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내 결정을 들은 엘로힘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아벨을 죽인다면 제 능력이 다른 신도단에게 새어 나가는 상황을 막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미 다른 신도단이 알게 됐다고 해도 아벨을 죽여 두면 그만큼 위험이 덜하겠죠.”
“네 말이 맞다.”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지금 우리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내 능력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면 우리도 무리할 필요 없겠지만… 이미 다 들통나 버렸으니 우리도 최선을 다해 노력할 수밖에.
“이동 아이템을 지닌 인형은 네가 있는 방의 가장 끝에 있다. 문을 등지고 앞으로 걸어가면 의자에 앉아 있는 S급 인형 하나가 나올 거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해라, 세현아.”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은 엘로힘이 마지막 당부를 했다.
“지금 있는 곳은 만들어진 공간 속이라 네가 끊어 낸 기운을 다시 연결하는데 1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아벨이 있는 곳으로 직접 가게 되면 아무리 네가 능력을 끊는다고 해도 벌 수 있는 시간은 5분 안쪽이다.”
“그렇다면…….”
“많은 인형이 너희들을 죽이기 위해 쏟아져 나오겠지. 네가 기운으로 인형의 조종을 막아 낸다 해도 그 수를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신중하게 움직이렴.”
아벨이 있는 곳이라는 건 결국 프라우스 신도단의 주요 인물인 아벨의 본거지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아벨이 부리는 인형의 숫자도 여태까지와 다를 거다.
그걸 알면서도 끝내 나는 아벨을 죽일 수 있는 이 타이밍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 눈빛에서 각오를 알아챈 엘로힘이 어깨를 놓아줬다.
“아벨과의 싸움이 끝나면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통로를 바로 열어 주마. 그걸 통해서 늦지 않게 빠져나오면 된단다.”
“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벨을 죽일 수 있는 정보를 주고 나중에 통로까지 열어 준다니. 그 모든 대가를 치렀을 엘로힘과 엘라하가 신경 쓰였지만 상태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내 생각을 읽은 엘로힘이 괜찮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새하얀 빛에 잠겨 들고 있었다. 꿈이 끝나 간다.
“가거라, 세현아.”
“다녀오겠습니다.”
환한 빛이 번쩍 터지며 눈앞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나는 순순히 그 빛을 받아들였다.
***
익숙한 향이 코끝에서 느껴졌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감았던 눈을 뜨자 김우진의 어깨가 보였다. 그 아래로는 흉터 진 내 손이 보였다.
변한 상태로 잠든 적은 이번이 처음인데, 다행히 변화가 풀리지 않고 권세현 그대로였다. 이제부터 아벨과 정면으로 부딪치려면 개입 능력이 필요했으니 한이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개를 들자 나를 안은 채로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김우진이 물었다.
“한이결, 일어났어?”
“응.”
나는 그에게 완전히 기대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잠들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어?”
“얼마 안 됐어. 5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그나마 다행인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앞에 있는 김우진과 시선을 맞췄다. 순한 눈동자를 하고서 나를 바라보는 김우진은 그간 어색했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예전과 똑같았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게 못내 반가웠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다는 것만으로 내게 김우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아벨과의 싸움을 끝내면…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김우진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겠다. 김우진도 나도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한이결.”
방 안을 살펴보던 팀원들이 내가 깨어난 걸 알고 곧장 몰려들었다. 그중에서 천사연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엘로힘을 만났나?”
“그래.”
역시 천사연이라면 눈치챘을 줄 알았다. 엘로힘에게 들었던 얘기를 팀원들에게 설명해 주려던 그때였다.
파지지직!
전기가 튀는 날카로운 소음이 온 천지에 울려 퍼지며 오싹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묘한 기운이 주변에 가득 퍼져 나갔다.
“공간이 깨지고 있는 겁니다.”
방금까지 멀쩡했던 벽과 주변 사물이 치직거리며 픽셀 모양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금이 가듯 갈라진 벽 너머로 주황색 장막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엘로힘이 알려 준 대로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공간이 온전히 사라지고 아벨이 인형을 철수시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모두 제가 하는 말을 들어 주십시오.”
나는 곁에 모여 있는 팀원들을 향해 꿈에서 엘로힘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공간은 깨지고 바깥세상으로 안전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아벨을 놓칠 거고 제 개입 능력도 프라우스 신도단이 알게 될 겁니다.”
“아벨을 놓치는 것보다 네 능력이 알려지는 게 더 큰 문제군.”
하태헌의 중요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 냈다.
이 고생을 해 놓고 아벨을 놓치게 되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긴 했지만, 후자가 훨씬 더 부담이 컸다.
“저는…….”
앞으로의 안전을 생각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아벨과 결판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 내린 결론일 뿐이었다.
엘로힘의 당부를 떠올려 보면 아벨의 본거지로 들어가서 그를 처치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모두가 지친 상태에서 다시 싸움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였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내가 하게 될 내 얘기를 팀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떠한 확신도 없었지만 나는 용기를 내서 이어 말했다.
“지금부터 아벨을 만나러 갈 겁니다.”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천사연이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다들 힘든 상태인 거 압니다.”
“…….”
“하지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팀원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민아린과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는 권정한. 당황스러운 상황일 텐데도 평소처럼 담담해 보이는 우서혁과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박건호. 별로 놀라지 않은 천사연과 하태헌. 마지막으로 그게 어디든 내 뒤를 따라가겠다는 얼굴을 한 김우진까지.
“그러니까… 저와 함께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부탁을 끝으로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갈래요!”
민아린이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김우진이 지지 않겠다는 듯이 황급히 내 팔을 붙잡아 왔다.
“나도 갈 거야. 가게 해 줘.”
“이런 중요한 일을 부탁한다는 거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데.”
김우진에 이어 박건호가 짙게 미소 지으며 한마디 했다. 웬일로 우서혁이 박건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뭐, 형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 전 익숙해졌어요.”
“하아…….”
권정한이 한탄하듯 중얼거리자 하태헌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팀원들 반응에 머쓱해진 나는 목덜미를 쓸며 변명했다.
“그래도 다들 저랑 같이 가 줄 거라고 믿었는데요.”
“믿는 거로는 안 된다고요, 이결 씨.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이결 씨만 보낼 수 있겠어요? 저 걱정돼서 죽을지도 몰라요.”
걱정돼서 죽을지도 모른다니, 그 정도야? 어째서인지 혼나게 된 내가 민아린의 눈치를 살피자 천사연이 픽 웃었다.
“리더가 가자면 가야지. 아벨의 인형이 소지하고 있다는 이동 아이템부터 찾아야겠군.”
“그놈의 리더 소리 좀 그만하시죠.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인형은 이쪽에 있습니다.”
꿈에서 엘로힘에게 들었던 대로 방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가자 의자에 앉은 채로 축 늘어져 있는 노란 머리의 인형이 나타났다. 인형이 입고 있는 로브의 주머니를 뒤져 보니 프라우스 신도단이 몇 번이고 사용했던 검은 구슬이 나왔다.
내가 구슬을 손에 넣자마자 주변을 둘러싼 주황색 장막이 유리처럼 산산이 깨져 나갔다. 저택의 벽이 평범한 미술관의 벽으로 변했다.
원래 있던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 사실에 기쁜 것도 잠시, 검은 구슬이 묵직하게 손바닥을 짓눌렀다. 흔들리는 마음을 재차 다잡으며 말했다.
“바로 가죠.”
프라우스 신도단이 했던 것처럼 검은 구슬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바닥에 부딪힌 구슬은 단숨에 액체로 변하여 바닥에 넓게 퍼졌다.
곧이어 눈앞이 크게 흔들리며 몸이 파도에 휩쓸리듯 울렁거리는 감각이 치솟았다. 숨을 틀어막는 기묘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미술관과는 확연하게 다른 건물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아벨이 있는 장소라고?’
새하얀 벽이 이어진 복도에는 미약한 소독약 냄새가 풍겼다. 형광등 불빛이 깜빡거리는 복도는 어딘가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음, 뭐랄까… 병원이 떠오르네요.”
내 곁에 서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민아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인형이 가득한 괴기스러운 집이나 지하실 같은 곳이 나올 거라고 짐작했는데. 설마 이토록 병원과 닮은 곳일 줄이야.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른 내부 풍경에 잠시 멍해진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알아챈 하태헌이 내 어깨를 붙잡아 강하게 끌어당겼다.
“윽……!”
오싹한 살기가 담긴 공기가 볼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를 품에 안으며 대신 공격을 받아 낸 하태헌의 팔뚝 부분의 옷이 길게 찢어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거친 음성이 강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제야 내게 달려들었던 인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간호사 복장을 한 인형이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표정을 따라가지 못한 인형의 겉가죽이 쩍쩍 갈라지면서 흉측한 꼴이 되었다. 양손에는 공간에서 마주쳤던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가위를 들고 있었다.
내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데다 강하게 느껴진 기운. SS급 인형이었다.
오히려 잘됐다. 여기가 아벨의 본거지인지 확신이 없던 참에 손수 손님을 맞이하러 와 줬으니 우리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무엇보다 그간 봐 온 모습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아벨의 태도 덕분에 이 장소가 약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장 꺼져! 꺼지라고! 시발, 죽여 버릴 거야!”
아벨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복도에 있는 방마다 문이 열리며 인형이 쏟아졌다.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아벨.”
천사연의 과거에서 박건호와 우서혁의 시체를 능욕하던 아벨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강남을 망가뜨린 사건과 D45 구역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 습격도.
아벨과의 악연은 정말 지긋지긋하게 길었다. 그 악연을 이제는 끝낼 때가 됐다.
“네 동료와 마찬가지로 죽여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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