사탕이냐고. 이러다가 다음에는 젤리라도 사다 주겠네.

“너 솔직하게 말해 봐.”

“음?”

“저번에 초콜릿도 선물받은 게 아니라 네가 따로 준비한 거지?”

의심스럽게 묻자 천사연이 시선을 슬쩍 돌렸다. 맞나 보네.

“어쩐지 거절하자마자 짜증을 내더라니…….”

갑자기 예민한 태도를 보이던 천사연의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때를 떠올리며 혀를 차자 천사연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잔뜩 불쌍한 척을 했다.

“내 깊은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그때 받은 상처로 아직도 가슴이 아픈…….”

“그만해. 먹으면 되잖아.”

내버려 뒀다간 1시간 내내 떠들 기세라 재빨리 사탕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색마다 맛이 다른 것 같았다. 그중에서 연한 붉은색을 입에 넣었다.

딸기나 체리 맛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의외로 복숭아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설마 복숭아 맛 사탕일 줄이야. 신기하네.

“그래서, 집을 빌려 달라는 게 무슨 뜻이지?”

“으음.”

동그랗고 작은 사탕을 와작 깨물어 먹으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23층 방은 조금 좁아서.”

“하고 싶은 거?”

“다 같이 모여서 먹고 쉬는 시간을 좀 만들려고. 술도 준비해서.”

내 대답을 들은 천사연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모양이다.

“사실 닥터가 만들어 낸 과거 공간에서 처음 떠올린 거야. 그동안 바쁘고 정신없어서 잊고 있었어.”

“아아, 가게에서 했던 파티 말인가?”

“그래. 그거랑 비슷하게 하려고. 이번에 다들 고생했으니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술도 마시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겠지.”

“흠…….”

입가를 매만지며 잠시간 눈을 깜빡이던 천사연이 이윽고 짙은 미소와 함께 내게로 상체를 살짝 숙이며 은근히 물었다.

“뭐, 집 정도야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긴 한데.”

“……?”

“그 대가로 내게 뭘 해 줄 거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던 나는 그제야 어깨를 붙잡고 있는 천사연의 손을 알아챘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묘한 상황에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대가는 무슨… 그냥 좀 빌려주면 안 되냐?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잘 생각해 봐. 분명 있을 텐데.”

고개를 숙인 천사연이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기겁한 나는 녀석의 가슴팍을 밀어 내려고 손에 힘을 줬지만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작작 해라…….”

이를 악물고 경고해도 천사연은 눈을 접으며 화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노려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대가를 안 주면 집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거지?”

“그렇지.”

“나 그럼 로헌 갈래.”

“뭐?”

갑자기 튀어나온 로헌 길드에 천사연이 살짝 당황했다.

“하태헌 씨는 대가 없이 집 빌려주실 것 같은데. 비켜 봐, 지금 연락해 보게.”

천사연의 집이 가장 넓은 건 사실이지만 하태헌의 집 정도만 돼도 충분했다. 하태헌의 집도 따져 보면 천사연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넓은 편이고.

아니면 예전에 가 봤던 박건호의 집도 나쁘지 않겠다. 다들 허락을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천사연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일단은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하태헌 씨는 너처럼 치사하게 대가 운운하면서 빌려주진 않을 테니까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잖아.”

천사연이 아무런 반박 없이 눈가를 좁혔다. 불만이 가득한 그 모습에 나는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집을 빌려 달라는 부탁인데 전화로 하는 건 좀 그렇네? 하태헌 씨랑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겠다.”

“하…….”

짜증스러운 숨을 짧게 내쉰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불온한 기운을 품고 반짝 빛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잠깐, 천…….”

그가 뭘 하려든 간에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꺼낸 그 순간이었다.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서 미처 피하기도 전에 천사연의 입술이 재차 부딪쳐 왔다. 조심스러웠던 저번과 달리 거침없이 들어오는 커다란 혀가 내 혀를 꾹 누르며 입 안을 간지럽혔다.

“흐, 읏…….”

낯선 감각에 두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천사연이 긴장 어린 숨을 모조리 가져가며 체중을 싣고 나를 뒤로 밀었다.

속절없이 소파 위로 눕게 된 나는 천사연을 밀어 내기 위해 다리를 버둥거리며 팔에 힘을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입술을 잘근거리며 키스를 이어 가는 천사연은 숨이 막힐 지경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읍… 으… 그만, 그…….”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천사연의 가슴팍을 힘겹게 붙잡자 그제야 호흡을 가로막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아쉬운 기색으로 천사연이 중얼거렸다.

“복숭아 맛이 나.”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헐떡이는 내 입술을 싹싹 핥은 천사연이 또 하고 싶다는 것처럼 뺨과 목덜미 근처에 입을 계속해서 맞춰 왔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미친놈아.”

얼굴 위로 쏟아지는 뽀뽀 세례를 고개를 비틀어 피하며 묻자 천사연이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이며 말했다.

“하고 싶어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냐, 이 개새끼야? 분노가 솟구친 나는 천사연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대가 안 치른다고 했잖아. 네 집 필요 없다고!”

“아야, 이거 그 대가 아닌데.”

“뭐?”

“소원.”

내가 머리를 잡아당기는 대로 순순히 끌려온 천사연이 드물게 헤실헤실 웃었다.

“소원 하나 들어 달라고 했잖아. 그 소원 쓴 거라고.”

“…….”

소원… 이라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했다. 근데 소원을 이런 거에 쓴다고? 장난 아니게 재수 없네. 천사연이 나를 붙잡아 상체를 일으켜 줬다.

“집은 빌려주도록 하지. 대신 바로는 안 돼. 다들 쉬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언제쯤이 괜찮은데?”

“다음 주 토요일이 그나마 나아 보이는군. 그때쯤이면 다들 컨디션이 어느 정도 돌아올 것 같으니까.”

확실히 적당한 날짜였다. 팀원 중에서 세 명이나 다쳐서 쉬고 있는 처지이니 나중에 따로 의견을 물어보는 게 좋겠다.

“분명 집 빌려준다고 했어.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손등으로 축축한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경고하자 천사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거로 딴소리할 만큼 한가하진 않은데. 그보다 입술 닦는 그 행동이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조용히 해, 욕하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상체를 일으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아까부터 물어보려던 내용을 꺼냈다.

“에드워드 씨도 부르려고 했는데… 좀 어려우려나?”

“에디라면… 잘 모르겠군. 토요일이 되기 전에 한국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역시 그런가.”

“아쉬우면 내가 이따가 연락해서 알아보긴 하겠는데, 큰 기대는 하지 마.”

알아봐 준다면 나쁠 건 없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 끝났으니까 간다.”

“사탕은 안 가져가나?”

“너나 많이 처먹어.”

이 해로운 장소를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했다. 도망치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표실 문으로 걸어가자 천사연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렴치한 짓을 한 건 저 자식인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 거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수작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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