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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09화 (309/394)
  • 309화

    78. 예측 불허

    어깨를 다친 탓에 평소처럼 어깨동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천사연의 품에 온전히 안긴 채로 바람 능력을 사용했다.

    내 등과 무릎 뒤를 받치고 안아 든 천사연이 활짝 열린 창문의 문틀을 밟고 올라섰다. 기운을 끌어 올려 나와 천사연의 몸에 바람을 휘감았다.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빠져나오자 아래로 넓은 숲이 펼쳐졌다. 공중에 뜬 채로 달빛에 의지해서 주변을 살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네.”

    “보이는 게 없긴 하군.”

    밤이라 그런 건지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숲만 보이고 다른 건물이나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갈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때였다.

    숲 동쪽 저편에서 아우우우, 하는 늑대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나와 천사연은 동시에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시선을 맞췄다.

    “설마…….”

    “어차피 달리 갈 곳도 없으니 저기부터 확인해 보지.”

    고개를 끄덕이고 바람을 움직였다. 거리가 그리 멀진 않았으니 10분 정도만 날아가면 금방 도착할 듯싶었다.

    늑대 울음소리가 들린 장소로 향하며 천사연에게 이곳에 오기 전 아벨의 목소리를 들었던 일을 말해 줬다. 설명을 들은 천사연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눈가를 좁혔다.

    “아벨이 네 능력을 알아채지는 않았을 거다. 그 정도로 총명한 놈은 아니니까. 다만 한이결, 네가 아벨의 계획을 망친 건 확실해 보이는군.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동화를 건드릴 수 있다는 건가.”

    “그래. 프라우스 신도단은 우리 중에 등급 외 능력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감히 하진 못했을 테니까.”

    천사연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엘로힘이 얘기한 것처럼 내 존재가 조커 역할을 제대로 해낸 거라 볼 수 있었다.

    그럼 내가 원인이었다고 외치던 아벨의 히스테릭한 반응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난 여기 들어와서 단 한 번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어. 기운을 끌어 올리지도 않았고. 그런데 어떻게 내가 공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거지?”

    “네 기운이 사용하지 않아도 주변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해진 거겠지.”

    개입 능력을 최대한 자제해서 쓰라던 엘로힘의 당부가 천사연의 목소리 위로 겹쳤다.

    능력을 쓰지도 않았는데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니. 이건 좋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는 숨기는 게 더 힘들어지겠어.”

    “지금 당장도 문제는 커.”

    천사연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달빛 아래로 드러난 그의 표정은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아벨이 네가 무언가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니 그게 뭔지 이 공간에서 알아내려고 하겠지.”

    “인형을 이용해서 공격해 올 거라는 뜻이야?”

    “우리가 아닌 오로지 너만을 노리고 공격해 올 거다. 죽이려고 공격할 수도 있고… 혹은 끌고 가서 시간을 들여 알아내려고 할 수도 있어.”

    “…….”

    고개를 들어 나를 안고 있는 천사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방금 그 말에서 날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를 향한 천사연의 감정이 새삼 떠올랐다. 내게 서슴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하태헌과 똑같은 눈빛을 한 천사연.

    왜 내게 그런 감정을 갖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천사연의 감정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도 진심이겠지.

    나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거나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대답 대신에 긴장을 풀고 천사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몸을 짧게 움찔 떤 천사연이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늑대 울음소리가 들린 곳에 도착했다. 천천히 하강한 후에 바람을 없애자 달빛이 닿지 않아 어두운 숲 내부가 나타났다.

    천사연의 품에서 나와서 수풀이 가득한 주변을 둘러봤다.

    “기운이… 우서혁 씨가 여기 있는 게 분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사연이 내 어깨를 붙잡아 강하게 끌어당겼다. 동시에 새까만 물체가 내 앞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명확한 살기였다. 헉,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크르릉…….

    거대한 늑대가 나와 천사연을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위협스럽게 번뜩였다.

    “윽, 잠깐만. 천사연!”

    크릉! 또다시 두꺼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늑대로부터 내 앞을 가로막은 천사연이 망설임 없이 다리를 휘둘렀다.

    천사연의 긴 다리에 옆얼굴을 제대로 가격당한 늑대가 허공을 붕 날아 바닥에 우당탕 처박혔다. 고통이 상당한지 끼잉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늑대의 모습에 나는 경악했다.

    “우서혁 씨 맞잖아. 왜 때려?”

    “어차피 정신 지배당한 상태라 제압해야 할 텐데.”

    놀라서 소리치자 천사연이 심드렁한 어투로 대꾸했다. 자기 비서한테 발차기를 날려 놓고 저 태도는 대체 뭐야?

    “그건 당연히 이해하는데… 너무 세게 때렸잖아. 혹시 우서혁 씨랑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하나 정돈 있긴 하지.”

    하나 있다고? 그게 뭐길래 저렇게 인정사정없이 패는 거지?

    당황한 와중에도 그게 뭔지 궁금해진 내가 미처 묻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우서혁이 지치지도 않고 재차 달려들었다.

    천사연은 그런 우서혁을 예상했다는 듯이 나를 아예 뒤로 밀쳐 내고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으르렁! 천둥처럼 내리친 늑대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집채만 한 덩치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빠른 우서혁의 공격을 천사연은 웃으며 상대했다.

    제 어깨를 노리고 들어오는 이빨을 쉽사리 피해 낸 천사연이 우서혁의 콧등에 주먹을 망설임 없이 내리꽂았다. 자신의 몸집에 비하면 작기만 한 그 주먹을 얻어맞은 우서혁은 털을 바짝 세우고는 파르르 떨었다. 엄청 아픈가 보다.

    ‘SS급과 S급의 싸움…….’

    우서혁을 때리는 데에 굳이 서포팅하고 싶진 않아서 순순히 물러선 채로 구경했다.

    우리를 적으로 인지한 우서혁이 거침없이 달려드는데도 천사연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아니, 오히려 우서혁의 실력이 한참 아래라 봐주고 있다는 게 내 눈에도 훤히 보였다.

    거의 30분가량을 천사연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은 우서혁이 결국 꼬리를 만 채 두 번째로 바닥에 쓰러졌다. 애처롭게 낑낑거리는 그를 보자 너무 측은해서 나는 급히 우서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해, 이 정도면 됐잖아.”

    나중에 우서혁이 능력을 풀면 온몸에 멍 자국이 빼곡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천사연이 많이 때렸다.

    내가 끼어들자 주먹을 푼 천사연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리를 넘도록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 때문에 평소보다 배로 처연해 보였다.

    “나쁜 늑대에게서 지켜 줬더니 늑대 편만 들고… 이렇게 매정할 수가…….”

    “…….”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

    내 뒤에서 배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있던 우서혁이 코끝을 들이밀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축 늘어져 있던 꼬리가 살랑거리며 적대감만 차 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유순해졌다.

    ‘혹시 날 알아보는 건가?’

    한결 괜찮아진 분위기에 기대감이 생겼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우서혁이 얌전히 머리를 내 주었다.

    용기를 내서 뾰족하게 솟은 귀 사이를 쓰다듬으니 꼬리가 힘차게 흔들렸다. 이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천사연이 코웃음을 쳤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굳이 때리지 않아도 됐을 것 같아.”

    제정신이 아니라 가뜩이나 예민한데 우리가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놀라서 공격할 만했다.

    정신 지배를 풀어 줄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좀 더 쓰다듬어 주자 눈을 깜빡인 우서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커다란 혀로 내 볼을 핥으며 본격적으로 냄새를 맡아 왔다. 내게서 나는 피 냄새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천사연이 팔짱을 끼며 한마디를 뱉었다.

    “…이래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한 건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서혁이 얌전해졌으니 일단 다행이었다. 내게 거대한 머리를 들이밀며 킁킁거리는 우서혁을 내버려 둔 채로 천사연에게 말했다.

    “이제 어떡하지? 다른 사람들도 찾아야 하는데.”

    “일단 이 숲부터 벗어나는 게 낫겠군. 밤이라 어둠이 시야를 다 가리고 있으니.”

    “우서혁 씨가 사람으로 돌아올까?”

    내가 천사연에게 안긴 상태로 하늘을 나는 건 가능하긴 했지만, 변신한 우서혁까지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무거워서 아까처럼 오래 버티는 건 힘들었다. 게다가 기억이 없는 우서혁이 공중에 뜨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

    “흐음…….”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천사연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입가를 매만지며 상황을 정리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적어도 아침이 될 때까지만 숲 끝까지 걸어가 볼까? 이대로 동쪽으로 계속 가면 뭐라도 나올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그 선택지밖에 없긴 하군.”

    “날이 밝으면 나 혼자 위로 올라가서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올게. 그다음에 목적지를 다시 정… 으윽?”

    “한이결!”

    열심히 설명하던 그 순간이었다. 옆에서 자꾸만 날 핥으며 머리를 들이밀던 우서혁이 갑자기 내 몸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우서혁의 축축하고 뜨끈한 입 안에 상체가 고스란히 갇히자마자 천사연의 날카로운 기운이 확 퍼졌다.

    “난 괜찮아.”

    혹여 천사연이 또 우서혁을 때릴까 봐 미리 손바닥을 들어 올려 멀쩡하다는 것을 알렸다. 좀 당황스럽고 놀라긴 했지만, 이빨을 세우지 않아서 아프지는 않았다.

    다행히 나를 금방 뱉어 낸 우서혁이 보란 듯이 고개를 쳐들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방금 그 행동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여기서 나가면 늑대 행동 양식이라도 배워 놔야 하나?

    다친 곳은 없는지 나를 살핀 천사연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이동하게.”

    아까처럼 나를 안아 든 채로 이동하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냥 걷기만 하면 되니까 굳이 또 안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리가 다친 것도 아니고… 괜찮아.”

    “억지로 지혈만 해 둔 거라 무리하면 열이 오르거나 상처가 더 나빠질 수 있어. 고집부리지 마.”

    그런가?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 어깨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여전히 심했다. 천사연의 우려처럼 열이라도 올라서 쓰러졌다간 그저 짐 덩어리만 될 게 뻔했다.

    자존심을 접고 천사연에게 다가가려는데, 나와 천사연을 번갈아 보던 우서혁이 그르렁거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

    천사연이 우리 사이에 끼어든 우서혁을 노려보며 짜증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서혁은 내게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바싹 수그렸다. 등에 올라타라는 것 같았다.

    천사연도 그걸 알아챘는지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쥐었다. 설마 또 때리려고? 나는 급히 우서혁의 목 부근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진정해!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잖아.”

    “우릴 속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있냐? 아무튼 이번에는 우서혁 씨랑 붙을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날 안고 있으면 더 위험하잖아.”

    내 대답을 들은 천사연이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내는 천사연과 꼬리를 살랑거리는 우서혁 사이에 낀 나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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