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77. 변화
차에서 내린 이주하가 홍시아에게로 달려갔다.
“홍시아 마스터.”
“왔어?”
팔짱을 낀 채로 앞을 응시하던 홍시아가 이주하를 발견하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선 평소와 달리 싸늘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어때? 뭔가 차도가 있어?”
“아니. 그대로야.”
그 대답에 이주하도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봤다.
세련된 디자인의 외관과 넓은 내부, 다양한 미술 작품으로 호평받던 데우스 미술관. 현재는 미술관 건물 전체와 정원까지 통째로 정체불명의 주황색 장막에 잠식당해 있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피부에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장막에서 풍겨 오는 기운 때문이었다. S급인 자신마저도 이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차마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방금 막 오후 5시를 넘겼으니 이걸로 저 장막이 생긴 지 벌써 나흘이 지났네.”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하는 홍시아에게 이주하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차수연 능력자는? 좀 괜찮아?”
“많이 지친 것 같아서 잠깐 쉬라고 억지로 보냈어. 5시간도 안 돼서 다시 돌아오겠지만.”
갑작스럽게 생겨난 장막으로 정부와 언론이 발칵 뒤집혔다.
그럴 만도 한 게, 장막 속으로 실종된 사람 중에 기업인과 정치인, 유명 배우가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뒤늦게 밝혀진 미술관 비공식 경매에 참석한 자들이었다.
문제는 경매에 초대된 자들 외에 평범한 시민들도 많았다. 주말 오후에 가족들과 함께 미술관을 관람하러 왔다가 그대로 장막에 먹힌 것이다. 차수연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그렇게 사라졌다.
사람들이 다수 실종됐는데도 해결 방법을 찾는 일은 지지부진했다. 장막을 연구한 관계자 대표는 ‘장막에 현재로선 알 수 없는 어떤 물질이 섞여 있어서 확실한 분석이 어렵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길드 일로 일본에 나가 있던 이주하도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참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주황색 장막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미술관 건물을 살폈다.
‘태헌아…….’
이주하는 하태헌에게 프라우스 신도단의 관련 내용을 따로 보고받던 터라 그를 포함한 한이결 능력자와 천사연, 레퀴엠 길드원이 다 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워낙에 잘난 사람들끼리 팀을 맺었으니 안전할 가능성도 컸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디 실종되었던 모두가 무사히 살아 있어야 할 텐데.
끼긱!
이주하가 무거운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뒤에서 검은 차 한 대가 멈춰 서며 문을 열고 익숙한 이가 내렸다.
“최미진 센터장.”
“모두 와 계셨군요.”
검은 단발머리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진 차가운 인상. 관리 본부에 소속된 최미진 게이트 관리 센터장이었다. 그 뒤로는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
“저분은?”
“장막 안쪽을 확인해 줄 능력자입니다.”
그 말에 이주하와 홍시아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그녀는 시큰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수진이라고 해요.”
소개를 들은 홍시아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이수진? 그럼 당신이 관리 본부에서 훈련을 받는다던 그 염동력자군요.”
이수진. B급 염동 능력자로 프라우스 신도단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마약을 집중적으로 푼 강남 클럽을 관리하던 그녀는 마약 조직을 소탕하러 온 한이결을 만난 이후에 관리 본부로 넘어왔다.
지난 2개월간 최미진의 도움으로 관리 본부에서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이수진은 기운이 더 강해졌고, 그만큼 활용성도 커졌다.
이수진을 흥미 가득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홍시아가 한마디 했다.
“염동력이면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쓸 만하겠네.”
“사람이 다가갈 수 없으니, 대신 물건을 보내야겠죠.”
최미진이 챙겨 온 아주 작은 소형 카메라를 이수진에게 건네줬다. 그걸 들고 장막 주변에 쳐진 안전 테이프 앞까지 걸어간 이수진이 두 눈을 꾹 감자 손에 올려진 카메라가 가뿐히 떠올랐다.
공중에 날아오른 소형 카메라는 마치 벌처럼 빠르게 장막 쪽으로 날아갔다. 장막을 뚫고 들어간 그 순간에 이수진의 미간이 강하게 구겨졌다.
“괜찮습니까?”
“심장이…. 오래 해 봐야 2분 정도가 한계 같네요.”
소형 카메라와 기운이 이어진 상태인 이수진이 심장의 통증을 호소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술을 깨문 이수진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능력을 끊지 않았다.
고통을 참아 내며 능력을 사용하던 이수진은 2분 30초 정도가 지났을 때,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몸을 크게 휘청였다. 쓰러지는 이수진을 급히 품에 안은 최미진이 느릿하게 돌아오는 소형 카메라를 잡았다.
카메라를 태블릿PC와 연결한 최미진이 영상을 틀었다. 화면에 뜬 장막 내부 영상을 본 이주하가 눈가를 좁혔다.
“저건…….”
거대한 알처럼 생긴 주황색 보석이 땅에 박혀 있었다. 그 중앙에는 붉은 액체가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총 네 개의 보석에서 흘러나온 빛이 장막이 되어 미술관을 둘러싼 형태였다.
“건물 안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어요. 기운이 더 강해져서요.”
겨우 정신을 차린 이수진이 영상을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확실히 건물 가까이로 다가가자 화질이 급격히 저하되며 끊기기 시작했다.
입가를 매만지며 현상을 지켜보던 홍시아가 말했다.
“전자 기기가 먹통이 되는 것 같은데. 마치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처럼.”
이수진의 능력을 써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미술관 외부뿐이고 건물 내부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잠깐, 저건 뭐지?”
그때였다. 외부에 설치된 미술 작품 근처 바닥에 새하얀 무언가가 발견됐다. 이주하의 질문에 최미진이 재생을 멈추고 그 부분을 확대했다.
“…고양이? 고양이인가?”
“고양이라기엔 너무 작은데… 족제비?”
“개 아닙니까? 허리가 그리 길지 않고 꼬리 털이 많습니다.”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네. 떠돌이 동물이 우연히 휘말렸나?”
“저 생명체도 자세히 확인해 보겠습니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영상을 종료한 최미진이 다시 장막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수진 덕분에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알 형태의 네 개의 보석. 분명 그게 저 장막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템이겠지.
“고생하셨습니다, 이수진 씨. 이제부터는 저 보석을 깨트릴 방법을 찾아내야겠군요.”
“우리도 최대한 도울게.”
“제작자가 필요하겠네요.”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부 직원에게 태블릿PC를 넘긴 최미진이 이어 말했다.
“돕고 싶다고 연락을 해 온 길드와 제작자가 따로 있으니까요.”
***
결혼식 직전, 따로 준비된 방에서 옷매무새를 마저 살피고 새하얀 장갑을 착용하는 거로 준비를 마친 내게 우서혁이 다가왔다.
“이후부터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그러지, 뭐.”
“왕자님께서 계단 위까지 도착하면 상대가 입장해서 똑같이 계단을 오를 겁니다. 저는 같이 가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근처에 있을 테니 무언가 일이 생긴다면 눈짓으로 알려 주십시오. 기사단도 왕자님을 지킬 겁니다.”
“알겠어.”
아무리 가짜 결혼식이라 해도 여기까지 오자 조금은 긴장이 됐다.
어쩌면 이게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어이없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왕자님, 시간 되셨습니다.”
시종 한 명이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우서혁을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온 나는 복도를 걸어 결혼식이 진행되는 성 중앙 정원으로 향했다.
밝은 한낮의 햇살 아래로 새하얀 장식과 화려한 꽃으로 꾸며진 정원이 펼쳐졌다. 내가 등장하자 수십 명의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고 내 앞에 꽃잎이 흩뿌려졌다.
꽃길 양옆에는 꽃이 장식된 둥근 파티 테이블이 수십 개가 준비되어 있었고 빼곡하게 들어찬 귀족들이 내게 박수를 쳤다. 그 사이에는 천사연과 박건호, 권정한, 민아린도 있었다.
높게 이어진 새하얀 계단을 밟아 단상에 도착하자 뒤이어 하태헌이 나타났다. 나와 마찬가지로 하얀 정장을 갖춰 입은 하태헌은 망토 대신에 새하얀 면사포를 머리 위에 쓰고 있었다.
당당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내 옆까지 무사히 도착한 하태헌에게 속삭여 물었다.
“별일 없으셨죠?”
저번에 응접실에서 만난 후로 우리 둘 다 결혼식 준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터라 사흘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내 질문을 들은 하태헌도 고개를 숙인 채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넌 어떻지?”
“저도 물론 안전하게 잘 지냈습니다.”
경건한 목소리로 결혼식을 진행하는 주례자를 앞에 둔 채로 나와 하태헌은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공간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해요.”
“그렇다면 이번에도 거부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적군.”
확실히… 헨젤과 그레텔에서 천사연은 물론이고 나도 그대로 정신을 잃고 신데렐라로 넘어왔으니 이번에 결혼이 끝나고 새 동화가 시작되어도 막아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여우도 찾지 못했는데.’
여우는 김우진의 분신과 함께 있었다. 분신은 김우진이 정신을 잃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거라 결국 혼자 남았을 텐데.
여우 생각에 내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자 하태헌이 천천히 손을 잡아 왔다.
“괜찮아. 그 하얀 놈은 몸집도 작고 투명화 능력도 있으니 잘 숨어 있을 거다.”
“하태헌 씨…….”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근심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하태헌의 모습에 감동이 밀려왔다. 그러는 와중에 주례의 끝이 다가왔다.
“왕국의 별, 고귀한 두 분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담은 키스를 하십시오.”
“예?”
뭐? 뭘 하라고?
내가 놀라서 반문하자 주례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했다.
“키, 키스를 하십시오.”
어버버 거리며 재차 요구해 오는 주례자를 보다가 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결혼식을 구경하는 민아린과 박건호, 권정한. 그리고 팔짱을 낀 채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연의 얼굴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
나와 눈이 마주친 천사연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하지만 눈은 놀라울 만큼 싸늘했다.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졸지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태헌과 키스를 하게 된 난감한 상황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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