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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21화 (321/394)

321화

81. 아벨

아벨을 죽인다. 이 명제는 천사연에게 굉장히 낯설었다.

200번이 넘도록 시간을 반복해 온 천사연마저도 아벨의 실체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벨이 조종하는 높은 등급의 인형들을 모조리 망가뜨려서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해 버린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아벨을 죽이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 이 장소에 온 것은 천사연도 처음이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한이결… 아니, 권세현을 만난 이번 시간에서 처음 겪는 상황은 종종 있었으니까.

‘SS급 인형, 나머지는 모두 B급. 저 멀리에서 SS급 하나가 더 오고 있군.’

SS급 인형은 자신이 모조리 상대해 봤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저 인형 또한 어떻게 상대해야 이길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천사연은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권세현이 개입 능력으로 인형을 조종하는 아벨의 기운을 끊어 낸다고 하더라도 5분도 안 돼서 다시 연결될 거다.

5분 안에 이 넓은 건물을 뒤져서 아벨을 찾아내지 않는 이상 기운을 끊어 내 봤자 소용없었다. 오히려 무리하게 건물 안쪽으로 진입했다가는 앞과 뒤가 모두 막히는 상황이 벌어질 거다.

자신들을 막아서는 인형을 될 수 있는 한 처리하면서 나아가는 편이 안전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권세현은 릴리스의 검을 빼 드는 천사연을 굳이 막지 않았다. 하태헌 또한 SS급 검을 들었다.

“하, 나를 죽이겠다고?”

아벨의 조소에도 권세현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천천히 올라오는 바람이 권세현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트렸다.

“많이 웃어. 그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까.”

권세현의 몸에서 흘러나온 바람은 곧 넓게 퍼져서 천사연과 하태헌을 감싸 왔다. 동시에 복도 뒤편에서 두 번째 SS급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사연과 하태헌이 각자 자신의 앞에 있는 SS급 인형에게 달려들었다. 나머지 팀원들은 권세현을 노리고 몰려오는 B급 인형을 가로막았다.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걸 후회하게 해 줄게!”

표독스럽게 외친 인형이 거대한 가위를 가뿐하게 휘둘렀다.

한이결의 바람을 휘감은 채로 그 공격을 쉽사리 피해 낸 천사연의 검에서 피가 붉게 타올랐다. 천사연의 능력과 비슷하게 인형이 든 가위에도 샛노란 번개가 번쩍였다.

“짜증 나는 새끼들!”

인형이 지닌 아이템의 효과였다. 파지직, 번개가 금방이라도 천사연에게 쏘아질 것처럼 위험하게 번뜩였다.

릴리스의 검날이 불꽃과 함께 횡으로 길게 그어졌다. 끼기기긱, 검날과 가윗날이 부딪히자 불과 번개가 뜨거운 기운을 내뱉으며 충돌했다.

“이익……!”

천사연에게 힘에서 밀린 인형의 두 발이 바닥을 죽 긁었다.

콰르릉! 천사연의 바로 옆에 떨어진 벼락이 번쩍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천사연의 옆얼굴에 기다란 상처가 생기며 피가 흘러내렸다.

차갑게 식은 검은 눈동자가 인형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초조해하고 있군. 입술을 잘근거리며 싸움에 도통 집중하지 못하는 인형의 상태를 눈치 빠르게 파악한 천사연이 팔에 힘을 줘서 가윗날을 쳐 냈다.

채앵!

가윗날이 힘껏 밀쳐진 인형이 몸의 균형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천사연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르릉, 번개가 바닥에 내리꽂히는 굉음 사이로 검날과 가윗날이 쉴 틈 없이 부딪혔다. 가까스로 천사연의 공격을 막아 내던 인형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검에 길게 베였다.

“아아악, 시발! 아아아악!”

천사연의 피가 잔뜩 묻은 검날에 왼쪽 옆구리가 베인 인형의 허리와 하반신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불안정한 몸으로도 끝까지 가윗날로 공격하던 인형은 결국 양다리를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씨발, 좆같은…….”

치이이익, 곧이어 인형 전체가 새빨간 용암에 잠기듯 모두 녹아내려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챙그랑, 주인이 사라진 가위가 홀로 떨어졌다.

인형 하나를 처리한 천사연이 즉시 등을 돌려 남은 SS급 인형과 싸우고 있는 하태헌을 도와주기 위해 움직였다.

천사연과 하태헌에게 동시에 바람으로 서포트를 해 주고 있는 권세현의 안색이 벌써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내부에 남은 인형들도 있을 텐데 권세현이 버텨 줄 수 있을까. 최소한 지금 싸움이라도 빨리 끝내야 했다.

“제대로 집중해, 하태헌.”

하태헌도 권세현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급한 마음이 검 끝에서 느껴졌다. 하태헌의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 낸 천사연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투에 끼어들었다.

아벨의 정신이 이어져 있던 인형은 천사연이 망가뜨린 터라 하태헌이 상대하고 있는 인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형이 핏빛 도끼를 내젓자 도끼날에서 새빨간 불꽃이 일어났다.

아벨과 수백 번 부딪히며 싸워 온 천사연은 아벨의 성격을 아주 잘 알았다. 변덕적이고 예민하며 멍청하고 조심성이 없다. 감정이 쉽게 흔들리며 칼리를 맹목적으로 믿는 만큼 그녀의 능력 또한 지나치게 신뢰했다.

“멍청하긴! 네놈들이 아무리 애써 봐야 다 소용없어!”

천사연이 지난 시간 동안 아벨의 인형을 죽일 때마다 들었던 말이 또다시 들려왔다. 솜으로 이뤄진 작은 인형이 복도 구석에서 지렁이처럼 기어 나왔다. 오로지 아벨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솜인형이었다.

“어차피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삭제해 줄 테니까!”

칼리에게 시간을 빼앗긴 천사연을 비웃는 소리였다.

그래. 맞는 말이었다. 아벨이 이토록 감정적으로 자신들을 상대하고 있는 이유 또한 같았다. 칼리의 능력 한 번이면 이 모든 일이 없던 시간이 될 테니까.

그 모든 걸 천사연도 아주 잘 알았다. 알면서도 아주 작은 희망을 붙잡고 피를 흘리며 노력할 뿐이었다. 그러니 저런 저급한 조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도끼날을 쳐 내고 인형의 오른팔을 잘라 낸 그 순간이었다. 묵묵히 싸우는 천사연을 대신해서 권세현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 시간은 절대 지워지지 않아.”

민아린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권세현의 손을 잡았다. 새하얀 빛이 맞잡은 손에 흘러나오자 끊길 듯 아슬아슬했던 바람이 다시 힘을 얻고 선명해졌다.

“그렇게 떠드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거다, 아벨.”

권세현의 마지막 말과 함께 하태헌이 인형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인형의 머리 너머로 보이는 솜인형의 가슴 중앙에 하태헌의 검날이 박혀 들었다. 천사연을 비웃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어느새 복도 가득 들어찼던 인형이 모조리 부서지고 망가졌다. 복도 벽을 한 손으로 짚은 채로 상체를 숙이고 있던 권세현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인형에 이어진 기운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봤습니다.”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거기로 가죠.”

***

“꺼져! 꺼져, 꺼지라고!”

세 번째 인형이 혈화에 모조리 타올랐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

네 번째 인형 또한 하태헌의 검에 가슴이 꿰뚫렸다.

“네놈들이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줄 알아?”

“그분께서 네놈들을 찾아내 죽여 줄 거야!”

“모조리 쓸데없는 짓거리가 될걸? 멍청하고 미련한 쥐새끼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우리는 앞을 가로막는 인형을 계속해서 죽이며 내부 깊은 곳으로 향했다.

나는 죽여야 하는 인형이 나오면 한이결의 바람 능력을, 굳이 죽일 필요 없는 인형이 나오면 개입 능력을 사용해서 아벨의 기운을 끊어 버렸다.

그렇게 죽여 낸 SS급 인형이 열을 훌쩍 넘고 S급 아래의 인형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쉬지 않고 이동하며 인형과 싸워 온 우리는 한 명도 빠짐없이 부상을 입고 지친 상태가 되었다.

특히 심한 건 능력을 번갈아 가며 계속 사용한 나와 내 기운을 채워 주기 위해 힘쓴 민아린이었다. 하지만 쉴 수 있는 틈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입 안을 씹어 가며 자꾸만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일깨웠다.

자신이 사용하는 인형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막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아벨도 결국 우리를 막아 내지 못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가로질러 방을 하나 지나가고, 넓은 홀을 지나서 또다시 복도에 진입한 끝에야 겨우 도착한 방. 이 방문 너머에 아벨이 있었다.

티딕, 틱.

문 앞에 서자 복도를 밝히는 형광등 불빛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마른침을 삼킨 나는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느릿하게 문이 열리며 불이 꺼져 어둡고 넓은 방 안이 드러났다. 방 안에 가득 세워진 책장에는 틈마다 책이 아닌 솜 인형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벨은… 책장 너머에 있습니다.”

빼곡하게 채운 책장 너머로 아벨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거로 봐서 강한 인형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방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자 히스테릭한 웃음소리 수십 가지가 겹쳐서 울려 퍼졌다.

“침입자! 침입자! 침입자! 침입…….”

“벌레 새끼들이 여기까지 들어왔어! 들어왔…….”

“죽여야 해, 죽여야 해, 죽여야…….”

“칼을 들어! 찔러, 찔러 버려! 찔…….”

“꺼져, 꺼져, 꺼져, 꺼…….”

방 안으로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책장에 앉아서 떠드는 인형의 숫자도 많아졌다. 새파란 피부에 이목구비와 신체가 얼기설기 이어진 인형들이 동시에 떠드는 모습은 보기 힘들 정도로 기괴했다.

그 시끄러운 목소리를 일일이 끊어 내며 망설이지 않고 가장 구석진 곳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끼긱, 쿠구궁!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책장을 옆으로 치워 내자 먼지 냄새가 훅 풍겼다. 뿌연 연기를 손으로 흩트리며 시선을 든 나는 정면에 보이는 광경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

내 뒤를 따라온 팀원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하태헌이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설마 저 사람이 아벨인가?”

새하얀 천 아래로 드러난 바싹 마른 손목. 소독약이 짙게 풍기는 옷. 얼굴에 씌워진 산소 호흡기.

많아 봐야 15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굳게 감긴 눈은 인기척에도 떠지지 않았다. 인형들이 떠드는 소리에 감춰져 있던 심전도 기계가 삐, 삐 소리를 냈다.

혹시 몰라 다시 한번 능력으로 기운을 확인한 나는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 여자아이는 분명… 아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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