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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27화 (327/394)
  • 327화

    “미술관에 왔던 일반인들은 모두 무사하다고 하더군.”

    “그나마 다행이네.”

    프라우스 신도단이 미술관을 통째로 장막 속에 가둬 둔 일은 꽤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평범한 시민들을 포함해서 여행을 온 외국인부터 유명 인사들까지 모조리 함께 사라졌으니 당연했다.

    나는 천사연이 건네준 태블릿PC에 띄워진 사진을 확인했다. 미술관을 감싼 주황색 장막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응시하던 천사연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일반인들이 동화 속에서 겪은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다행인 거겠지.”

    “…….”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정신 지배를 당한 팀원들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기억했다. 하지만 비능력자거나 등급이 낮은 관람객들은 모두 다 기억을 잃었다.

    동화 속에서 왕자인 척을 하거나 하태헌과 결혼식을 올렸던 일을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 잊어서 다행이었다.

    ‘뭐, 그 사람들 입장에서도 기억 못 하는 게 훨씬 낫지.’

    김우진에게 채찍을 휘둘렀던 남자나 병사 역할을 했던 이들은 기억을 해 봤자 트라우마에 시달릴 뿐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 일에 강제로 휘말린 피해자니까.

    “오후에 제이나 길드의 홍시아 마스터와 차수연 능력자가 길드에 방문한다는군. 널 만나고 싶다던데.”

    “상관없어. 응접실 하나만 비워 줘.”

    “그리고…….”

    천사연이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상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건 언제까지 달고 있을 거지?”

    “그거라니, 길드원한테.”

    천사연에게 손가락질받은 김우진의 분신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내 허리를 감은 팔에 더 힘을 줬다.

    나로서는 김우진의 분신을 안는 게 꽤 오랜만이라 솔직히 달가웠다. 그간 김우진과 사이가 서먹한 만큼 분신도 거리를 벌려서 좀 섭섭했는데.

    김우진은 현재 천사연의 배려로 심리 전문가와 상담하고 있었다. 몸은 다친 곳 없이 모두 나았다지만 정신은 그러기 힘드니 적절한 치료와 상담이 필요했다. 앞으로도 틈틈이 상담받을 예정이다.

    김우진과 분신은 감각이 이어져 있으니 낯선 사람과 상담을 하고 있는 김우진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도록 달라붙는 걸 내버려 뒀다. 가끔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우리가 멀뚱히 쳐다보자 천사연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설명을 이었다.

    “한국에 와 있는 에드워드도 조만간 따로 찾아오겠다고 하니까 미리 알고 있도록.”

    “알겠어.”

    “원래는 길드 관리 본부를 포함해서 이래저래 부른 곳이 많은데, 우서혁 비서가 웬만하면 길드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했더군.”

    “아.”

    이번 일이 끝나면 쉴 수 있도록 돕겠다던 우서혁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신경 써 줬을 줄이야. 나중에 우서혁을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인기가 참 많아, 우리 한이결 능력자께서는.”

    우서혁이 일부러 내 일정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아챈 천사연이 짜증 어린 미소를 지은 채로 이죽거렸다.

    천사연이 이렇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젠 놀랍지 않았다.

    “내가 힘들어하니까 우서혁 비서님이 신경 써 주신 거잖아. 그걸 왜 비꼬고 그러냐? 불만이면 너도 좀 도와주던가.”

    “최종 승인을 과연 누가 해 줬을까?”

    “아, 예. 그거참 감사합니다.”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픽 웃은 천사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병실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내게 통보했다.

    “내 소원 하나 들어줘야 하는 거 잊지 않았겠지? 기대되는군.”

    아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벨이 만든 공간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서 정리할 게 산더미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

    “진짜 고마워!”

    “네?”

    수행원의 안내를 받고 레퀴엠 길드 응접실로 찾아온 차수연이 들어오자마자 내게 감사 인사를 보내 왔다.

    어리둥절해진 내가 옆에 따라온 홍시아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대신 입을 열었다.

    “미술관 사건 얘기하는 거야. 미술관 관람객에 수연이 가족도 있었거든.”

    “그게 정말입니까?”

    놀라서 되물으니 차수연이 예전보다 훨씬 초췌해진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엄마랑 동생이… 그래도 다들 무사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힘써 줬다며? 네 덕분이야. 고마워.”

    “아닙니다. 전 뭐 한 거 없는데요. 가족분들이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공간 속과 바깥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갔다. 미술관이 장막에 먹힌 이 주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차수연은 전보다 말라 있었다.

    “이주하 마스터에게 설명 들었어. 프라우스 신도단…이라고 하는 놈들의 소행이라면서?”

    홍시아가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물어 왔다. 미술관 문제가 대대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더는 숨길 수 없는 상황이라 나는 솔직하게 말해 줬다.

    “맞습니다. 로헌이 소유한 D45 구역 게이트 테러 사건도 프라우스 신도단이 벌인 짓입니다.”

    “이번에도 자칫했다간 그만한 사상자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는 거네. 가만두면 안 되겠는데?”

    “로헌과 레퀴엠이 협력해서 프라우스 신도단의 주축을 이루는 멤버를 잡아들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태헌의 검으로 기운을 끊긴 아벨이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자젤이 데려갔거나… 혹은 그 자리에서 처리했거나. 능력을 쓰지 못하는 아벨은 필요가 없을 테니까.

    뭐가 됐든 아벨은 이제 끝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론을 내렸고 그건 아벨의 목숨을 살렸을지언정 배려는 아니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아벨이 산소 호흡기에 매달려 삶을 이어 가든, 같은 동료에게 죽었든 관심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아자젤과… 사마엘. 그리고 칼리.’

    닥터와 아벨보다 중요하면서 그만큼 까다로운 인물들이었다. 특히 칼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모든 게 수포가 될 위험이 있었다.

    “나도 도울게.”

    훌쩍거리며 눈물을 참아 낸 차수연이 발갛게 변한 눈가를 하고서 내게 말했다.

    “프라우스 신도단 잡는 거 나도 돕게 해 줘.”

    “예? 그게 무슨…….”

    “신도단 그놈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활개를 칠 생각을 하니까 치가 떨려. 별거 아닌 일이라도 좋아. 언제든 연락만 하면 바로 도우러 갈게.”

    “안 됩니다. 위험해요.”

    차수연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단호하게 거절하자 이번에는 홍시아가 끼어들었다.

    “그래, 우리 수연이 정도 능력이면 쓸 만할 거야.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길드원이 이렇게 피해를 받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체면이 안 서거든.”

    시원스럽게 미소 지은 홍시아가 난감한 기색을 보이는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로헌이 돕고 있다며? 제이나 길드도 빠질 수 없지. 프라우스 신도단인지 뭔지 하는 쓰레기들 덕분에 우리 길드 셋이 협력을 하게 됐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는 무슨. 우리도 오늘부터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한 정보를 모아 볼게. 뭔가 얻는 게 있으면 따로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홍시아와 차수연의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아하니 내가 말려 봤자 별 소용 없을 것 같다. 차수연은 A급 불 능력자에다가 제이나 길드도 대형이었으니 도와준다면 우리야 좋았다.

    “참, 차수연 씨. 그럼 어머님이랑 동생분은 장막 속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 못 하시는 게 맞습니까?”

    “맞아. 열흘이 넘도록 미술관에 갇혀 있었는데 아무 기억도 못 하더라고. 그 장막이 정신 지배 아이템이었다면서. 둘 다 능력자가 아니라 그런지 딱히 문제없었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니 그 편이 나을 겁니다.”

    “나도 똑같이 생각해. 그래도 고생한 건 맞으니까 오늘 저녁에 가족이 다 같이 모여서 술을 마시기로 했어. 맛있는 음식도 잔뜩 시키고.”

    “다 같이 술이요?”

    “우리 집은 힘든 일이 있었으면 술을 마시면서 풀거든. 가족이 다 술을 좋아해서.”

    “엇, 재밌겠다. 수연이도 술 잘 마시지?”

    “흐흠, 조금요? 마스터라면 언제든 오셔서 껴도 돼요.”

    “다음에 갈게. 이번에는 가족끼리 단란하게 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수다를 떠는 차수연과 홍시아를 앞에 두고 나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다 같이 술을 마신다고?’

    그 말에 잊고 있었던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닥터가 만들어 낸 공간 속에서 가게 애들과 다 함께 파티를 열었을 때 얻어 낸 아이디어였다.

    ‘다들 고생 많이 했으니까 식사 자리를 한번 만들면 괜찮을 것 같은데.’

    굳이 술이 있지 않더라도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서 다 같이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면 분위기도 좋고 스트레스도 풀리지 않을까? 어색한 사람끼리는 좀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은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도해 볼 만한 계획이었다.

    ‘근데 인원이 너무 많은데.’

    에드워드도 도와줬으니까 같이 부른다고 하면… 9명인가? 23층 방은 모여서 밥을 먹기엔 좀 작은데.

    “흠…….”

    입가를 매만지며 적당한 장소가 어디일지 고민했다. 그사이에 몇 번 더 잡담을 하던 홍시아와 이주하는 다른 용건은 없는지 제이나 길드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볼게. 천사연 마스터한테 안부 좀 전해 주고.”

    “안 보고 가셔도 되겠습니까?”

    “사실 한이결 능력자랑 만나기 전에 잠깐 좀 보려고 했는데, 천사연 마스터 쪽에서 거절하더라고? 하여간 싸가지 없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 않은 홍시아는 내게 윙크를 날리고 응접실을 나갔다.

    “나중에 연락할게! 고마워!”

    내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맙다는 인사를 한 차수연도 홍시아를 뒤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즉시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기는 끝났나?]

    웬일로 곧장 전화를 받은 천사연이 받자마자 질문을 해 왔다.

    “어, 방금. 미술관을 건드린 단체가 프라우스 신도단이라는 걸 제이나 길드가 알게 됐는데, 이거 괜찮은 건가?”

    [그 정도는 괜찮아. 어차피 신도단의 존재 자체는 전 세계가 알고 있으니까.]

    “그래. 너 지금 어디야?”

    [음? 대표실이다만.]

    “나 지금 가도 되나?”

    갑작스러운 요청에 천사연이 의외라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언제든지 와도 상관은 없긴 한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은 아니고.”

    목덜미를 쓸어 만진 나는 말을 돌리는 대신에 대놓고 물어봤다.

    “네 집을 좀 빌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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