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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25화 (325/394)
  • 325화

    82. 욕심

    엘라하는 최대한 쉬라고 했지만, 팀에 부상자가 두 명이나 있었으니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일단 레퀴엠 길드로 돌아갔다. 권정한은 즉시 의사와 힐러팀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고 기운을 많이 소모한 민아린 또한 병실로 옮겨졌다. 둘 다 안정이 필요했다.

    엘라하가 언제 돌아와서 통로를 열어 줄지 모르니 권정한과 민아린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23층에 있는 내 방으로 모였다. 평소와 달리 세 명이 빠져 있는 거실은 이상하게도 휑한 느낌을 주었다.

    천사연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김우진과 민아린, 권정한, 여우와 함께 지냈던 23층 방으로 오니 그 상실감이 지나치게 컸다. 그래서 팀원들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침실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힘들 텐데 그 앞에서 지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양손으로 건조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릿속이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민아린과 크게 다친 권정한, 나 대신 끌려간 김우진… 세 명의 얼굴이 뒤엉켜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23층 방에 모두 모여 웃고 떠들던 과거의 평화로운 시간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뻐근한 두 눈을 손으로 꾹 누르며 힘겹게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김우진을 구해 오자. 그러고 난 뒤에 민아린과 권정한의 상태를 살펴보고… 그리고 장막이 사라진 미술관 상황도 알아봐야…….

    송곳으로 쑤셔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과부하가 걸린 몸이 야속하게도 휴식을 외쳤다. 이마를 짚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진통제라도 먹어 둬야 할까. 두통 때문에 김우진을 구하러 가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면…….

    똑똑.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가는 음울한 생각을 끊은 것은 침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였다. 예, 짧게 대답하자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우서혁이 들어왔다.

    “방금 막 도착한 옷입니다. 갈아입으십시오.”

    그가 투명한 포장지에 싸인 옷을 내밀었다. 그제야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하게 웃으며 새 옷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씻으셔도 됩니다. 싸우면서 다친 곳이 있다면 약도 챙겨 왔으니 살펴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딱히 불편한 곳은 없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팀원들도 많이 다쳤을 것이다. 끌려간 김우진 또한 마지막으로 봤을 때 팔이 길게 베였었는데.

    모두가 고생하는데 나만 씻고 치료받고 싶지 않았다. 옷은 찢어지고 먼지와 피가 묻었으니 갈아입는 게 낫겠지만.

    내 대답을 들은 우서혁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모습에서 우서혁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서혁 씨?”

    “…김우진 능력자를 무사히 구하고 온 다음에는.”

    잠시 머뭇거린 우서혁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얘기를 이었다.

    “하루만이라도 푹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다 같이 날 잡고 쉬자는 뜻인가? 그건 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네. 그래야죠. 미술관에 들어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다들 고생 많이 했으니까요. 전 김우진을 구하고 와도 바로 쉴 수는 없겠지만 나중에라도…….”

    “왜 쉴 수 없습니까?”

    “예?”

    “한이결 씨는 왜 바로 쉴 수 없다는 겁니까?”

    설마 우서혁이 되물을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가 이 정도로 나에 대해서 궁금해했던 적은 없던 것 같은데.

    “그야… 미술관 문제를 마저 해결해야 하니까요. 아까 전해 듣기로 에드워드가 저희를 도와주러 한국에 와 있다고 해서 만나러 가야 하고요. 상황 정리가 좀 필요해 보입니다.”

    “미술관 문제는 한이결 씨가 나서지 않아도 레퀴엠과 로헌 길드 선에서 충분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드 제작자는 정식으로 초대를 넣을 테니 여기서 만나시면 됩니다.”

    설명을 하던 우서혁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한이결 씨가 필요 없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전 큰 힘이 없어서 이 정도밖에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만…….”

    그제야 우서혁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날 걱정해 주는 마음이 참 고마웠다.

    “우서혁 씨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데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습니까?”

    “네. 저도 이번 일은 좀 힘들어서… 될 수 있는 한 쉬는 방향으로 일정을 조절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우서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내 볼을 스치듯 매만졌다.

    미처 반응할 수도 없을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신데렐라 동화 속에서 내게 옷차림을 지적하면서 스치듯 손이 닿았던 때와 비슷했다.

    “그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정 조절하실 때 저도 돕겠습니다.”

    “아, 음… 네.”

    “그럼 옷 갈아입으십시오.”

    넋이 나간 나를 두고 우서혁이 침실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묘한 찝찝함에 목덜미를 쓸었다.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가자 다른 사람들도 싸우느라 너덜너덜해진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김우진이 끌려간 지 5시간이 되기 15분 전, 모두가 모여 있는 거실에 통로가 열리며 엘라하가 나타났다.

    “찾았어.”

    좋지 않은 몸 상태로 김우진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능력을 계속 사용한 엘라하는 아까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그가 비틀거리며 걸어와 내게 말했다.

    “위치는 일본. 바로 도착할 수 있도록 건물 지하 안에 통로를 연결할 거야.”

    “알겠습니다.”

    “통로 유지 시간은… 솔직히 오래 해 줄 수는 없어. 괜히 과장해서 말했다가 중간에 통로 연결이 끊어지면 위험하니까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엘라하는 피로가 잔뜩 묻어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지는 1시간 정도야. 그 안에 끌려간 놈을 구해서 통로가 연결된 곳까지 다시 돌아와야 해.”

    “네.”

    “이번에 실패하면 우리도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많은 감정이 담긴 쓴 미소를 지은 엘라하가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냈다. 은색 타원형의 통로가 환하게 반짝였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 인사에 긴장으로 어깨가 절로 굳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

    먼 곳에서부터 무언가 부서지는 소음과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김우진과 같이 위층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리를 들은 아자젤이 시선을 들었다.

    “흠, 아무래도 당신을 구하러 왔나 보네요. 예상보다 빠른데?”

    소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끄아악, 건물 지하에 빼곡히 세워 둔 신도단의 비명이 철문 너머를 울렸다.

    그 짧은 사이에 위층에서 아래로 내려온 모양이다. 별다른 감정 변화 없이 여유롭게 상황을 파악한 아자젤은 방금까지 사용했던 전기봉을 반으로 뚝 부러뜨려 바닥에 내던졌다.

    “5시간 30분 정도 지났나요? 일찍 마무리해야 해서 아쉽군요. 그래도 나름 즐거웠는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 앞에 앉아 있는 김우진을 내려다보며 아자젤은 싱긋 웃었다.

    물과 피로 온몸이 젖어 있는 김우진은 눈을 뜨지 못했다. 고개 또한 제대로 들지 못한 채 계속 흔들렸다. 미리 준비해 둔 검은 구슬을 꺼내 든 아자젤이 김우진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죽은 거 아니죠? 명색에 A급이면 이 정도는 버텨야지.”

    “…….”

    “저도 아예 얻은 게 없지는 않으니 나름 봐줬어요. 당신에게는 그게 더 끔찍하겠지만.”

    아자젤의 말에 김우진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한계까지 내몰린 몸과 정신은 그 간단한 행동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잔뜩 흐린 시야와 자꾸만 한쪽으로 기우는 머리에 자리를 떠나려는 아자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냥 죽여 버리는 게 나을지 고민도 했는데… 괜히 건드렸다가 상황만 복잡해질 것 같으니까 놔줄게요. 우리도 지금 중요한 시기거든요.”

    “…….”

    “다음에 또 봐요. 전 이만 당신에게서 얻어 낸 정보를 보고하러 가 봐야 해서.”

    지하실 철문 바로 앞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자젤은 시종일관 느긋한 태도로 김우진에게서 멀어져 지하실 가장 끄트머리에 섰다.

    철컹, 쾅! 동시에 철문이 일그러지며 거칠게 떨어져 나갔다. 철문을 발로 걷어차며 등장한 천사연이 바람을 몸에 휘감고 아자젤을 향해 정확히 날아왔다. 아자젤은 망설임 없이 검은 구슬을 떨어트리며 천사연을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천사연의 검이 아자젤의 목에 닿기 직전에 그녀는 사라졌다. 코앞에서 아자젤을 놓친 천사연이 혀를 찼다.

    “김우진……!”

    뒤따라 들어온 한이결이 의자에 묶여 있는 김우진을 발견하고 사색이 됐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 온 상대의 등장에도 김우진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기, 김우진! 김우진…!”

    분명 한이결의 기운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데 목소리는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더없이 뭉개져 들려왔다. 아무래도 고막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부드럽고 따듯한 감촉이 뺨에 닿아 왔다. 덜덜 떨리는 손은 뺨을 시작으로 입술과 목, 가슴에 내려앉았다. 숨을 제대로 쉬는지,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가슴에서 멀어진 손은 김우진의 기운을 가로막고 있던 셔터 아이템인 초커를 뜯어냈다. 양 손목과 발목에 있는 두꺼운 쇠 또한 거칠게 뜯어냈다.

    더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기우는 김우진의 몸을 한이결이 품에 안았다. 혹여 김우진이 아플까 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온몸이 젖어 있는 김우진을 안으니 피 냄새가 짙게 풍겼다. 그걸 깨닫자 한이결은 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끌어안은 채로 숨죽여 우는 한이결을 김우진은 눈도 뜨지 못하는 상태로도 곧장 알아챘다.

    자신은 괜찮으니 울지 말라고, 와 줄 거라고 믿었다고… 그렇게 말하며 한이결을 달래 주고 싶어도 입술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축 늘어진 손가락 끝만 작게 움찔거릴 뿐이었다.

    김우진은 여전히 한이결이 아니라 자신이 대신 끌려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이결이 제가 겪은 일을 고스란히 겪었다고 상상하면… 지금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프고 끔찍했다.

    그러니 다행이었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는 김우진에게 한이결이 말했다.

    “돌아가자, 김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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