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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19화 (319/394)

319화

“공간에 연결된 적의 기운을 모두 끊어 냈습니다.”

시야를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설명하자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되는 건가?”

“…어쩔 수 없죠.”

괜찮지 않다. 당장이야 팀원들을 살리고 속이 시원할 뿐, 내 능력을 아벨에게 모두 보였으니 앞으로는 더욱 힘들어지겠지.

그래도 팀원들의 목숨을 생각하면 이게 정답이었다. 팀원들의 안전을 포기하고 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천사연과 하태헌도 마찬가지일 거다.

“괜찮아?”

조용히 지친 숨을 내쉬는 천사연의 상태를 살피자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이 정도쯤이야 당연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혼자서 달려드는 팀원들을 감당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애써 아니라고 하는 천사연이 안쓰러웠다. 이제 보니 몸 여기저기에 상처도 많았다.

그런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어 웃은 천사연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팀원들을 둘러봤다.

“다들 오랫동안 정신 지배를 당했으니 상태가 어떨지 모르겠군. 슬슬 깨어날 것 같긴 한데.”

천사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팀원들이 한둘씩 앓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으…….”

“아… 뭐지……?”

상체를 일으키는 박건호의 뒤로 민아린도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다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천사연이 정말 고생했네.

“민아린 씨.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이결 씨?”

내 손을 잡고 일어선 민아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혹시 공간에서 겪은 일이 기억에 없는 건가?

“여긴…….”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든 공간 속입니다. 미술관을 통째로 바꿔 놨어요. 다른 분들도 괜찮습니까?”

“헉……!”

내 질문에 그 옆에 있던 김우진이 갑자기 숨을 들이켜며 경악했다. 그러고는 입을 가리면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왜 저러지?

“으앗…….”

“하…….”

“아…….”

김우진에 이어서 민아린과 우서혁, 박건호도 차례대로 얼굴을 손에 묻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천사연이 팔짱을 끼며 재밌다는 기색으로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정신 지배를 당하는 동안 겪은 일들이 모두 기억나나 보군.”

“오.”

그래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거구나.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창피해하는 팀원들을 보다가 박건호에게 다가가 기웃거렸다.

“팀장님도 부끄러우세요?”

“이걸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있나…….”

신기하게 바라보는 나를 향해 박건호가 난감한 것처럼 입술을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

커다란 손 사이로 보이는 박건호의 뺨이 살짝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박건호가 얼굴을 붉힐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 그 나이 먹고 사냥꾼이니 왕자니 난리 쳤으니 양심이 있으면 부끄러워해야지.”

“신나 보이십니다, 마스터?”

“하아…….”

이때다 싶어서 깐족거리는 천사연과 지지 않고 받아치는 박건호의 뒤로 우서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서혁도 부끄러운가 보네. 그래도 우서혁은 그나마 좀 나은 편 아닌가?

“설마 미술관을 이런 식으로 써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평범한 관람객도 다 정신 지배에 당한 상태 맞죠?”

그 와중에도 큰 반응 없이 평소와 같은 사람은 권정한 한 명뿐이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넌 멀쩡하네.”

“전 뭐 부끄러울 만한 일을 한 게 없어서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 권정한이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그보다 형. 형이야말로 큰일 난 거 아니에요?”

“어?”

“하태헌 부마스터랑 결혼하셨잖아요.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입도 맞췄던데? 나중에 기사 뜨면 어떡해요?”

“뭐?”

대뜸 나온 얘기에 당황해서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꽂혔다. 반사적으로 주춤 뒷걸음질 친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그제야 하태헌과 결혼식을 치른 일이 떠올랐다. 하필 지금 권정한이 저 일을 집어낼 줄이야. 하도 사건이 많아서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그, 그건 다른 방법이 없어서…….”

다급하게 변명을 꺼내자 한걸음 물러서서 구경하던 하태헌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이결은 나와 결혼했으니 다들 그런 줄 알아라.”

“예?”

이게 무슨 소리야. 경악하는 날 두고 박건호가 끼어들었다.

“아니, 그건 좀. 하태헌 부마스터, 그렇게 안 봤는데 좀 뻔뻔하시네.”

“맞아요! 이결 씨가 다른 방법이 없어서 했다고 하셨잖아요. 그 결혼은 무효예요.”

“기사 뜨는 건 걱정할 필요 없다. 레퀴엠에서 다 막아 버릴 거니까.”

박건호에 이어서 민아린과 천사연도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말도 안 된다며 하태헌의 발언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대화지? 피로가 절로 몰려와 뻐근한 눈가를 꾹 눌렀다. 나는 화제를 전환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한가하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들 그만하시죠. 아직 이 공간을 해결한 게 아닙니다. 아무리 제 능력을 썼다 해도 공간 자체를 무너뜨릴 수는 없어요.”

중재를 들은 민아린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가장 중요한 점을 짚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을 장악했다던 그 마녀는 어디 있을까요? 아벨이라는 여자가 조종하는 인형이요.”

“글쎄요. 그런 인형은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벨은 정신 지배를 강화하는 연기를 뿌렸다. 그 후에는 정신 지배가 통하지 않는 나와 천사연, 하태헌을 제외한 모두가 몸을 완전히 조종당하게 됐고.

아벨은 우리가 서로를 죽이다가 끝내 파멸하는 장면을 보고 싶어서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린 건가. 실제로 내 개입 능력이 없었다면… 아벨의 계획대로 됐겠지.

“만약 인형이 정말 있었다 해도 제가 이 공간 속에 이어진 모든 기운을 끊어 냈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공간 자체를 깨트릴 방법을 찾아야 해요.”

내 설명을 들은 천사연이 짜증스럽게 눈가를 좁혔다.

“닥터가 만들어 낸 공간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조건을 달성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어서 얘기했다.

“아까… 기절했을 때 꿈을 하나 꿨습니다.”

-권세현.

내 이름을 부르는 유시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듯 흘러갔다. 손을 뿌리쳤을 때 그가 지었던 표정 또한 선명히 떠올랐다.

“그 꿈에서 깨어나게 해 준 건 엘라하였습니다. 엘라하가 아니었으면 저 혼자서는 절대로… 끝내지 못할 그런 꿈이었어요.”

말에서 묻어나는 씁쓸한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는지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깨어나기 직전에 엘라하를 잠깐 만났는데, 그때 엘라하가 분명히 알려 줬습니다. 공간을 깨트릴 방법을 찾았으니까 조금만 버티라고.”

“엘라하가 그걸 직접 전했다면… 대가를 치르고 이 일에 끼어든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방법을 찾은 게 사실이라면 지금 이 공간은…….”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온몸에 기운이 빠졌다.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로 크게 휘청이는 나를 곁에 서 있던 김우진이 놀라서 잡아 줬다.

“하, 한이결?”

“아… 무슨, 으…….”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강한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설명할 틈도 없이 김우진에게 안긴 채로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며 눈을 감자 새까만 어둠 사이로 꽃향기가 풍겨 왔다. 곧이어 어둠이 사라지고 하얀 뭉게구름이 가득 떠 있는 하늘과 초원이 나타났다.

엘로힘과 만날 때마다 오는 꿈속의 장소였다. 예상대로 맞은편에서 엘로힘이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 다가왔다.

“세현아.”

“엘?”

엘로힘이 이런 식으로 나를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좋지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고서 급히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가까이서 본 엘로힘의 상태는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쓰게 웃은 그가 무척이나 거칠어진 음성으로 말했다.

“엘라하에게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곧 있으면 공간이 깨질 거다.”

“…두 분이 도와주셨군요.”

“너희들 힘으로는 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 에드워드라 불리는 아이에게 내 힘을 조금 나눠 줬단다. 아이가 만든 아이템이 곧 공간을 유지하는 장치를 부술 거다.”

내 볼을 쓰다듬어 오는 손길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엘로힘이 지친 기색으로 눈을 깜빡였다.

“안에서 무언가를 더 하지 않아도 돼. 그저 가만히 기다리면 곧 장막이 깨지고 미술관은 예전처럼 돌아올 거다. 휘말린 평범한 인간들도 무사할 거고.”

“여우는요? 여우는 어디 있습니까?”

“그 아이는 공간 바깥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렴. 그보다 세현아,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엘로힘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씁쓸한 표정을 지은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네가 그 공간 속에서 권세현으로 변하고 개입 능력을 쓰면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졌다.”

“…예. 프라우스 신도단이 제 능력에 대해서 모두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최소한 아벨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어요.”

“그 아벨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넌 어떤 선택을 할 거지?”

“……!”

아벨을 죽일 수 있다고? 상상도 못 했던 제안에 어깨를 움찔 떨자 엘로힘이 황금색 눈을 환하게 빛냈다.

“네가 끊어 낸 기운 중에서 아벨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로 바로 갈 수 있는 이동 아이템을 가진 인형이 있다. 기운이 다시 이어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정도고.”

“이동 아이템을 사용하면 아벨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겁니까?”

우리는 이제껏 아벨이 조종하는 인형만을 만났을 뿐, 아벨을 실제로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 그러나 우리도 아벨이 거주하는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 얼마큼 위험한지는 모른다. 대가를 치르면 알아볼 수 있다만, 그러면 10분이 지나서 기운이 다시 이어질 테고…….”

“인형은 아이템을 사용해서 도망치겠죠. 지금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거군요.”

엘로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이 공간에 들어와서 여기까지 팀원 모두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그러니 다들 많이 지쳤을 텐데. 지금 상태로 아벨을 상대하러 갈 수 있을까. 그저 내 욕심이 아닐까.

‘하지만…….’

정신 지배에 걸린 팀원들을 혼자서 막아 내던 천사연의 모습이나 이제껏 아벨이 저질러 온 일들… 그 모든 걸 차례로 기억해 내자 이 기회를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기운이 다시 이어지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마음을 정한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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