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이렇게 해서 팀원 모두가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모이게 됐다. 이제 여우만 찾을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지하 감옥을 빠져나와 저택 중앙 홀로 돌아온 우리는 마녀가 있을 만한 위치부터 파악하자고 얘기를 나눴다.
“수상한 곳이 하나 있긴 하더군.”
하태헌은 나와 마찬가지로 신데렐라 동화가 끝날 때 입고 있었던 파티복을 그대로 착용 중이었다. 내가 깨어난 시기와 비슷하게 깨어난 그는 눈을 떴을 때부터 이 저택이었다고 한다.
저택 안에 있는 인형들을 처리하고 다니며 저택을 둘러본 하태헌이 마지막으로 내려간 지하감옥에서 권정한을 만나고 계속 지켜 주고 있던 것이다.
“그게 어딥니까?”
“가운데 계단을 올라가면 복도가 나온다. 그 끝에 거대한 문이 있는데, 열린 적이 한 번도 없더군.”
그 설명에 김우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 김우진은 어딘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서 가장 넓은 방이야. 주로 회의할 때 사용하고.”
“저택 내부에 있는 방은 내가 모두 가 봤다. 확인하지 못한 곳은 그곳뿐이지.”
“알겠습니다. 일단 거기부터 가 봐야겠네요.”
우리는 하태헌이 알려 준 곳으로 이동했다. 계단을 올라가서 복도로 진입하자 인형 수십 구가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빽빽하게 들어찬 인형을 본 박건호가 입으로 휘익, 바람 소리를 내며 한마디 했다.
“이 너머에 뭔가 있는 건 확실한 모양인데.”
“다들 조심하세요.”
지하 감옥에서 마주쳤던 인형과 달리 이번 인형들은 A급과 S급 기운이 느껴졌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얼굴은 묘하게 팀원들을 닮아 있었다. 처음 라푼젤 탑으로 왔을 때 마주쳤던 인형과 동일한 놈들이었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은 인형보다 더 빠르고 강할 것이다.
“아까보다 강한 놈들입니다. 두 분은 제 뒤로 오세요.”
민아린과 권정한을 내 뒤로 보내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후웅, 내게서 생겨난 강한 바람이 앞에 서 있던 천사연과 하태헌, 박건호, 김우진을 휘감았다.
끼긱, 긱.
우리에게서 풍기는 기운을 감지한 인형들이 관절을 기괴하게 비틀며 손에 쥔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에 맞춰 긴 장검을 빼 든 천사연과 하태헌이 동시에 튀어 나갔다.
콰지직! 콰직!
인형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선두에 선 SS급 둘이 길을 뚫고 다른 팀원들이 오른편과 왼편에서 치고 나오는 인형을 막아 냈다.
복도라는 한정적인 공간에 한가득 차 있는 인형들은 천사연이 가진 끊임없이 타오르는 피의 능력에 의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녹아내렸다. 천사연에게 있어서 수많은 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것만큼 좋은 상황은 없었다.
흩날리는 검은 재와 무너지는 인형 군단 사이로 하태헌이 말했던 거대한 문이 드러났다. 뒤처지지 않고 나를 잘 따라오던 민아린이 외쳤다.
“수하들이 더 와요!”
우리가 지나왔던 계단을 타고 새로운 인형 무리가 올라왔다. 복도에 있던 인형 무리보다 배는 많아 보이는 숫자에 혀를 차며 기운을 한 번 더 사용했다.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문까지 빠르게 뚫어요!”
이미 각자 위치가 정해진 상태라 지금 대형을 바꿨다간 오히려 더 위험했다. 내 말을 들은 팀원들이 인형을 처리하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인형들을 피해서 겨우 문 앞까지 도착한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문을 열었다. 그그그극, 두꺼운 문이 뻑뻑하게 열리며 생긴 틈으로 천사연과 하태헌이 먼저 들어갔다.
“가요!”
나는 바람으로 인형의 공격을 막아 내며 민아린과 권정한부터 문 너머로 보낸 후에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내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하태헌이 즉시 문을 닫았다.
쿠웅!
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를 끝으로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코앞까지 쫓아오던 인형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진 않았다.
“다들 괜찮습니까?”
“네.”
방에 내려앉은 짙은 어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민아린이 보였다. 다른 팀원들도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아직도 수가 저렇게 많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같은데.”
미간을 찌푸린 박건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A급인 나는 앞에 있는 팀원들 외에는 어두워서 보이는 게 없었다. 설마 S급인 박건호도 똑같은 건가?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하태헌 씨, 혹시…….”
SS급인 하태헌과 천사연은 뭐가 보이는지 확인하려던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놈들.”
“……!”
“여기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순진하기도 하지.”
아벨의 조롱하는 목소리는 아하하, 비웃음을 끝으로 조용해졌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치고 지나갔다.
“조심해요! 아벨이…….”
급히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던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칠흑같이 짙은 어둠 속에 서 있는 건 나 혼자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바로 앞에 민아린과 팀원들이 멀쩡히 있었는데.
마치 눈이라도 감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새까맸다. 양손을 들어 올려 눈앞에 펼쳐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공포가 몰려왔다. 관자놀이에 맺힌 차가운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아…….
내가 내뱉는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정신을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안 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모두가, 위험… 아니, 잠깐, 나는, 대체, 여기서…….
눈앞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의 모든 게 지워지고 어둠이 들어찼다.
‘여기서 뭘…….’
생각이 뚝 끊겼다. 뻑뻑한 두 눈을 꾹 감자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왔다.
“권세현.”
그 부름에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꿈을 꾸듯 희미했던 모든 감각이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코끝을 스치는 독한 위스키 냄새. 손에 들린 서늘한 유리잔. 달그락, 얼음이 흔들리는 소리. 모든 걸 하나씩 깨닫자 목덜미에 감도는 열기까지 무엇 하나 선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팔자 좋네. 나랑 술 마시다가 졸기까지 하고.”
“…죄송합니다.”
잠깐 눈을 좀 감았을 뿐인데 그걸 뭐라고 하네.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사과하자 상대가 내 생각을 모조리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
“나랑 마시는 거잖아, 세현아.”
“눈이 잠깐 불편해서 그랬습니다. 취한 건 아닙니다.”
“알아.”
유시혁이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큰 얼음이 하나 들어 있는 내 잔과 달리 술만이 담긴 잔이었다.
“네가 취했는지 아닌지 내가 몰라서 묻는 것 같아?”
“아닙니다.”
나를 정확하게 응시해 오는 은색 눈동자가 조명 아래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붉은 입술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자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긴장한 내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자 눈꼬리를 사르륵 접은 그가 시선을 내려서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뭐, 넌 취하면 바로 티가 나니까.”
“그렇습니까?”
유시혁과 단둘이 술을 마신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막 20살이 된 해부터 시작해서 적으면 두세 달에 한 번, 많으면 한 달에 몇 번이고 불려 와 마셨으니 숫자를 세는 의미가 없을 정도다.
그러니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신 적도 당연히 많았다. 특히 술을 처음 시작한 20살과 21살 때는 유시혁의 속도에 맞춰서 마시려다가 무리해서 쓰러지곤 했다.
이제는 유시혁도 지나치게 강요하지 않고 나도 적당히 눈치껏 마시니 필름 끊기는 경우는 적어졌지만… 그렇다 해서 이 시간이 마냥 편한 건 아니었다.
‘오늘도 자고 가라고 하겠군.’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 1시를 향해 가는 시간이 보였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유시혁의 집에는 내 방이 따로 있을 정도로 자주 신세를 졌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거지?’
유시혁과 단둘이 술을 마시는 건 좀 부담스럽긴 해도 많이 해 온 만큼 이 정도로 초조한 마음이 들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은 자꾸만 조여 왔다.
“아까 하려던 얘기를 마저 이어 가자면.”
“…….”
“최근 김 사장이 너한테 관심이 참 많던데.”
틱, 틱. 손목시계의 초침 넘어가는 소리가 기묘하리만치 크게 들려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불안으로 거칠어지는 숨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대체 왜 이렇게 진정이 안 되는 거야? 체한 것처럼 울렁거리는 속에 나도 모르게 가슴 근처를 매만졌다.
“그 여자가 너한테 관심을 주는 이유야 뻔하다만…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
“…….”
“권세현.”
“……네?”
헉, 어깨를 움찔 떨며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만 유시혁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맞은편에 앉아서 턱을 괸 유시혁의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망했다…….
“아니, 그… 음…….”
당황해서 더듬더듬 입을 열자 유시혁이 어디 한번 지껄여 보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죄송합니다. 김… 사장님이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당장 멱살이 붙잡혀서 바닥에 던져져도 할 말이 없을 만큼 궁색한 변명이었다.
“흠.”
내 예상과 달리 대답을 들은 유시혁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래. 넌 김 사장이 누군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관심이 없다는 거지?”
“……예.”
“그럼 어쩔 수 없네.”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시혁의 기분이 괜찮아 보여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알지 못하도록 몰래 한숨을 내쉬는데, 유시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안 드십니까?”
“너 정신 놓고 있는 꼴을 계속 구경하고 앉아 있으라고?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 머쓱하게 목덜미를 만지며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뒷정리라도 하려는 나를 막은 건 유시혁이었다.
“그대로 둬. 사람 시키게.”
“잔만 주방에 옮겨 두겠습니다.”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들어.”
유시혁은 타박하는 말과 달리 미소를 띤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허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시혁과 내가 사용한 잔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어나.”
“예?”
희미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뒤를 돌아보자 유시혁이 의아한 반응을 했다.
“뭐야.”
“방금 절 부르신 것 같아서.”
“부른 적 없는데.”
잘못 들은 건가? 그렇지만 분명…….
“권세현. 나 몰래 약이라도 처먹었어?
“안 했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유시혁이 입에 물었던 담배를 도로 집어넣고 내게 다가섰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바싹 붙어선 그에게서 씁쓸한 향이 훅 풍겨 왔다.
“…일어나.”
동시에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이 꺼져 어두운 거실 저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새하얀 빛 한 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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