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신도단을 뒤에 세운 채로 방 안을 쭉 둘러본 아자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아벨에게 꽂혔다.
“이상하네. 죽은 건 아닐 텐데…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네요. 당신들이 뭔가를 했나 보군요.”
“글쎄.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봐야 하지 않나?”
천사연이 아자젤이 나를 볼 수 없도록 몸으로 가렸다. 하지만 아자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사연에게 가려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멍청한 년은 언젠가 저 꼴이 날 줄 알았죠. 그보다 궁금한 건 이 방에 들어오기 직전에 느꼈던 기운입니다.”
붉은 입술을 유려하게 끌어 올려 웃은 아자젤의 양옆으로 신도단이 발을 맞춰 걸어 나왔다.
“분명 SS급에 견줄 만한 강한 기운을 느꼈거든요. 그 정체가 너무 궁금하네요. 당신 뒤에 숨겨진 능력자 중에 한 명일까요?”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눈가를 좁혔다.
‘이건… 좋지 않아.’
현재 우리는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전투를 이어 왔다. 특히 이 방까지 오면서 마주쳤던 수십 개의 인형과의 싸움으로 모두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쓸 수 있는 기운의 양이 턱도 없이 부족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겠지.
그에 반해 아자젤과 신도단의 숫자는 스물을 훌쩍 넘는 데다 A급 이상의 능력자들도 여럿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엘이 통로를 열어 줄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합니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이 방 안에서 언젠가 생겨날 통로를 기다리며 신도단을 상대해야 했다.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쉰 나는 다시 한번 한이결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뭐, 모조리 잡아서 끌고 가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 수 있겠죠.”
내 바람을 느낀 아자젤이 손짓하자 신도단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선두에 선 천사연과 하태헌에 이어서 박건호와 김우진도 차례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우서혁 또한 늑대로 변했다.
가장 뒤로 물러선 나와 민아린 앞에는 권정한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황급히 대열을 갖춤과 동시에 신도단들의 능력이 쏟아지며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윽……!”
신도단에 박건호와 비슷한 폭발물 변환 능력자가 있는지 폭탄이 쉬지 않고 터지며 뜨거운 연기가 확 치솟았다. 이러다가 엘로힘이 통로를 열어 주기 전에 건물이 무너질 기세였다.
나는 최대한 기운을 끌어 모아서 신도단 여러 명을 상대하고 있는 팀원들이 될 수 있는 한 다치지 않도록 바람을 사용했다. 남아 있는 기운이 너무 부족해서 그 이상으로는 해 줄 수가 없었다.
지친 기색으로 아슬아슬하게 적의 공격을 피하며 싸우고 있는 팀원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운이 벌써 바닥을 보였다. 부족한 기운을 억지로 끌어내자 심장에서부터 통증이 점차 번져 나갔다.
‘정신 차려.’
쓰러트려야 할 신도단의 숫자가 한참 남아 있는데. 거기다가 아직 나서지 않은 아자젤까지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
“이결 씨.”
곁에 있던 민아린이 거친 숨을 헐떡이는 내 손을 잡아 왔다. 나와 똑같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민아린이 웃었다.
그러자 맞잡은 손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부족했던 기운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민아린 씨? 잠깐만요, 이건…….”
당황한 내가 민아린을 뿌리치려고 하자 손에 힘을 준 민아린이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저도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지금 내게 기운을 넣어 주는 건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았다. 민아린은 여기까지 오면서 내게 몇 번이고 기운을 채워 준 탓에 남아 있는 기운이 굉장히 적을 게 분명했다.
내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내 손을 붙잡은 민아린이 눈을 감았다. 시원한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부족했던 기운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쿨럭!”
“민아린 씨!”
시체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내 기운을 채워 주던 민아린이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모습에 나는 쓰러지는 민아린을 품에 안았다.
내게 안긴 민아린이 축 늘어졌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민아린이 숨을 제대로 쉬는지 확인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형!”
나와 민아린의 앞을 가로막은 권정한의 어깨에서 새빨간 피가 튀어 올랐다. 서너 명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팀원들의 시선을 피해서 여기까지 밀고 들어온 신도단이 휘두른 창끝이 권정한의 어깨를 꿰뚫었다.
뒤늦게 권정한의 상태를 알아챈 김우진이 곧장 달려와 창을 든 신도단의 양다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그 즉시 꾸역꾸역 달려드는 다른 신도단에게 김우진도 팔이 길게 베였다.
‘안 돼…….’
쓰러진 민아린과 크게 다친 권정한, 위험한 팀원들… 바닥에 번져 가는 새빨간 피가 정신을 뒤흔들었다.
‘차라리…….’
다시 권세현으로 돌아가자. 개입 능력으로 신도단의 정신 지배를 모두 끊어 내면 된다.
아자젤에게 권세현의 모습을 들키겠지만 어쩔 수 없다. 아벨이 만들어 낸 공간에서처럼 팀원들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개입 능력을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마음을 굳힌 내가 다시 권세현의 기운을 끌어 올리려는 그때였다. 맞은편에 보이는 어둠 사이로 새하얀 빛이 반짝거렸다.
꿈에서도 봤던 빛이었다. 눈송이처럼 하늘하늘 내려온 빛 한점은 곧 커다란 타원형으로 변했다.
‘통로다!’
엘로힘이 말했던 통로가 틀림없었다. 민아린을 안은 채로 크게 소리쳤다.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민아린이 마지막으로 채워 준 한이결의 기운을 아낌없이 쏟아 냈다. 팀원들이 강해진 바람을 몸에 감고서 통로를 향해 달렸다.
우서혁이 다친 권정한을 등에 업고 제일 먼저 통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박건호에게 민아린을 넘겨주고 뒤쫓아 오는 신도단을 바람으로 방해했다.
“먼저 가세요!”
우리를 향해 온갖 능력이 쏟아져 내렸다. 내 바람과 하태헌의 검은 실드로 겨우 막아 내며 박건호와 민아린도 무사히 통로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제 남은 건 나와 김우진, 천사연, 하태헌이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통로의 빛이 희미해지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놓칠 줄 알고!”
도망간다는 것을 알아챈 아자젤이 날카롭게 외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검은 가죽으로 된 기다란 채찍이었다.
강하게 휘둘러진 채찍 끝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나를 정확하게 노리고 휘둘러졌다. 신도단을 막기 위해 다른 곳에 신경을 쏟고 있던 나는 그 채찍을 뒤늦게 발견했다.
채찍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평범한 채찍이 아니었다. 설마 셔터 아이템인 건가? 그럼 저 채찍에 잡히면…….
“한이결……!”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며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나를 밀쳤다. 붉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검은 채찍이 나 대신 김우진의 팔을 여러 번 휘감았다. 그리고는 단숨에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새에 채찍에 붙잡힌 김우진이 신도단 쪽으로 끌려갔다.
“자, 잠깐… 잠깐만!”
김우진을 붙잡기 위해 반사적으로 뛰어가려는 나를 하태헌이 붙잡았다.
“아, 안 돼. 안 돼요! 아직 김우진이……!”
발버둥 치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하태헌이 통로로 몸을 날렸다. 아자젤의 발아래에 쓰러져 있는 김우진이 빠르게 멀어졌다.
“김우진, 김우진!”
처절하게 소리쳐 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통로는 마지막에 천사연이 들어오는 것으로 완전히 닫혔다.
쿠웅! 딱딱한 바닥에 등이 강하게 부딪혔다. 급히 상체를 일으키자 익숙한 집 내부 풍경이 드러났다. 통로와 연결된 곳은 다름 아닌 천사연의 집 거실이었다.
혹시 몰라서 주변을 둘러봐도 김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오싹한 공포가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차갑게 식은 손이 덜덜 떨렸다.
-한이결……!
마지막으로 들었던 김우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반복됐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구해야 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김우진을 되찾아 와야 했다. 김우진은, 천사연의 과거에서, 이미, 한번…….
“세현아.”
씁쓸한 감정이 묻어나는 음성이 나를 불러왔다. 시선을 들자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날 응시하는 엘로힘이 보였다.
“엘…….”
그를 보자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컥 치솟는 뜨거운 감정을 삼켜 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가를…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세현아.”
“그러니까…….”
이전 시간대에서 김우진은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끌려가서 그대로 죽었다. 시체로 돌아온 김우진의 장례식을 나 또한 천사연의 책으로 봤다.
그렇게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김우진을 구해 와야 했다.
“도와주세요, 엘.”
“…….”
무슨 대가를 치른다 해도 상관없었다. 누구 한 명이 빠진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복잡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던 엘로힘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울지 마렴.”
새하얀 손이 뻗어 와 볼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줬다. 알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서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엘로힘이 고개를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김우진,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고.”
정신을 잃은 민아린과 권정한을 제외한 팀원들이 엘로힘의 말에 조용히 동의했다. 쓰게 미소 지은 엘로힘이 설명을 이었다.
“세현아. 네가 짐작한 대로… 그 아이는 이대로 내버려 두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다.”
“…….”
“그러니 대가도 그만큼 크다.”
“상관없습니다. 뭐든… 괜찮아요. 김우진이 있는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너무 아팠다.
아자젤이 우리가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내가 멍청하게 틈을 내 준 바람에 김우진이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너무나도 뼈아픈 실수였다.
“알겠다.”
몸을 일으킨 엘로힘이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대가는 내가 치러 주마.”
“예?”
“아이를 구하러 가거라, 세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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