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80. 빛을 따라서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문까지 빠르게 뚫어요!”
한이결의 외침에 밀려드는 인형들을 헤치며 모두가 복도 끝에 있는 거대한 문을 향해 달렸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겨우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하태헌이 곧장 문을 닫았다. 쿠웅, 육중한 소리가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다들 괜찮습니까?”
“네.”
“아직도 수가 저렇게 많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같은데.”
박건호가 한 말에 천사연과 하태헌도 즉시 방 안을 살펴봤다. 하지만 SS급인 둘마저도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어둠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하태헌 씨, 혹시… 으…….”
“한이결?”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한이결의 몸이 갑자기 크게 휘청였다. 속절없이 쓰러지는 한이결의 몸을 곁에 있던 하태헌이 황급히 끌어안았다.
“한이결, 한이결!”
아무리 큰 소리로 부르고 뺨을 두드려 봐도 굳게 닫힌 그의 두 눈은 떠지지 않았다. 한이결과 마찬가지로 천사연과 하태헌을 제외한 모든 팀원이 차례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태헌.”
한이결을 깨우는 하태헌의 앞을 천사연이 막아섰다. 바닥에 쓰러졌던 다른 팀원들이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실에 몸이 묶인 듯한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무언가에 이끌리듯 일어선 팀원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살기를 담은 기운을 내뿜었다.
눈가를 좁힌 천사연이 붉게 타오르는 검날을 허공에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알아채기 힘들 만큼 아주 옅은 연기가 일렁이며 흐트러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희미하지만 피 냄새가 났다. 칼리의 피가 섞인 연기였다.
“어머, 들켜 버렸다. 그래도 아주 멍청하진 않네?”
위치를 가늠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아벨의 조롱이 들려왔다.
“그렇다 해도 이젠 늦었어.”
박건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 쇠구슬이 있는 것을 본 하태헌이 한이결을 안은 채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쿠우웅, 쿵! 거침없이 날아온 쇠구슬이 연달아 폭발했다. 박건호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점차 거리를 좁혀 오는 것을 눈치챈 천사연은 혀를 차며 자신의 능력을 사용 중지했다. 팀원을 향해 혈화 능력을 쓸 수는 없었다.
“구석으로 가.”
하태헌과 한이결을 방 모서리로 밀어 넣은 천사연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흐음… 그 버러지는 역시나 정신 지배에 걸리지 않는구나. 아쉽네. 역시 뭔가가 있는 놈이야.”
하태헌에게 안겨 있는 한이결을 발견한 아벨이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어. 저 상태로 죽여 버리면 되니까.”
“…….”
“천사연, 넌 과연 누굴 선택할까? 네 뒤에 있는 두 명? 아니면 네 앞에 있는 소중한 동료들? 어느 한쪽을 지키려면 다른 한쪽을 죽여야 할 텐데.”
아벨이 킥킥거리며 희열에 찬 비웃음을 흘렸다.
그 도발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살핀 천사연이 하태헌에게 말했다.
“한이결을 깨워야 해.”
정신 지배 능력이 깃든 연기에 당한 팀원들을 막으려면 권세현이 가진 개입 능력이 필요했다.
“하태헌, 무슨 일이 있어도 한이결 곁에서 떨어지지 마.”
수준급 실력의 능력자 여러 명을 죽이지 않고 적당히 상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어떻게든 한이결이 깨어날 때까지 모두를 지키며 버텨야 했다.
SS급 릴리스의 검이 아닌 S급 검으로 바꿔 든 천사연의 새까만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
“권세현.”
넋을 놓고 하얀빛을 응시하자 유시혁이 커다란 손으로 내 턱을 잡았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 그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 돌리지 말고 나 똑바로 봐.”
“이사님.”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얼버무리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
그 명령에 대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도록 초조한 마음과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 거실 끝에 보이는 저 하얀빛이 자꾸만 내 숨통을 죄어 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고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일어…나. 이대로 있다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위험, 해… 다들 오래 버티지 못…….”
들으면 들을수록 더 혼란스러워졌다.
위험하다니, 대체 누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권세현.”
“일어나.”
“내게 집중해.”
“일어나…….”
정체 모를 목소리와 유시혁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둘의 목소리를 같이 듣자 어쩐지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내 얼굴을 잡은 유시혁의 손목을 쥐었다.
“이사님, 저는…….”
“…결.”
“전…….”
“한이결…!”
나를 부르는 간절한 외침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끝내 버티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두 눈을 감았다. 뜨거운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전 가야 합니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내겐 새로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만큼은 꼭 지켜 내리라고 스스로 다짐했던 소중한 인연들이.
“권세현.”
“왜… 왜 하필 당신이 나타났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유시혁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니까. 그 사실은 소중한 인연이 생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평생 변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가야 했다. 고작 과거가 보여 주는 꿈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차갑게 굳은 유시혁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이를 악물고 맞은편에 보이는 빛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자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새까만 어둠으로 변했다.
방금까지 피부로 선명히 느껴졌던 따듯한 공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 몸은 어느새 한이결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간절히 불렀다.
“엘라하!”
“이쪽이야.”
사방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둠 사이로 새하얀 빛 한 점이 생겨났다. 다급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신체의 절반이 검고 질척한 것에 먹힌 엘라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괘, 괜찮습니까?”
내게 간섭한 대가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울컥, 검은 피를 한차례 쏟아 낸 엘라하가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입을 열었다.
“나가서… 조금만 버텨. 공간을 깨트릴 방법을 찾았으니까.”
방법을 찾았다고? 궁금한 게 잔뜩 있었지만, 이것저것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내게 날아온 하얀 빛이 주변의 어둠과 엘라하의 모습을 빠르게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엘라하!”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나가.”
“하지만…….”
“가!”
“읏……!”
엘라하의 말과 함께 하얀 빛이 번쩍 터졌다.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자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강제로 위로 끌어 올려졌다.
“한이결!”
하태헌이 나를 불렀다. 눈을 뜨자 나와 하태헌을 감싸고 있는 검은 실드가 보였다. 그 너머로 혼자서 싸우고 있는 천사연의 모습도.
천사연이 상대하고 있는 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팀원들이었다. 그걸 보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으… 하, 태…헌 씨…….”
“한이결, 정신 차려.”
당장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하태헌도 곧장 깨달았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아벨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천사연과 싸우고 있는 팀원들도 단순히 정신 지배에 걸렸을 때와 달리 잠을 자는 것처럼 눈을 감은 채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나는 침착하게 심장에서 느껴지는 기운부터 살폈다. 몸과 마찬가지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기운은 아무리 애를 써도 평소처럼 사용할 수가 없었다. 깊숙한 곳에 숨겨 둔 권세현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권세현으로 변해서 팀원에게 걸린 정신 지배를 끊어 내기 위해서는 몸에 걸린 마비부터 풀어야 했다. 이런 류의 디버프 공격은 이전에도 당해 본 적 있었다.
‘한이결의 몸으로 릴리스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다른 한 번은…….’
굴업도 섬 게이트에서 보스 몬스터를 상대했을 때였다.
두 번 다 어떤 방법으로 디버프에서 벗어났었는지 떠올리고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겨우 벌려 더듬더듬 얘기했다.
“하, 태헌 씨.”
“한이결. 조금만 버텨라. 마비를 풀 방법을…….”
“제게, 기운을…….”
“뭐?”
“기운… SS급 기운을 주, 세요.”
내 말을 들은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이런 부탁을 했으니 당황스러울 만했다. 하지만 그 방법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천사연… 도와줘.”
힘없이 나온 내 속삭임을 싸우는 와중에도 용케 들은 천사연이 짜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아, 너 여기서 나가면 내 소원 하나 들어줘야 해.”
달려드는 우서혁의 멱살을 움켜잡아 바닥에 내던진 천사연이 거친 숨을 훅 내쉬었다. 뺨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대충 닦아 낸 그가 입을 열었다.
“하태헌. 한이결 손잡아.”
딱딱하게 나온 설명에 하태헌이 잠시 고민하다가 바들바들 떨리는 내 손을 맞잡아 왔다. 창백하게 식은 손에 따듯한 체온이 퍼져 나갔다.
“기운을 끌어 올려서 손바닥 끝으로 내보내. 상대에게 밀어 넣는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집어넣어.”
나를 안고 있는 하태헌의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손에 오싹한 기운이 질척하게 뿜어져 맞닿아 있는 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천사연이 당부한 대로 기운은 아주 느릿하게 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손바닥을 통해 들어온 기운이 팔부터 시작해서 내 몸을 점차 집어삼켜 왔다.
“……흐윽!”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리게만 느껴졌던 하태헌의 기운이 내 심장에 닿자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워졌다. 상체가 퍼뜩 튀어 오르며 발끝이 바닥을 죽 그었다.
“아, 으… 흣, 아!”
뜨거워서 죽을 것 같았다. 기운에서 도망치기 위해 본능적으로 바르작거리는 내 몸을 하태헌이 강하게 껴안으며 맞잡은 손으로 재차 기운을 밀어 넣었다.
지금도 충분히 버티기 힘든데, 귓가에 들려오는 천사연은 냉정하게 명령했다.
“더.”
“크윽…….”
“읏, 안… 허억…!”
“더 넣어.”
“흐으, 윽… 그만, 그만…….”
처음으로 남에게 기운을 넣어 주는 하태헌도 조절이 쉽지 않은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하태헌이 보내 준 기운에 감싸인 내 기운이 얼음이 녹는 것처럼 조금씩 풀려 갔다. 나는 마비가 풀린 반대편 손으로 하태헌의 가슴팍을 밀어 내려고 애썼다.
“아, 흐읏… 아……!”
눈가를 좁힌 하태헌이 자신을 밀어 내는 내 반대편 손도 붙잡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운을 크게 울컥 흘려보냈다. 가득 들어온 하태헌의 기운이 이윽고 내 심장을 모조리 감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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