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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22화 (322/394)

322화

내 뒤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아벨을 응시하던 민아린이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온 걸 알고 있는데도… 깨어나질 못하는군요.”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나와 마찬가지로 팀원들 모두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는 아벨을 바라봤다.

인형 대부분을 개입 능력으로 기운만 끊어 둔 터라 다시 연결되기 전에 아벨을 죽여야 하는데…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벨이 지금껏 해 온 일들과 천사연에게 어떤 상대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문을 여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해야 한다.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벨이 저렇게 어린 여자아이고,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는 상태라 해도… 앞으로를 생각하면 아벨은 여기서 끝을 내야 했다.

“한이결.”

입술을 깨물며 아벨에게 한 걸음 다가선 그때였다. 차가운 손길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시선을 들자 옅은 미소를 지은 천사연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

“천사연…….”

“뒤로 물러나 있어.”

“뭐?”

검을 든 천사연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아벨을 향해 걸어가는 천사연에게서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뭘 하려는지 바로 눈치챈 나는 아벨의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리는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자, 잠깐. 잠깐만…….”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가슴이 아프도록 무거워졌다.

아벨을 죽여야 하는 것을 안다. 그래야만 우리 상황이 그나마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무엇보다 천사연이 겪어 온 고통스러운 시간을 생각하면 이 선택만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천사연에게 이 짐을 짊어 주고 싶지 않았다. 아벨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고 우리보다 훨씬 어린 여자아이라 죽일 수 없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대로 천사연이 아벨을 죽이도록 둔다면 그는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하나 더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미 짊어진 짐이 많아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천사연에게 그건 너무 끔찍했다.

아벨에게 여태껏 당한 게 많으니 복수를 하게 해 줘야 한다, 그런 속 편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게 해답이 아니라는 걸 나와 천사연은 이미 살아온 삶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면서 당장이라도 아벨에게 검을 휘두를 기세인 천사연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

“네가 이런 짐까지… 짊어질 필요는…….”

간절한 마음으로 얘기하던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방금 내가 하려던 말, 어디서 들어 봤지?

-죽인 다음에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한이결?

딱딱한 나이프 손잡이를 쥔 손의 감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맞은편에서 슬픈 표정을 지은 채로 날 바라보던 권세현의 얼굴도.

-네가 이런 짐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그러니까…….

끝을 맺지 못하고 흩어지던 목소리는 놀랍도록 현재의 나와 닮아 있었다.

“아…….”

그제야 천사연이 나를 어떤 심정으로 붙잡았는지 이해가 됐다. 내가 무엇을 알아차렸는지 천사연 또한 눈치챈 기색으로 쓰게 웃었다.

내 과거로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결국 권세현이 제 복부에 나이프를 꽂아 넣으며 끝이 났다. 지금은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아벨을 죽여야만 한다면…….’

천사연이 아니라 차라리 내가 죽이는 게 나았다. 이럴 때를 위해서 천사연의 과거가 담긴 책을 보고 여기까지 쫓아왔으니까.

나와 천사연 외에는 할 사람이 없기도 했다. 팀원들에게 어린 여자아이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난 다르다. 이제 와서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깨끗한 인생도 아니었다.

“천사연, 내가…….”

“내가 하지.”

머릿속을 힘겹게 정리한 내가 말문을 연 그 순간, 하태헌이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팀원들의 시선이 하태헌에게로 쏠렸다. 놀란 나와 눈가를 좁힌 천사연을 차례로 둘러본 하태헌이 쥐고 있던 검을 내게 들어 보였다.

“한이결. 네가 준 이 검이 가진 힘을 기억하나?”

“힘이라면…….”

“미국에서 에드워드라는 제작자가 네 부탁을 받고 검을 확인해 줬었지.”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에드워드의 설명을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엘로힘과 함께 찾아간 게이트 내부에서 얻어 낸 SS급 검. 저 검에 심장을 꿰뚫리게 되면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기운이 끊어지면서 능력이 사라진다. 능력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검의 힘을 쓰시려는 겁니까?”

“그래. 시험해 보기에 아주 제격이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하태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지금으로선 저 방법이 최선이었다. 천사연도 같은 의견인지 아벨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하태헌을 막아서지 않았다.

아벨이 누워 있는 침대 앞에 선 하태헌이 기운을 흘리자 검이 푸르게 빛났다. 동시에 거북한 기분이 들 정도로 거칠고 날카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뭐야? 그거로 나 찌르려고?”

“무서워라, 불쌍한 내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거니?”

그새 기운이 다시 연결됐는지 바닥에 널려 있던 인형들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며 한마디씩 뱉어 내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싼 인형들이 검을 쥔 하태헌을 비난했다.

“반항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그 칼로 내 목을 베어 내서 피를 뒤집어씌우겠지! 역겨운 위선자!”

“역겨워! 역겨워!”

“온 세상이 이 꼴을 봐야 할 텐데!”

“이래 놓고 네놈들이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러운 벌레 새끼들!”

하태헌은 그 수많은 조롱을 모조리 무시한 채로 푸른빛이 흐르는 검을 들어 올렸다. 뾰족한 검 끝이 아벨의 심장 바로 위에 자리했다.

“이번에 날 죽인다고 끝날 것 같아?”

“죽여 봐! 시간이 다시 돌아가면 끝이니까!”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무서워, 시발, 죽여 봐! 안 돼, 안 돼, 그거 당장 치워!”

죽여 보라며 소리치는 목소리와 무섭다며 공포에 떠는 목소리가 혼잡하게 뒤엉켰다. 인형들이 제각기 다른 감정으로 감정을 쏟아 내며 하태헌의 발밑으로 기어 왔다.

“아벨이 오로지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인형들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천사연이 나지막이 얘기했다.

“상반된 말들이라 해도 저건 모두 아벨의 진심이겠지.”

“…….”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마르고 어린 여자아이와 그 앞에 선 검을 든 남자, 바닥을 기어 다니며 울부짖는 인형들.

귀를 어지럽히는 비명을 잠자코 듣던 하태헌이 이내 입을 열었다.

“시끄럽군.”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으로 인해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그가 입꼬리를 비틀며 서늘한 비웃음을 지었다.

“역겨운 위선자는 피해자인 우리가 아니라 너다.”

D45 구역 게이트에서 천사연이 아벨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한 하태헌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검을 심장에 꽂아 넣었다.

끼기기기긱!

“읏……!”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과 함께 새파란 빛이 번쩍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린 나는 곧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강한 바람과 함께 확 퍼져 나오는 것을 느껴졌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기운의 폭발을 버텨 낸 하태헌이 보였다. 푸르게 빛나는 검은 분명 상대의 가슴에 꽂혔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뽑혀 나왔다. 검날에 새겨진 ‘Cain’ 글씨가 유독 선명하게 반짝였다.

검을 내린 하태헌은 찬찬히 아벨을 살폈다. 인형들의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던 방 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인형은 더 이상 말을 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성공…한 건가요?”

민아린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하태헌 대신 대답했다.

“네. 기운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아벨의 기운은 이제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몰라 개입 능력까지 써서 확인해 봐도 아벨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아벨은 더는 능력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 평범한 건… 아니지.’

아벨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누워 있었다. 얼굴에 씌워진 산소 호흡기와 몸에 부착한 심전도 기계만이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능력으로 인형을 다루지 못하게 된 아벨의 삶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내 곁에 있는 천사연 또한 아무런 말 없이 아벨을 그저 바라만 봤다. 200번이 넘도록 반복해 온 시간에서 끝없이 싸워 온 적의 마지막을 지켜 본 천사연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감히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겠지.

“이제 끝났습니다.”

천사연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싶었지만 우리에겐 아직 여유가 없었다.

“엘이 아벨과의 싸움이 끝나면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준다고 했습니다. 곧 통로가 생길 테니 그걸 통해서 바로 이곳을…….”

“한이결.”

눈썹을 움찔 떤 하태헌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기운을 없애. 누군가 오고 있다.”

“……!”

하태헌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 또한 낯선 기운을 감지했다. 열, 아니… 스무 명 이상. 그 속에는 강한 기운도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즉시 권세현의 기운을 갈무리하자 몸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며 시야가 낮아졌다.

“흐, 으윽…….”

한계까지 치달은 정신을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던 권세현의 기운이 사라지자 눈앞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기우뚱 흔들리는 내 몸을 박건호가 부축해 줬다.

내가 한이결로 돌아온 동시에 또각거리는 뾰족한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지며 문이 열렸다.

“세상에, 이건 뭐죠?”

어깨 위로 흘러내린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여자가 교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쥐새끼들이 숨어들어 와 있었군요.”

아자젤의 뒤로 검은 가면을 쓴 이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왔다. 프라우스 신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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