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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24화 (324/394)
  • 324화

    대가를… 내가 아니라 엘로힘이 치르겠다고?

    넋을 놓은 채로 멍하니 엘로힘을 올려다보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엘도 지금…….”

    엘로힘과 엘라하 둘 다 우리를 위해 대가를 계속 치러 준 터라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담을 더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심지어 대가가 크다고 했는데.

    “난 괜찮다. 그리고 대가가 너무 커서 내가 감당하는 게 나을 거란다.”

    부드럽게 대답한 엘로힘이 나와 뒤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한 번 둘러봤다.

    “대가를 치르면 김우진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그 장소와 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어느 정도 걸립니까.”

    천사연의 물음에 엘로힘의 황금색 눈동자에 빛무리가 차올랐다.

    “대가를 치른다 해도 그들이 있는 장소를 바로 알 수는 없단다. 관련된 자들의 머릿속을 모두 뒤져 봐야 하니까. 그러니 5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거다.”

    “5시간…….”

    대가를 치른다 해도 김우진이 5시간을 버텨 줘야 한다는 건가. 참담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내 어깨를 하태헌이 잡아 왔다.

    “버틸 수 있을 거다.”

    “하태헌 씨.”

    옅은 한숨을 내쉰 박건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김우진을 굳이 끌고 간 걸 보면 쉽게 죽이진 않겠지. 다만 걱정되는 건…….”

    박건호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나 또한 그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이전 시간대에서 김우진은 결국 죽었다. 천사연에게 돌아온 김우진의 시체는 성한 구석이 없었다. 목숨이 끊어질 만큼 강한 고문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각오를 끝냈다면, 대가를 치르고 찾아 주겠다.”

    내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 오는 엘로힘은 꿈에서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창백하고 힘들어 보였다.

    그에게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엘로힘과 엘라하가 더는 고통받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현실은 암울하기만 했다. 토해 내듯 나온 대답에 엘로힘이 지체하지 않고 기운을 끌어 올렸다.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무리가 엘로힘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권세현의 기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도 강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눈이 아플 만큼 강렬한 빛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아날 정도로 오싹한 힘을 느꼈다.

    콰르릉! 쿠궁!

    “……!”

    황금색의 벼락이 엘로힘에게 내리꽂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거대한 기운이었다. 아니, 기운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설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고 무서운 힘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엘로힘이 말한 ‘세계의 대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가 걸어 둔 제약을 무시하고 간섭하려고 하는 엘로힘에게 세계가 대가를 내린 것이다.

    벼락을 정통으로 맞은 엘로힘이 비명마저 지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어느새 그의 몸은 새빨간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걸 알아챈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엘로힘에게 달려갔다.

    아래로 기울어지는 엘로힘의 몸을 끌어안자 짙은 피 냄새가 풍겼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로 헐떡이며 내게 기댄 엘로힘이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 는… 치렀다. 이제 엘라하가… 장소를 알아봐, 줄 거야.”

    엘로힘을 잡은 손이 피로 잔뜩 젖어 축축했다. 끔찍한 감촉이었다.

    치료를… 치료를 해 줘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엘로힘을 안은 채로 어쩔 줄 몰라 하자 그가 아픈 와중에도 살짝 웃었다.

    “괜찮, 아. 지금…….”

    “엘?”

    겨우 입술을 달싹여서 말하던 엘로힘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다. 그러자 엘로힘의 뒤로 새하얀 통로가 새로 생겨났다.

    타원형의 통로에서 나타난 상대는 처음 보는 남자아이였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사람치고 지나치게 혈색이 없는 하얀 피부를 한 남자아이는 어딘가 엘라하를 닮아 있었다.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날듯이 내게 걸어온 남자아이가 기절한 엘로힘에게 손을 뻗었다. 기겁한 나는 그 손을 거세게 쳐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함부로 손대지…….”

    “그 애는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로 너머에서 걸어 나온 엘라하가 지친 기색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내게 안겨 있던 엘로힘이 공중에 떠올라 앞에 서 있는 남자아이에게 옮겨 갔다.

    결국 엘라하를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면목이 없어서 엘라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엘라하.”

    “별게 다 죄송하네.”

    내 사과를 심드렁하게 받아친 엘라하가 이마를 긁적였다.

    사락, 소매가 아래로 내려오며 드러난 엘라하의 두 손에는 붕대가 빼곡하게 감겨 있었다. 아마 손만 그런 게 아니라 옷에 가려진 몸 대부분이 망가진 상태겠지.

    “엘로힘이 결정한 일이니 굳이 사과할 필요 없어. 저놈은 쉬고 나면 깨어날 거야. 대가가 커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나 대신 엘로힘을 안아 든 남자아이가 총총 걸어서 엘라하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자 엘라하가 남자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툭 얹으며 입을 열었다.

    “얘는 믿어도 돼. 너도 잘 알고 있는 애니까. 겉모습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네?”

    “우리 신전에서 지낼 때 몇 번 만났잖아? 고양이.”

    “아…….”

    그 말에 내게 다가와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울던 새하얀 고양이가 떠올랐다. 여우가 위험했을 때 도움을 줬던 고양이.

    “그 고양이가 저 아이라고요?”

    “그래. 이 아이들에게 외향 바꾸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

    그러고 보면 여우를 포함한 고양이와 토끼 모두 고스트 몬스터의 후손이라고 했었지. 그럼 여우도 저렇게 변할 수 있나?

    “여우는 토끼가 따로 데리러 갔다. 기운에 예민한 놈이 장막 속에 며칠을 쓰러져 있던 탓에 회복이 필요해. 내가 데리고 있다가 깨어나는 대로 다시 보낼 테니 그렇게 알아.”

    담담하게 설명을 마친 엘라하가 거실을 한 번 휙 훑어봤다. 엘로힘이 흘렸던 피를 잔뜩 묻힌 채로 주저앉아 있는 나와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 팀원들을 차례로 살핀 엘라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엘로힘이 말했던 대로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려. 그러니까 내가 다시 통로를 열어 주러 오기 전까지 좀 쉬는 편이 이후 싸움에도 도움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오도록 하지.”

    깔끔하게 등을 돌린 엘라하가 고양이를 데리고 통로와 함께 사라졌다. 정적이 내려앉은 거실에서 나는 피에 젖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김우진…….’

    ***

    서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지하실 특유의 악취와 비린내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속눈썹을 움찔 떤 김우진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 끊어졌는지 모를 정신이 점차 선명해졌다.

    “흐음, 아쉽네요. 사마엘님께서 와 주신다면 금방 해결될 텐데요.”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만들고 있으니까.]

    “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낯선 목소리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김우진은 침착하게 정신을 계속 잃은 척,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제 몸 상태를 확인했다.

    의자에 양팔과 다리가 묶여 있었다. 굵은 쇠로 된 수갑은 아무리 힘을 줘도 끊어 낼 수가 없었다.

    ‘셔터 아이템인가.’

    그렇다면 목을 갑갑하게 억죄는 초커가 셔터 아이템일 게 분명했다. 김우진은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프라우스 신도단과 함께 나타난 여자가 도망치는 한이결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한이결을 대신해서 채찍에 팔이 묶인 김우진은 즉시 벗어나려고 했지만, 기운이 가로막혀서 평소와 달리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채찍도 셔터 아이템이었을 거다. 자신이 막지 않았으면 한이결이 여기로 끌려왔겠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한이결은 통로 너머로 무사히 사라졌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천사연 측에서 대가를 치르고 그곳까지 찾아갈 텐데.]

    “고작 이런 한 명 때문에 대가까지 치르고 올까요?”

    [천사연이라면 충분히. 옛날부터 미련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놈들이 정말로 여기까지 찾아온다면 전 즉시 빠지겠습니다. 그리고 사마엘님이 계신 곳으로 합류할게요.”

    통화를 끝낸 여자가 김우진에게로 몸을 돌렸다. 붉은 립스틱이 짙게 발린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들었나요? 당신의 동료들이 이곳까지 올 거라고 하네요.”

    김우진이 언제 깨어났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핸드폰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가뿐히 던져둔 여자가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쓸어 넘기며 싱긋 웃었다. 얼굴 윗부분이 온통 가면으로 가려져 눈까지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단하네요, 당신네는. 고작 벌레 같은 목숨 하나 살리기 위해서 대가까지 치른다는 게.”

    “…….”

    비꼬듯 나온 조롱에도 김우진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저런 쓸데없는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기보다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는 편이 이로웠다.

    ‘방금까지 통화했던 상대편은… 사마엘이라고 했지.’

    사마엘이라면 김우진도 익히 알고 있는 상대였다. 한이결을 직접 납치했던 SS급 정신 지배 능력을 갖춘 신도단의 주요 인물.

    그렇다면 눈앞의 여자도 사마엘을 따르는 추종자 중 한 명이겠군. 목적이 있어서 여기까지 자신을 끌고 왔으니 쉽사리 죽이진 않을 거다.

    ‘버텨야 해.’

    한이결과 팀원들이 자신을 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납치된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는 건 쉽지 않을 테니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한이결과 팀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네요.”

    여자가 호출 버튼을 누르자 지하실 문을 열고 신도단 한 명이 들어왔다. 신도단이 끌고 온 철로 된 이동식 트롤리 위에는 다양한 공구 물품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 펜치 하나를 집은 여자가 김우진 눈앞에 그것을 보란 듯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저도 궁금하거든요. 당신이 어디까지 버텨 낼 수 있을지.”

    하얀 지하실 불빛 아래로 드러난 피 묻은 펜치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제 실력은 걱정하지 말아요. 제물을 관리하는 건 본래 제 소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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