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방으로 들어간 나는 의자에 앉아 있던 김우진이 몸을 일으키는 걸 보고 어깨를 굳혔다.
이런. 생각해 보니 하태헌의 방에서 하루 자려면 김우진을 여기에 혼자 두고 가야 하는구나.
아무리 하태헌과 별일 없이 잠만 자고 올 거라 해도 공식적으로 첫날밤인데 김우진을 데려갈 수는 없을 테니까.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내게 김우진이 먼저 물어 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 응.”
무심코 대답하자마자 더욱 난감해졌다. 잘 다녀왔냐니. 저거 결혼을 말하는 거 맞겠지?
‘아니, 잠깐만… 나 지금 너무 앞서서 생각하는 거 아닌가?’
김우진이 하태헌이나 천사연처럼 나를 다르게 보고 있는 게 확실하지도 않은데 왜 혼자서 지레짐작하고 불편해하는 거야? 아니면 어쩌려고?
엄청 무례하잖아. 나중에 김우진이 내가 이런 마음을 가졌다는 걸 알고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일단 지금은 해 오던 대로 하자. 괜히 김우진의 눈치를 봐 봤자 서로 감정만 상할 게 뻔했다.
“너는 잘 쉬고 있었어? 뭐 좀 먹었고?”
결혼식에 이어 파티까지 다녀온 탓에 나도 제대로 식사를 못 했지만, 온종일 혼자 방에서 기다리기만 했을 김우진이 더 걱정스러웠다.
“아까 다른 시종분들께서 챙겨 주셔서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진짜?”
다른 시종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신기하네.
그러고 보면 김우진은 현실에서도 물리지원팀 직원들하고 사이좋게 지냈었지. 김우진이 알고 보면 착하고 정이 많은 아이라는 걸 알아채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거 같아서 참 좋았다.
“식사도 못 하고 하루 종일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왕자님께서는 식사하셨습니까?”
“난 먹은 게 없긴 한데. 별로 배가 안 고프네.”
“그래도 빈속으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제가 가서 수프라도 받아 올까요?”
“아니야, 괜찮아.”
다른 때라면 김우진이 가져다줄 수프를 고맙게 받아먹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김우진이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말을 고르던 그때, 문을 노크하며 시종들이 들어섰다.
“왕자님, 첫날밤 준비를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
제일 앞에 서 있는 시종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하는 얘기에 김우진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타이밍 진짜…….’
충격받은 김우진과 당장 준비를 시작하자는 눈빛을 보내 오는 시종들 사이에 끼어서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걸 어쩌지. 우선 시종에게 물었다.
“준비가… 오래 걸리나?”
“옥체를 청결히 하신 후에 향유를 바르고 의복을 입으시면 됩니다.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옷만 놓고 나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내 명령을 들은 시종들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명령대로 옷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방을 나갔다.
방에 김우진과 단둘이 남자 아까는 느낄 수 없었던 싸늘한 정적이 피부로 닿아 왔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눈만 깜빡이는 김우진을 향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음, 그게… 오늘은 옆방에서 자고 와야 할 것 같아. 미안.”
그 말에 김우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방이 어두워서 그런지 김우진의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짙고 어두웠다. 천사연의 집에서 김우진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던 그 밤이 떠올랐다.
“제게 왜 사과를 하십니까?”
“…….”
“알겠습니다. 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김우진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이전에도 한 번 봤던 웃음이었다.
그걸 깨닫자 숨이 턱 막혔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서 내가 대체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뱉어 낸 건 저 짧은 한 마디였다.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지만 어느 게 정답이고 틀린 답인지 구분할 자신이 없었다.
김우진에게서 등을 돌려서 시종이 가져다준 옷을 들고 방을 빠져나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복도로 나오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미치겠네.’
다시는 김우진이 그런 웃음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각오가 무색하게 저번과 똑같은 문제가 되풀이되고 말았다.
한탄 어린 숨을 길게 내쉬고 하태헌이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옷은 거기서 갈아입어야겠다.
우서혁에게 미리 전달받은 하태헌의 방 위치는 복도를 한참이나 걸어야 나왔다. 편의상 옆방이라고 표현했지만, 성이 워낙에 넓은 데다 방마다 크기도 커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하태헌은 다른 성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되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텐데… 하태헌과 만나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대화해 보자.
“하태헌 씨.”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간 나는 하태헌이 시종들과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방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게 하태헌이 손짓했다.
“들어와라.”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왕자님.”
내 방을 찾아왔던 시종과는 다른 시종이 송구하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준비를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계속 거절하셔서…….”
“혼자 씻겠다는데 기어코 들어오려고 하더군.”
하태헌이 시종의 말을 끊어 내며 당당하게 고자질을 해 왔다.
하태헌은 자신을 은근슬쩍 노려보는 시종들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느껴지지 않나 보다. 나도 똑같이 거절했으니 하태헌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괜찮으니 옷만 두고 나가라.”
“알겠습니다.”
똑같은 명령으로 시종들을 내보내고 시종이 놓고 간 옷을 하태헌에게 건네줬다.
“죄송합니다. 설마 하태헌 씨에게도 찾아올 줄 몰랐어요.”
“상관없다.”
내게서 옷을 받아 간 하태헌이 잠시 고민하다가 내게 물었다.
“나는 네가 여길 온 게 더 신기한데.”
“네?”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 그제야 하태헌의 말뜻을 이해했다.
동화를 끝내기 위해서 한 결혼인 만큼 첫날밤을 굳이 보낼 필요는 없다고 여겼겠지. 나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고.
“저도 안 오려고 했는데… 괜히 소문이 잘못 났다가 복잡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동화가 계속될 가능성을 따져 보면 쓸데없는 문제는 없는 편이 낫습니다.”
“흠.”
평범한 잠옷이라기엔 지나치게 얇은 옷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살핀 하태헌이 대답했다.
“그럼 오늘이 우리 첫날밤이라는 건가?”
“그렇… 예?”
“기대되는군. 옷 갈아입고 와.”
“예?”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내가 멍청하게 반문만 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가지 않자 하태헌이 손을 불쑥 뻗어서 내 옷을 움켜잡았다.
“여기서 갈아입을 거라면 도와주도록 하지.”
“예? 잠깐, 잠깐만요!”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이해한 나는 기겁하며 옷을 빼앗기지 않도록 붙잡았다.
“저는 그냥 잠만 잘 겁니다.”
“누가 뭐라고 했나? 일단 옷을 갈아입으라는 거다. 어차피 예전에도 한 번 해 줬는데.”
“됐습니다. 옷은 제가 갈아입을게요.”
바들바들 떨면서 옷을 넘겨주지 않자 하태헌이 혀를 차며 놓아줬다.
“이럴 땐 눈치가 쓸데없이 빠르군. 생존 본능인가.”
“제가 더 당황스러운데요… 하태헌 씨,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이 정도면 아주 신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팔짱을 끼며 고개를 치켜세운 하태헌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랑 스킨십을 그렇게 많이 해 놓고 이제 와서 당황하는 게 더 웃기군. 내 입장에서는 첫날밤이라 하면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나?”
“우리가 진짜로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예전에 엘의 집에서는 별문제 없이 잠만 잘 자 놓고.”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건 그렇지만… 근데 자꾸 왜 붙으세요?”
대화를 하는 와중에 조금씩 다가오는 하태헌의 모습을 알아챈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하태헌이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왜 떨어지는 거지?”
“그냥 조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리 와.”
“거기서 말하세요. 다 들려요.”
하태헌이 두 걸음 걸어오면 나도 두 걸음 물러섰다. 눈가를 좁힌 채로 애매하게 벌어진 거리를 노려보던 하태헌이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다. 그 정도로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네?”
“부담 주려고 한 건 아니다. 나 혼자 너무 들뜬 것 같군. 난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넌 여기서 갈아입어라.”
순순히 물러선 하태헌이 처연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내게서 등을 돌렸다. 상처받은 것처럼 구는 하태헌을 보자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아니, 왜 그렇게 서운해하고 그러세요. 하태헌 씨가 절대 부담스럽거나 싫은 건 아니고요…….”
급히 다가가 오해를 풀려고 열심히 변명하자 그런 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하태헌이 대뜸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해 왔다.
깜짝 놀라서 넋이 나간 나를 두고 하태헌이 짙게 웃었다. 뭐야?
“설마 장난치신 겁니까?”
“당연히 장난이지. 내가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이나?”
“…….”
“이제야 얼굴이 좀 풀렸군. 방금까지는 영 좋지 않더니.”
기가 막혀서 머리가 절로 아파졌다. 요즘 들어 하태헌이 천사연을 닮아 가나, 자꾸 이상한 짓을 한다니까.
“비켜요. 저 방으로 돌아갈 겁니다.”
“첫날밤에 신부를 버리려고?”
“소문이 나든 말든 다 때려치울…….”
앞을 가로막은 하태헌을 밀쳐 내고 김우진이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대앵, 댕. 어마어마하게 큰 종소리가 성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건…….”
어딘가 익숙한 종소리는 얼마 전에 하태헌과 무도회장에서 춤을 출 때 들었던 종소리와 똑같았다. 순식간에 달라진 공기와 낯선 기운을 예리하게 알아챈 하태헌이 주변을 살폈다.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종소리가 성 전체에 들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지금은 어째서…….”
“한이결!”
하태헌이 나를 품에 안았다. 뒤늦게 내 몸이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뿐만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하태헌의 몸과 건물 벽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화질이 깨지듯 마구잡이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조각조각 나눠진 벽 너머로 주황색 장막이 나타났다.
“하태헌 씨, 아무래도 동화가……!”
하태헌에게 미처 설명을 다 해 주기도 전에 새까만 암흑이 시야를 확 덮어 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공간 속에서 홀로 남은 나는 귀가 찢어질 것처럼 강한 파열음과 히스테릭한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원인이었어!”
‘아벨?’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인형의 안구가 어둠 너머로 보였다.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몸이 엄청난 속도로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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