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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08화 (308/394)
  • 308화

    쿠웅!

    “으윽!”

    공기를 가르고 끝도 없이 떨어지다가 곧 바닥에 등을 강하게 부딪쳤다.

    얼얼한 등을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키자 돌벽으로 감싸인 복도가 보였다.

    ‘이건 무슨 동화 속인 거지?’

    방금까지 하태헌과 있었던 성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황금과 대리석 바닥, 화려한 보석으로 한껏 꾸며져 있던 신데렐라와 반대로 이곳은 퀴퀴한 냄새와 새까만 덩굴이 잔뜩 뒤덮인 돌벽만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주변이 바뀌기 직전에 봤던 인형의 안구와 아벨의 목소리도 신경 쓰였다.

    -네가 원인이었어!

    내가 원인이라니, 이게 무슨 뜻이지? 설마 개입 능력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가?

    ‘만약 아벨이 개입 능력을 알아낸 거라면…….’

    최대한 빨리 팀원들을 다시 만나야 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어떤 반응을 보여 올지 예상할 수 없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어둠이 내리깔린 주변을 둘러봤다. 헨젤과 그레텔, 신데렐라 동화와 달리 이번에는 나 혼자였다.

    난감하네. 여기가 무슨 동화인지, 어디인지도 모르니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창문이라도 있으면 능력을 사용해서 바깥으로 나가 볼 텐데, 그것도 없고.

    양옆으로 쭉 이어진 복도는 어두워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네.

    한참을 고민하다가 우선은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카각, 칵, 카각.

    날카로운 것에 돌벽이 긁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눈가를 찌푸렸다.

    ‘뭐지?’

    끽끽거리는 불길한 소음 사이로 능력자의 기운이 풍겨 왔다. 발이 멈추고 온몸이 바싹 긴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을 뚫고 키가 큰 남자가 은으로 된 거대한 가위를 든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각, 긱, 바닥에 질질 끌려오는 뾰족한 가위가 아까부터 들려온 소음의 정체였다.

    하지만 그 비상식적인 무기보다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얼굴이었다. 검은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박건호 팀장님?”

    내 부름을 들은 박건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들고 있던 거대한 가위를 마치 검처럼 휘둘렀다.

    “큭……!”

    다급히 바람 능력을 끌어 올려 공중을 날아오르자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바닥이 굉음과 함께 부서졌다. 투두둑, 부서진 돌 조각이 흩어지며 뿌연 연기가 치솟았다.

    “잠깐만요, 박건호 팀장님!”

    연기를 가르고 예리한 가위 날이 내 쪽을 향해 휘둘러졌다.

    반격하지 못한 채로 공격을 겨우 피하며 박건호를 애타게 불러도 그는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공격을 해 왔다.

    정신 지배에 걸린 건가? 아니, 애초에 저 사람이 박건호가 맞나?

    걸치고 있는 검은 옷과 얼굴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 때문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박건호일 가능성도 있으니 나로서는 도저히 공격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박건호일지도 모르는 저 사람을 버리고 도망쳐야 하나?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겨우 만난 팀원을 쉽게 포기했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 너무나도 불안했다.

    콰앙!

    내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가위가 돌벽을 부서뜨렸다. 동시에 터져 나온 충격에 휩쓸린 내 몸이 중심을 잃고 훅 튕겨 나갔다.

    “으윽!”

    쿠웅, 그대로 날아가 맞은편 벽에 뒷머리가 세게 부딪혔다. 눈앞이 흔들리고 이명이 머릿속에 가득 퍼졌다.

    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부들부들 떨렸다. 그사이에 내 앞까지 걸어온 박건호가 내 허벅지를 힘줘서 밟은 채로 가위를 들어 올렸다.

    “……!”

    심장을 노리고 내리꽂히는 가위 끝을 본 나는 입술을 깨문 채로 온 힘을 다해 상체를 비틀었다. 심장 대신 어깨를 길게 베고 지나간 가위 끝이 벽에 박혔다.

    이러다간 진짜 죽겠다 싶어서 일단 박건호를 밀쳐 내기 위해 바람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내가 미처 능력을 쓰기도 전에 박건호가 무언가에 옆구리를 강하게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새하얀 겉옷을 걸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옷자락 사이로 길게 내려온 검은 장발이 유독 시선에 박혀 왔다.

    남자의 발차기에 바닥을 구른 박건호는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그걸 본 남자가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안 돼, 기다려!”

    박건호일지도 모를 이에게 휘둘러진 검을 본 내가 경악하며 막아서기도 전에 박건호의 목이 잘려 나갔다. 툭, 아래로 떨어진 박건호의 머리에 숨통이 조여들었다.

    “허억…….”

    “…이결, 한이결.”

    “헉, 으…….”

    가슴을 움켜쥔 채로 숨을 헐떡거렸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주변에 들리는 모든 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목과 분리된 박건호의 머리를 본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붙든 상대가 내 고개를 억지로 들어 입 속에 손가락을 강제로 집어넣었다.

    “숨 쉬어, 숨 쉬고 똑바로 봐.”

    그 말에 통증으로 질끈 감고 있던 두 눈을 힘겹게 떴다. 남자의 뒤로 쓰러진 박건호의 시체가 보였다. 아니, 시체가 아니라…….

    ‘인형?’

    깔끔하게 잘려 나간 목의 단면은 나무토막 같았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흘려야 할 붉은 피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천천히 이성을 되찾는 사이에 입 안에서 손을 빼낸 남자가 쓰게 웃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천사연.”

    평소와 달리 긴 머리카락을 한 남자는 틀림없이 천사연이었다. 지쳐 보이는 내 상태와 어깨에 남은 상처를 찬찬히 살핀 그가 말했다.

    “아벨의 인형이다. 일부러 박건호와 비슷하게 만든 모형이지. 옷과 마스크로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모조리 가려서 대충 봐선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기운이… 박건호 팀장님이라고 생각했어.”

    “그걸 노렸겠지. 기운도 네가 공격을 피하느라고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서 그래. 가짜라는 걸 알고 봤다면 절대 속지 않았을 거다.”

    먼저 몸을 일으킨 천사연이 손을 내밀었다. 그걸 마주 잡자 천사연이 나를 가뿐히 일으켰다.

    “여긴 무슨 동화야?”

    “그 어떤 동화도 아니야. 우리를 갖고 놀려던 아벨은 어째서인지 신데렐라를 끝으로 마음을 바꾼 모양이군.”

    “네 그 머리나 옷은?”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니 이 차림이던데. 머리카락은 이것보다 훨씬 길었는데 내가 급한 대로 다듬은 거다.”

    번거롭다는 기색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쥐었다가 놓은 천사연이 설명을 이었다.

    “동화가 마구잡이로 섞였어. 난 아마 라푼젤로 깨어난 것 같지만 다른 팀원들도 라푼젤 동화와 관련 있을지는 알 수 없군.”

    동화가 섞였다고? 그 말에 여기 오기 직전에 들었던 아벨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동화라는 공간을 만들어 낸 아벨.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원인이 나라는 것을 눈치챈 건가? 그래서 원래 계획 대신에 살인 인형을 풀었고?

    아무 증거 없는 추측일 뿐이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었다. 생각에 잠긴 내게 천사연이 말했다.

    “일단 치료부터 하는 게 좋겠군.”

    ***

    천사연을 따라 복도 끝으로 걸어가자 위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그 끝에는 잡동사니가 모여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정말 라푼젤인가 보네.”

    방 창문으로 바깥을 살핀 나는 이곳이 높다란 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문 밖에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과 널따란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리 와.”

    잡동사니를 이리저리 뒤적이던 천사연이 내게 손짓했다. 어디서 찾은 건지 테이블 위에는 붕대와 거즈, 소독약이 놓여 있었다.

    피로 흠뻑 젖은 상의를 벗고 의자에 앉았다. 천사연이 깨끗한 천으로 피를 닦아 내자 상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흠, 단순히 붕대 좀 감는다고 해결될 부상이 아니군.”

    “그러게.”

    살점이 제대로 베인 상태라 붕대만 감아 봤자 피가 계속 흘러서 별 의미가 없을 게 뻔했다.

    새삼 민아린이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줬는지 느꼈다. 민아린이 있었으면 이정도 부상은 금방 나았을 텐데.

    “소독하고 상처 안에 거즈를 넣을 건데. 버틸 수 있나?”

    “못 버티면 기절이라도 시켜 주게?”

    “안아 줄 수는 있지.”

    “꺼져.”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픽 웃은 천사연이 다른 천에 소독약을 뿌렸다. 곧이어 어깨에 수십 개의 바늘이 찌르는 듯한 따가운 고통이 퍼져 나갔다.

    “흐… 으윽…….”

    소독이 끝나고 베인 상처 사이로 거즈를 쑤셔 넣을 땐, 그럭저럭 버틸 만했던 통증도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끔찍하게 심해졌다.

    내가 이를 강하게 물고 겨우 신음을 참아 내는 동안 능숙한 손놀림으로 지혈을 하고 어깨 위에 붕대를 감아 맨 천사연이 끝을 단단하게 묶었다.

    “민아린 힐러부터 빨리 찾아야겠군.”

    고통을 참느라 열이 오른 뜨거운 뺨에 서늘한 손이 톡 닿아 왔다. 욱신거리는 어깨를 애써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아린 씨를 찾아도 정신 지배를 끊어 내지 못하니까 별 소용 없잖아. 여기 남는 옷 있어?”

    “나랑 비슷한 것도 괜찮다면.”

    낡은 장롱을 연 천사연이 걸려 있는 옷 중 하나를 꺼내서 건네줬다.

    천사연이 걸치고 있는 겉옷과 닮은 새하얀 옷이었다. 안에 셔츠를 입은 천사연과 달리 맨몸인 나는 앞섶을 여미고 허리끈을 묶었다.

    “한이결. 네가 입고 있던 옷은 신데렐라 동화에서 입었던 파티복으로 보이는데. 혹시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건가?”

    “맞아. 여기 오자마자 아까 그 인형한테 습격받았어.”

    무심코 대답하자마자 천사연의 질문에서 이상한 부분을 알아채고 즉시 되물었다.

    “잠깐만, 그럼 넌 나보다 먼저 여기로 넘어온 거야?”

    “넘어온 순간은 똑같았을 거다. 하지만 내가 눈을 뜬 건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이지. 내가 보기엔 네가 제일 늦게 눈을 뜬 것 같군.”

    천사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모두 사라졌다. 달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에 얼굴이 절반 가려진 그에게선 싸늘한 불쾌감이 엿보였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마녀 역할의 인형을 죽이고 탑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마주친 인형을 처리하고 있었다. 한이결, 네가 만났던… 박건호를 닮은 인형과 비슷한 놈들이 탑에 수십 마리가 있어.”

    “수십 마리? 그럼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거야?”

    “박건호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원과 하태헌을 닮은 인형도 있더군. 이 탑만이 아니라 이 공간 전체에도 있을 수도 있고.”

    “정신 지배를 당한 다른 사람들이 저 인형을 마주치면…….”

    “좋지 않아.”

    방금 만났던 박건호를 본뜬 인형은 비록 모든 게 가짜였지만 전투 실력은 어느 정도 갖춘 상태였다. 정신 지배에 당한 팀원들은 인형을 이기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틀 동안 탑을 모조리 뒤져 봤지만 나 외에 사람은 없었어.”

    “탑 밖으로 나가서 찾아봐야겠네.”

    천사연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고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빠져나갈 정도로 큰 창문. 라푼젤에 등장한 탑인 만큼 굉장히 높았지만 내 바람 능력이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로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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