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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06화 (306/394)

306화

‘…아니, 근데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 이건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애써 마음을 다잡고 얌전히 서 있는 하태헌에게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새하얀 면사포를 천천히 올렸다.

평소와 달리 앞머리를 모두 내린 하태헌이 면사포가 올려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고개를 들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하태헌은 나처럼 어느 정도 치장했는지 평소보다 좀 더 화사해진 얼굴이었고 부드러운 향기가 풍겨 왔다.

이제껏 하태헌과 입을 맞춘 적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내가 먼저 하려니까 너무나도 어색했다.

‘어차피 해야 하는 거면 괜히 뜸 들이지 말고 빨리 해치우자.’

마른침을 삼키며 하태헌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자 그가 옅게 웃으며 상체를 조금 숙여 줬다.

한 손은 면사포를 잡고 한 손은 하태헌의 어깨 위에 올린 채로 고개를 기울여서 하태헌에게 입을 맞췄다. 그에 맞춰 경쾌한 팡파르가 울려 퍼지며 연분홍색 꽃잎이 눈처럼 쏟아져 흩날렸다.

5초 정도 지난 후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맞대고 있던 입술을 뗐다. 그러자 주례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성스러운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역시 예상대로 진짜 키스가 아니어도 넘어가 주는구나. 귀족들의 박수를 받으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계단 아래에 있는 하객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내게 하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뽀뽀가 아니라 키스하라고 했는데.”

“…적당히 넘어가 주시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입을 맞춘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천사연을 포함한 팀원들은 물론이고 알지도 못하는 낯선 사람들까지 방금 그 장면을 봤으니, 이 공간을 나가고 나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만으로도 벌써 피곤했다.

“확실히 키스하기엔 장소가 별로군.”

“…….”

뭐지? 장소만 괜찮았으면 했을 거라는 의미인가?

아쉬워 보이는 하태헌과 짜증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천사연.

두 명을 번갈아 살핀 나는 속으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친다, 정말.

***

결혼식이 끝난 후, 나와 하태헌의 결혼을 축하하는 파티가 성대하게 열렸다.

새하얀 정장에서 파티복으로 갈아입은 나와 하태헌이 파티장에 입장하자 귀족들이 앞다퉈 다양한 선물과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1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축하 행렬이 끝나갈 무렵 찾아온 귀족은 천사연이었다. 앞머리를 모두 올려 이마를 드러내고 붉은 자수가 들어간 검은 파티복을 입은 천사연은 진짜 귀족 같았다.

생각해 보면 굳이 역할이 아니라도 천사연은 귀족과 비슷하긴 했다. 녀석이 어릴 때 살았던 저택의 규모나 집안을 떠올리면 귀족 집안 그 자체였으니. 어울리는 이유가 있었네.

“고맙네.”

어색하게 대답하자 빙긋 미소 지은 천사연이 하태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가문의 막내가 왕국의 한 명뿐인 왕자님과 결혼을 하다니. 놀랍군.”

어딘가 놀리는 듯한 말투에 하태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비록 친형은 아니지만 함께 지내면서 참 즐거웠는데 아쉽게 됐어. 그렇지 않나?”

뻔뻔하게 물어 오는 천사연의 모습에 하태헌이 주변을 살폈다.

가까운 거리에 정신 지배에 걸린 우서혁부터 귀족들까지,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확인한 하태헌이 보란 듯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아쉽습니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왕자님과의 결혼이니 지금이 더 행복하군요.”

“행복하다라…….”

“그쪽도 저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아주 흔쾌히 결혼을 받아들였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적나라한 도발에 천사연의 웃음이 짙어졌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지만 둘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무척 차가웠다.

‘왜 이런 상황에서 싸우는 거야.’

하태헌과 천사연의 대화에 관심 없어 보이는 우서혁이 이번에 선물로 들어온 과일주가 담긴 잔을 건네줬다.

그걸 받아 마시며 둘의 싸움을 마저 구경했다.

“뭐,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 동생이 말한 대로 다른 누구도 아닌 왕자님인데.”

“그 왕자님은 저를 선택하셨죠.”

“네가 신데렐라니까.”

“제가 신데렐라가 아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글쎄. 모르는 일이지.”

슬슬 말리는 게 좋으려나? 그보다 우서혁이 준 술이 제법 맛있었다.

과일주답게 달달하고 상큼한 맛에 스트레스가 풀리는 걸 느끼며 우서혁에게 물었다.

“이거 무슨 과일이 들어간 거야?”

“분석 결과 사과와 약간의 자몽, 레몬, 복숭아와 탄산이 들어갔습니다.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그새 분석을 한 건가? 하긴, 나는 왕자니까 선물 받은 건 다 검사를 하겠구나.

“응. 부탁해.”

“알겠습니다.”

우서혁을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아직도 말싸움 중인 천사연과 하태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쯤에서 멈추라고 한마디 정도는 해야겠다.

“뭐가 됐든 왕자님과 결혼한 건 그쪽이 아닌 저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보다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동생아.”

그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은 천사연이 하태헌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그쪽이라고 부르니까 너무 섭섭하네. 이제 앞으로 자주 만나지도 못할 텐데, 마지막으로 형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군.”

“뭐?”

“오.”

천사연을 형이라고 부르는 하태헌? 멈추라고 하려던 마음을 곱게 접은 나는 기대감을 가득 안고 하태헌을 바라봤다.

“…….”

예상 못한 요구에 당황한 하태헌이 나를 돌아봤다.

마치 도와 달라는 것처럼 보이는 그 표정이 귀여웠지만 하태헌이 형 소리를 하는 건 나도 듣고 싶었던 터라 모른 척 외면했다.

“자, 어서. 형이라고 불러 봐.”

“무슨 속셈이지?”

“속셈이라니? 막내가 형한테 형이라고 부르라는 게 속셈이 있을 리가. 그리고 지금 반말하는 건가?”

둘의 대화가 점점 길어지자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만큼 많아졌다.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고민하던 하태헌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낮게 말했다.

“……형.”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형.”

으드득, 어금니끼리 부딪치는 살벌한 소리가 하태헌에게서 들려왔다.

기어코 하태헌에게 형을 뱉어 내게 만든 천사연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두 분 결혼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빙글거리며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천사연이 자리를 떠났다. 때마침 우서혁이 새로 가져다준 잔을 받은 나는 그걸 하태헌에게 넘겨줬다.

“먹어 보세요. 맛있어요.”

천사연에게 제대로 당한 하태헌이 열불 난다는 얼굴로 술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걸 조용히 응시하던 나는 은근슬쩍 하태헌에게 몸을 붙이며 물었다.

“하태헌 씨.”

“말해.”

“저한테도 형 한 번만…….”

“…….”

하태헌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가 이런 눈으로 나를 본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는 틈만 나면 저렇게 쳐다보곤 했는데.

“큼, 장난입니다. 그보다 결혼식이 끝났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네요.”

“그래. 이대로 계속 변화 없이 이어진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다른 방법… 아무런 정보도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결혼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여겼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우를 제외한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뿐인가? 가슴 속이 절로 답답해졌다.

“어떡하죠? 결혼이 아니라면 성 밖으로 나가서 정보를 얻어 봐야 할 텐데, 그게 쉽지가 않아서요.”

왕자라서 성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는 여러 제한이 많았다.

하태헌도 이제 성으로 들어왔으니 나랑 처지가 비슷할 텐데. 그럼 천사연에게 많은 부분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내일까지는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도록 하지. 급하게 행동했다가 오히려 다른 문제가 더 생길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어느새 파티가 시작된 지 시간이 제법 흘렀다.

아까 술을 가져다줄 때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 없던 우서혁이 시간을 확인하고 나지막이 말해 왔다.

“밤이 늦었습니다, 왕자님. 먼저 올라가시겠습니까?”

쉬러 가겠냐는 뜻인 거 같다. 여기 파티장에서 뭔가를 더 할 건 없어 보이긴 하는데.

내가 하태헌에게 바라보자 그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올라갈게.”

우서혁의 뒤를 따라서 파티장을 벗어나 원래 내가 지내던 방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걷고 있으려니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가장 중요했던 결혼식을 어찌 잘 끝냈으니 하태헌의 말대로 오늘은 쉬고 내일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는 편이 낫겠다.

“왕자님.”

“어?”

방문을 열기 전에 우서혁이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셔서 조금 기다리시면 준비를 도울 시종들이 도착할 겁니다.”

“준비? 무슨 준비?”

결혼식에 파티까지 했는데 아직도 남은 게 있는 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잠시 머뭇거린 우서혁이 말했다.

“첫날밤 준비를 도울 시종들입니다.”

뭐? 첫날밤? 무슨 첫날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첫날밤?

입을 벌린 채로 굳어 버린 내게 우서혁이 이어 설명했다.

“결혼하셨으니 상대의 방에 찾아가셔서 첫날밤을 보내셔야 합니다.”

“어… 잠깐만. 꼭 해야 하는 거야?”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니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왕자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시종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 달라고 하려던 나는 문득 든 생각에 대답을 멈추었다.

그래도 결혼까지 했는데 첫날밤에 찾아가지 않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침실에 김우진을 들인 것도 소문이 다 퍼졌는데, 첫날밤이 없으면 똑같이 될 가능성이 컸다. 최악의 경우 하태헌이 남들에게 무시를 당할지도 모르고.

‘차라리 하태헌의 방에서 하루 자는 게 좋겠다.’

하태헌과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예전에 엘로힘의 집에서 지낼 때 몇 번 겪어 봤으니 딱히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마음을 정한 나는 우서혁에게 부탁했다.

“아니야. 보내 줘. 그래도 결혼했는데 첫날밤은 챙겨야지. 신데렐라의 방은 바로 옆이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우서혁이 어딘가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리 준비해 둔 대로 시종들을 올려 보내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우서혁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갔다.

어딘가 찝찝해진 마음에 멀어져 가는 우서혁의 등을 보던 나는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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