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13화 (313/394)

313화

79. 허니 트랩

두꺼운 철문이 달린 방에 갇히자마자 박건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엄청나게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반항 한번 못 해 보고 갇혀 버렸는데.”

“여기 사람들은 싸울 상대가 아닙니다.”

대충 대답한 나는 시선을 돌려서 천사연에게 진지하게 요구했다.

“나중에 김우진도 팀장 시켜 줘.”

박건호 같은 재미주의자도 멀쩡히 팀장 노릇을 하는데 김우진이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팔짱을 낀 천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원한다면야, 당장은 어렵겠지만 나중에 경력 좀 차면 충분히 괜찮아 보이긴 하는군.”

“승진인데 싫어할 리가 있어?”

“김우진은 지금도 일 많이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건 누구나 다 그렇잖아.”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천사연이 답답하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우진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정리부터 하지. 권정한은 아무래도 백작가 저택에 있는 모양이야.”

“그래. 하태헌 씨야 정신 지배에 자유로우니까 다른 곳에 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만 권정한은 확실히 저택에 있을 것 같아.”

“김우진도 마녀를 노리고 있으니 잘만 설득하면 우리와 합류할 수 있겠군.”

“설득…….”

나는 아까 봤던 김우진의 예민한 모습을 떠올렸다. 이대로면 설득은 고사하고 도시 밖으로 쫓겨나겠는데.

지금 쫓겨나지 않고 여기에 갇혀 있는 것도 민아린 덕분이었으니까.

“솔직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핑계 댈 만한 건 저택 탈환을 도와주겠다는 제안 말고는 없겠네.”

“그래. 설득은 네가 하는 게 나을 거다.”

“왜?”

천사연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제일 제격이긴 했지만, 굳이 이렇게 짚어 주는 거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천사연이 대답했다.

“여태껏 봐 온 바로는 현실에서의 감정이 이곳에서도 통하는 모양이군.”

“현실에서의 감정?”

“현실에서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으면 이 공간에서 정신 지배에 당한 상태여도 현실의 감정에 영향을 어느 정도 받는다는 거다.”

“그게 가능해?

“사마엘이 직접 능력을 쓴 게 아니라 공간 자체의 효과니까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무엇보다 다들 등급이 높으니.”

천사연은 설명을 하면서 내 뒤에 얌전히 서 있는 우서혁을 바라봤다.

‘그렇구나.’

확실히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이제껏 만나 온 팀원들은 어느 역할이든지 대부분 친절했으니까.

“그래도 우습게 볼 수는 없어. 웬만한 감정으로는 정신 지배를 이겨 내는 건 힘들어 보이는군.”

천사연이 알 수 없는 눈을 하고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니 김우진 설득은 한이결, 네가 해야겠지.”

“…….”

천사연이 어떤 의미로 저 말을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나는 차마 부정하거나 반박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하태헌뿐만 아니라 천사연도…….’

예상하고 있었어도 막상 이런 상황이 오게 되니 난감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팀원들이 자신의 감정을 눈치챘다는 걸 김우진도 알고 있을까?

날 향한 김우진의 감정을 이용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하태헌과 권정한의 안전이 파악되지 않았으니 당장 뭐라도 해야 했다.

“…알겠어.”

한숨을 삼켜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 된 김우진을 의심스러운 침입자인 내가 고작 감정 하나만 믿고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라도 해 봐야겠지.

***

약 2시간 정도 흐른 후, 아까 김우진 곁에 있던 병사 중 한 명이 방을 찾아왔다.

“한 놈만 나와라.”

미리 얘기해 둔 대로 내가 나섰다.

한 명만 데려가는 건 이런 심문에서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었다. 나머지 세 명을 방에 가둬 둔 상태로 심문하면 그만큼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으니까.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알다니…….’

김우진의 명령이겠지? 또다시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하긴. 돌이켜 보면 김우진은 나이만 어릴 뿐이지, 머리도 좋고 이성적이고 생각도 깊었다. 게다가 요리까지 잘하지 않나. 이제 예쁘고 성격 좋은 여자 친구만 생기면 딱 좋을…….

‘잠깐만. 이건 아닌데.’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여자 친구까지 떠올리던 나는 기겁하며 상상을 멈추고 머리를 휙휙 저었다.

김우진이 정말로 날 그렇게 여긴다면 지금 이런 생각하는 것 자체도 매우 큰 실례였다. 예전에는 몇 번이고 여자 친구 사귈 생각 없냐고 물었지만… 그건 잘 몰랐을 때고. 지금은 어느 정도 알게 됐으니 저런 얘기도 생각도 그만하는 게 맞는 거겠지.

“셰드 님.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반대편 복도 끝에 있는 방에 도착한 병사가 가벼운 노크를 하고 내게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재빨리 미소를 지우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김우진의 앞에는 서류가 이리저리 널린 책상이 있었다. 노을이 비쳐 붉은빛이 옅게 차오른 방 안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그윽하게 났다.

“안녕하세요.”

최대한 착해 보이기 위해서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자 김우진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아무래도 김우진 상대로는 예의 바른 척이나 착한 척하는 게 다 역효과만 나는 것 같다. 억지로 올렸던 입꼬리를 샥 내리며 김우진 맞은편에 앉았다.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안 그러면 방에 가둬 둔 네 동료가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못 하니까.”

세상에. 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경악했다. 김우진이 내게 협박했다. 이게 뭐라고 엄청 대견해 보이네.

“걱정하지 마시죠. 저도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처지가 아니라서.”

“당당하군. 좋아. 마녀에게 동료가 붙잡혀 있다고 했는데, 위치 파악은 했나?”

“마녀에게 백작가 저택을 빼앗겼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곳에 갇혀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동료들도 선택받은 자입니다.”

“찾는 동료가 선택받은 자라고?”

의외라는 듯 반문한 김우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했다.

“동료 이름은 모른다고 했지. 정말로 모르는 거야, 아니면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거야?”

“편한 쪽으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동료 이름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어째서지? 이 도시에 있는 선택받은 자들의 얼굴은 내가 모두 알고 있다. 내 도움이 필요할 텐데.”

“글쎄요. 김… 아니, 셰드 님도 마녀를 내쫓기 위해선 실력 좋은 자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저희는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어 보입니다.”

“본인들 실력에 자신감이 대단하네.”

“이미 눈치채셨을 텐데요. 저를 포함한 방에 갇혀 있는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기운이 느껴질 테니까.”

내 당당한 태도에 김우진이 눈가를 찌푸렸다.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수상한 자들과 함께 움직일 수는 없다.”

“그건 다른 방법이 있을 때 얘기죠. 위기 상황에서 덩굴째 굴러온 행운을 이렇게 쉽게 걷어찰 겁니까? 마녀에게 고통받는 민간인들도 고려하십시오.”

“…….”

“게다가 저희 신원은 마리아 님이 한번 증명해 주지 않았습니까? 도시 밖으로 내쫓거나 죽이지 않고, 발로 걷어차면 문짝이 날아갈 방에 가둬 둔 이유도 그래서일 텐데.”

분위기가 완전히 내 쪽으로 넘어왔다. 기세에서 밀린 김우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이런 부분은 아직 약하구나. 날카로운 눈초리가 귀엽기는 하다만, 이래서는 내게서 정보를 얻어 내는 건 힘들 거다.

“쓸데없이 재면서 시간 버리지 말고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백작가도 뺏기고 마녀의 수하들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상황이라 더 물러설 곳도 없잖아요.”

실수로라도 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김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앞에 들이밀어진 내 손을 내려다보는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나는 경계심 많은 고양이를 대하듯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김우진이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손과 김우진의 손이 맞잡기 직전인 그 순간이었다.

“……!”

김우진의 뒤로 보이는 창문 너머로 무언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을이 져서 붉어진 하늘 중앙을 가르고 날아온 무언가는 김우진의 뒤통수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 이전에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악수하기 위해 내민 손으로 김우진의 멱살을 붙잡아 내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덜컹! 책상과 함께 김우진의 몸이 내게로 쏟아졌다. 김우진을 품에 안은 채 의자째로 넘어졌다.

“큭……!”

바닥에 등을 부딪친 동시에 채앵, 유리 깨지는 파열음과 함께 날카로운 것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날카로운 것의 정체는 화살이었다. 심지어 세 개가 연속으로 바닥에 파바박 꽂혔다. 김우진을 안은 채로 상체를 일으켜 화살을 쏜 상대를 확인했다.

‘저 복장은 분명…….’

검은 마스크와 로브로 온몸을 가린 정체불명의 사람 세 명이 맞은편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다. 저건 아벨의 인형이었다. 라푼젤의 탑에서 마주쳤던 인형과 같은 놈들이었다.

“천사연!”

나와 눈이 마주친 인형 셋이 몸을 돌려 지붕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본 내가 크게 외쳤다. 천사연은 SS급이니 이 정도 거리여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내 짐작대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천사연이 문을 벌컥 열고 등장했다. 그 뒤로는 천사연을 막다가 나가떨어진 병사들과 쫓아온 박건호, 우서혁이 보였다.

나와 김우진, 방 상태를 차례대로 살핀 천사연이 별다른 설명 없이도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창문으로 걸어갔다. 화살에 뚫려 너덜너덜해진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에 그의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군. 사라졌어.”

남들보다 더 먼 거리의 기척과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천사연이 저렇게 얘기할 정도면 인형들은 자신들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걸 알자마자 도망친 모양이다. 혀를 차며 말했다.

“못 잡아서 아쉽네. 설마 이런 식으로 기습해 올 줄이야.”

“아벨 측에서 뭘 노리고 있는지 어느 정도 감이 오는군.”

창문에서 내게로 시선을 돌린 천사연이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그래서, 둘이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지?”

“어?”

그 질문을 듣고서야 뒤늦게 품에 안겨 있는 김우진을 알아챘다. 이런, 나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제가 지켜 드리려다가…….”

“…….”

혹여나 아까 했던 제안을 거절할까 봐 사과부터 하는데, 김우진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온 얼굴을 붉게 물들인 김우진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으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1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