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18화 (318/394)

318화

정체를 알 수 없는 장막에 미술관이 덮인 지 열흘이 지났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국가가 나서서 미술관 주변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관련 전문가들을 보냈지만, 상황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길드 관리 본부에서 나온 최미진과 이수진이 장막 안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까지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장막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 알 형태의 보석을 파괴할 방법을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다.

“수연아.”

수척한 얼굴로 장막에 휩싸인 미술관을 바라보고 서 있는 차수연에게 홍시아가 다가갔다.

홍시아가 안쓰러운 얼굴로 어깨를 감싸 오자 차수연이 순순히 안기며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다들 무사하겠죠?”

“물론이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뭐라도 나올 거야.”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차수연이 걱정스러워 하는 위로긴 했지만, 홍시아의 진심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불안했다.

벌써 열흘째 장막은 여전했고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부디 내일은 뭐라도 좋은 소식이 들려와야 할 텐데.

동이 터 오는 새벽의 푸른빛이 깔린 이곳은 뼈가 시릴 만큼 춥고 우울했다. 차수연을 안아 준 채로 한참 동안 등을 토닥여 주던 그때, 낯익은 차가 베이스캠프로 들어섰다.

“최미진 센터장?”

“깨어 계셨군요. 마침 잘됐네요.”

며칠 전에도 미술관을 다녀간 최미진이었다. 뒷좌석에서 내린 최미진이 홍시아와 차수연을 향해 눈인사하며 뒤따라 내린 이를 소개했다.

“이쪽은 미국에서 온 제작자입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에드워드라고 해요.”

금발 머리의 작은 키를 가진 남자아이가 최미진의 설명에 뒤따라 자신을 소개했다. 에드워드는 앳된 얼굴로 홍시아와 악수했다.

미국의 제작자가 한국까지 직접 왔다라. 에드워드의 목적을 바로 눈치챈 홍시아가 물었다.

“반가워요, 에드워드 제작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오셨다는 건… 혹시 저 장막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는 건가요?”

“일단은요.”

씁쓸한 표정을 지은 에드워드가 홍시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장막을 조사한 자료는 모두 읽어 봤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아이템을 봐 온 저로서도 장막을 만들어 낸 아이템이 무엇인지 확신하는 건 어려워요.”

“역시 그런가요.”

“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에드워드가 반지의 보석을 두드리자 허공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작고 하얀 새를 본떠 만든 아이템이었다.

“이건…….”

“저 장막을 없애기 위해 만든 아이템이에요.”

에드워드의 손 위로 올라온 새가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들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겉모습과 어딘가 삐걱거리는 움직임은 상당히 조잡해서 아이템보다는 어린애들 장난감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이게… 저 장막을 없애 줄 수 있다고요?”

“수연아.”

저도 모르게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차수연이 홍시아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죄송해요.”

입술을 깨물며 사과하는 차수연을 향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이해합니다. 많이 허술하게 생겼죠? 아무래도 만드는 데 시간이 부족했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외향에 공을 들이면서 여유를 부리고 싶지 않았어요.”

“생긴 건 허술해도 속에 들어 있는 기운은 만만치 않군요.”

“역시 바로 알아채시네요.”

새를 쓰다듬는 에드워드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이 아이는 저 혼자서 만든 게 아닙니다. 다른 분께 도움을 받았어요. 여러분이 느낀 기운은 그분의 것입니다.”

본래 검은색으로 만들려던 새를 하얀색으로 만든 이유도 그래서였다. 자신이 만든 아이템은 속에 담긴 기운이 아니라면 쓸모가 없었으니까.

-모든 일은 간절한 만큼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자신에게 기운을 넘겨 주던 남자가 떠올랐다. 한이결 능력자가 아테나 길드에서 머무를 때, 그를 찾아왔던 강한 힘을 가진 남자.

길게 내려온 순백의 장발만큼이나 하얀 기운을 가진 자라고 클로에가 알려 줬었다. 지나치게 깨끗해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어나는 그런 기운이라고 했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들어가고 싶다만…….

남자는 말을 끝까지 잇는 대신에 제 기운을 에드워드에게 나눠 주었다.

그가 본래 가진 힘에 비하면 모래알만큼이나 작았지만, 그것만으로도 S급이 가진 기운을 훌쩍 뛰어넘는 크기였다. 기운을 아이템 속에 온전히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에드워드는 며칠 밤낮을 고생해야 했다.

‘제발 성공해라.’

긴장한 채로 자신이 만든 새를 내려다보던 에드워드가 양팔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새가 두 날개를 펼쳤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을 등에 업은 채로 새가 장막을 향해 날아갔다.

‘한이결 씨.’

부디 자신의 아이템이 저 장막을 부수고 미술관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을 구해 낼 수 있어야 할 텐데. 당신들을 도우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피이이익, 장막까지 다가간 새가 높게 울며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새가 모습을 감춘 지 30초 정도 지나자 새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장막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저건……?”

“장막을 만들어 낸 보석을 파괴할 빛이에요.”

다행히 에드워드가 설계한 그대로 새가 움직여 주었다.

아이템이 장막 중앙에서 터지면, 속에 담겨 있던 빛의 기운이 장막 안에 가득 차오를 거고… 곧 보석에게 강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파지직, 파직!

에드워드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장막이 크게 흔들리며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약한 A급의 기운을 보호하듯 심장에 둘린 SS급의 기운이 모든 디버프를 없애 줬다. 마비에서 풀려난 내가 축 늘어지자 하태헌이 뺨을 만져 왔다.

“한이결, 괜찮나?”

“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상태는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 나는 하태헌에게 안긴 채로 한이결의 기운을 뚫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내 기운을 막지 않고 그대로 끌어 올렸다.

“뭐야, 저 새끼가 어떻게 깨어난 거지?”

당혹스러운 어투로 소리치는 아벨의 목소리가 들리자 내 기운이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부풀렸다. 방금까지 몸 안에 들어왔던 하태헌의 기운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심장 밖으로 흘러넘쳤다.

“큭……!”

신체가 변화하는 묘한 감각과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품이 남아 넉넉했던 옷이 점차 맞아 가며 하태헌에게 잡혀 있는 손의 크기가 순식간에 커지고 흉터가 새겨졌다.

권세현으로 돌아온 나는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온통 흐렸던 시야가 깔끔해지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태헌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 좀 일으켜 주세요.”

SS급의 기운을 넘겨받고 바로 권세현으로 변하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부탁을 들은 하태헌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주며 나를 부축했다.

“하…하하, 하하하! 아, 미치겠네!”

하태헌의 몸에 가려졌던 나를 발견한 아벨이 어둠 너머 어딘가에서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이 기운 좀 봐! A급 버러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등급 외 능력자였잖아?”

“…….”

“이게 너희들이 숨기던 히든카드니? 하긴, 그러니까 우리한테 덤빌 용기가 생겼겠지.”

그래, 많이 비웃어라.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린 나는 팀원들을 상대하는 천사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죽일 수도, 다치게 할 수도 없는 능력자를 5명이나 동시에 상대한 천사연은 여기저기 상처가 생긴 데다 옆구리 부근에 부상을 입었는지 옷이 피에 잔뜩 젖어 있었다. 그에 반해 정신을 잃은 채로 강제로 움직이고 있는 팀원들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다.

이 끔찍한 일을 천사연에게만 맡겨서 너무나도 미안했다. 나는 즉시 내 기운으로 개입 능력을 사용했다.

닥터와 교전했을 때랑 마찬가지로 팀원들의 머리 위로 이어진 기운의 실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만 실의 색은 저번과 달리 피가 묻은 것처럼 붉은색이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었다.

‘칼리의 피인가.’

단순히 사마엘의 기운으로 이어진 정신 지배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 실을 끊어 내기 위해 손을 휘저은 나는 심장을 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읏!”

칼리의 피가 가진 힘과 내 개입 능력이 충돌하면서 생긴 통증이었다. 이를 악물고 심장에서 좀 더 기운을 끌어 올려 재차 손을 휘저었다.

끼기긱!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운의 실이 끊어지며 정신 지배에서 풀려난 팀원들이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흐흥, 이게 네가 가진 능력이야?”

그 광경을 지켜본 아벨이 짜증이 담긴 어투로 재잘거렸다.

“닥터가 죽은 이유도 너 때문이지? D45 구역 게이트에서 나를 방해했던 그 쥐새끼도 너고!”

“그래.”

고통에 거칠어진 숨을 깊게 내쉰 나는 최대한 담담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려와, 아벨. 너도 네 동료와 마찬가지로 죽여 줄 테니까.”

“하하, 자신만만하네.”

진심으로 재밌다는 것처럼 아벨이 소리쳤다.

“정신 지배만 끊어 내면 끝일 줄 알아? 너넨 그 공간 속에서 뒤질 운명이야. 멋모르고 미술관을 찾아온 벌레들과 함께!”

속이 매스꺼울 정도로 짙은 악의가 담긴 웃음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걸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A급인 한이결의 기운과 다르게 내 기운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아벨에게 들켰으니 개입 능력을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기운을 쓰면 쓸수록 주변에 한정되어 있던 내 시야가 끊임없이 넓어졌다. 현실이 아닌 만들어진 공간 속이니 주변 모든 게 개입을 쓸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정신 지배를 당한 수십 명의 사람들 틈으로 주황색 기운의 실이 느껴졌다. 인형과 이어진 셀 수 없이 많은 주황색 실은 공간 너머와 이어져 있었다.

‘저 기운의 실이 바로…….’

인형을 조종하는 아벨의 능력의 근원이었다. 목표를 발견하자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짙어졌다. 그렇게 만들어 낸 강한 기운을 사용해서 수백 개에 이르는 사마엘과 아벨의 실을 모조리 끊어 버렸다.

쿠구궁!

천둥소리와 비슷한 굉음이 공간 저편에서 터져 나오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아벨의 비웃음이 뚝 끊어졌다.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만족스러운 미소 지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모든 걸 끊어 냈으니 지금부터 아벨은 우리를 볼 수도, 조롱할 수도 없다. 아무리 자신들이 만들어 낸 공간 속에 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1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